지금까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가?
뇌는 생존하기 위해서 예측, 학습, 인지, 기억, 소유감, 대리감, 감정, 동조 등의 정신 활동을 한다. 각 정신 활동은 뇌의 특이한 작동 방식과 만나 정신 활동을 실행하는 동안에 특정한 경험이 만들어지곤 한다. 수많은 뇌 세포가 모여 있는 뇌에서 특정 정신 활동을 실행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은 마치 우리가 집단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나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과 뇌 세포의 토론은 사뭇 다른데, 같은 집단이어도 어느 정도 서로를 구분하는 우리와 달리 뇌 세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깊게 공유한다. 따라서 뇌 세포는 다른 뇌 세포를 설득할 때, 그러한 주장을 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주장의 근거를 명확하게 공유하지 않는다. 대신에 ‘또 다른 나’ 라면 기꺼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장의 근거로서 오로지 목소리의 크기의 차이만 활용한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토론은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을 크게 소리치면, 그 소리의 크기나 동조하는 이들의 수에 따라 나머지 뇌 세포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모습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떤 정신 활동을 한 마땅한 이유를 그렇게나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뇌 속 회의에서 정신 활동의 실행에 관한 주장만이 공유되고 그 이유가 공유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해당 정신 활동의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동조한 뇌 세포의 일부가 매번 부지런히 정황을 파악하며, 자신이 동의한 행동에 관한 인과관계를 추측하기 때문이다. 즉 처음부터 행동의 이유가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고 나중에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이다. 행동이나 정신 활동 후, 그 행동의 이유와 상관없는 엉뚱한 정황을 파악하도록 유도한 다양한 실험 환경에서 피험자가 실험의 의도와 같이 행동 후 행동의 이유를 엉뚱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뇌는 의사결정을 위해 쓰이는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외부 정보는 잘 공유하지만, 정작 그러한 의사결정을 한 이유나 논리와 같은 내부 정보는 잘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명확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정신 활동을 하고 그 활동의 이유를 추적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렇게 이유가 쌓이다 보면, 그렇게 쌓인 이유와 단서가 마치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반대로 하나의 존재를 가정하면, 그 존재가 내부 정보와 외부 정보의 불균형을 한 번에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매번 내부 정보와 외부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존재란 바로 신체와 분리되었지만 신체를 조종하는 물질적이지 않은 무언가, 정신, 마음 혹은 영혼이다.
우리는 불친절한 회의를 하는 뇌 때문에 여러 정신적인 활동이 결국 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그에 비해 생생하게 경험되는 외부 정보나 신체 정보 때문에 우리는 마치 신체와 분리된, 더 상위의 무언가가 신체에 깃들어 신체를 조종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 존재의 정체를 추측할 때, 그 존재가 지배하는 신체에 비해 너무나 작고 한정된 장소인 뇌를 그 정체의 후보로 두지 않는다. 대신 우리 신체 전체를 흐릿하게 정신체화 시킨 모습의 영혼을 상상한다. 혹은 감정을 가장 민감하게 경험하는 명치 쪽에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엉성한 추리 실력을 가진 뇌와 착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경험들이 겹쳐 우리는 모든 정신 활동이 뇌라는 신경 뭉치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빈자리에 다른 존재를 채워 넣는다.
감정이나 동조라는 정신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처음 감정이나 동조라는 정신활동의 시작을 주장한 특정 뇌 세포 뭉치는 그 이유와 논리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그 외의 뇌 부위 혹은 의식)는 감정과 동조가 시작된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 감정이나 동조라는 정신 활동으로 인해 갑자기 원인도 모르고 나타나는 강렬한 끌림의 출처를 추측할 때, 해당 끌림이 우리 내부에서 만들어졌다는 충분한 근거나 정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출처를 뇌가 아닌 외부의 무언가로 두기도 한다. 즉 감정과 함께하는 동기를 마치 외부 세계 어딘가에서 나타난 계시이자 인도자처럼 여기는 것이다. 특히 일부 감정과 동조는 신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더욱 어렵기 때문에 가끔 우리 뇌는 이와 같은 정신 경험을 우리가 상상한 정신체(마음 혹은 영혼)와 연관 지어 버린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측과 학습의 결과인 감정이나 뇌의 사회적인 활동인 동조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영혼이 추구하는 바, 영혼의 이끌림이라고 해석한다.
이처럼 우리의 상상과 달리 우리 뇌는 인과를 추측하는 존재이지, 매번 합리적으로 온전한 인과를 관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즉 만들어진 잘못된 추측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정신의 본질이 합리성과 관련이 있으며, 때문에 뇌가 합리적으로 인과를 관조할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대다수 동물은 살아남기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한 위험 혹은 보상에 알맞은 대응 활동을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때 뇌의 예측과 계획을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전기 신호나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고 해당 행동을 잘 이행하기 위한 신체 상태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변화 중 일부는 감정이라는 형태로 경험되는데, 그 감정은 예측이 꼭 실현될 것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주며 그러한 감정(혹은 그것과 동반하는 정보)을 경험한 다른 뇌 부위나 다른 기관은 예측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대응 행동에 관한 명령을 꼭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시간이 흘러 예측했던 그 순간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 때, 다시 한번 경험된다. 동물은 자신의 예측 방식을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게 최적화하기 위해서 예측했던 결과와 실제 결과를 비교하며, 자신의 예측 능력이나 환경 혹은 해당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을 준 변수에 관한 평가를 진행한다. 만약 예측이 성공적으로 실제 결과를 설명하거나 혹은 정확한 결과를 예측하진 못했지만 생각보다 결과가 좋았다면, 보통은 이번의 예측 방식이 다음 예측에도 반복될 수 있도록 하는 정보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예측의 편향을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예측에 관한 정보가 저장될 때, 해당 예측 방식 자체를 보상이나 위험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정보가 같이 저장되게 되는데, 이러한 보상 혹은 위험과 관련된 정보가 만들어질 때는 가끔 예측한 미래의 실현에 관한 강렬한 확신을 느끼게끔 하는 감정이 동반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존 활동을 반복하며 특정 미래가 실현될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생존 활동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미래의 실현에 관한 믿음이 특정 기능을 하고자 생겨났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다시 이 모든 상황을 편하게 설명하고자 세상에는 꼭 실현될 미래라는 것이 있고 때문에 정답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며, 우리 영혼이 그것을 어렴풋이 느껴낼 수 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아낼 영혼의 고유의 능력이 진실을 좇는 합리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그가 하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진실을 향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을 영혼에 관한 믿음을 그렇게나 길게 유지하는 멍청한 존재일 리가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러 장치로 뇌를 들여다보게 되면 그러한 논리의 기본이 되는, 우리가 합리적인 존재라는 가정이 정면으로 부정된다. 그러니까 영혼이나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상상이 사실과 거리가 먼,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을 한 인간 혹은 그 뇌가 딱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긴 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에 관한 믿음이 그렇게나 긴 시간 이어진, 놀라운 일에 어떠한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환경과 생존의 가혹함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관한 특정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부터 만들어진 사상은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존속할 수 있다. 즉 각종 믿음이나 사상은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생존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서 존속하거나 사라진다. 영혼과 그것이 좇을 존재를 추측하고 믿는 것이 생존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것을 믿는 존재와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영혼과 그것이 좇을 존재를 추측하고 믿는 것은 생존에 기여하거나 최소한 생존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잘 생각해 보면, 뇌의 불친절한 정보 공유는 전체 뇌 즉 ‘내(의식)’가 신체를 온전히 지배하지 못한다고 추측할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뇌의 각 부분은 분명 여러 신체 활동, 여러 정신 활동을 담당하며, 이들의 합은 분명 우리의 전체 활동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나’ 혹은 의식, 뇌 전체의 입장에서는 각 뇌 부위의 행동 논리를 온전히 파악(공유) 하지 못하기에 해당 입장에선 매번 모든 활동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 하지만 이때, 영혼 혹은 마음의 존재를 가정하면 ‘내’가 신체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신체에 관한 통제감, 즉 대리감은 ‘나’(의식, 마음 혹은 영혼)라고 하는 (정신 활동 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의식되고 작동 논리를 파악하는 일이 더 수월한) 정신활동이 기꺼이 신체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려도 된다는 느낌의 근거가 된다. 즉 우리는 정신활동의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는 현상을 해명하고자 영혼이나 마음을 가정하며 대리감을 경험하고 그럼에도 분명 ‘내’가 활동을 통제하고 있다는(혹은 해도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곧 매번 우리가 현상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의심에 빠져 통제감을 잃는 일을 방지해 주며 우리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데 기여한다. 결과적으로 영혼에 관한 믿음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져 생존에 있어서 유리함을 가져다준다.
영혼이 추구할 바는 신체의 통제뿐만 아니라 환경의 통제에 관한 자신감에도 기여하며 결과적으로 생존에 기여한다. 생존을 위해 미래의 위험과 보상을 예측하는 일은 그다음 의사결정이나 신체적 대응을 촉진하는 감정이라는 정신 활동을 만들어낸다. 또 뇌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춰 점점 더 정교한 예측을 해내기 위해 매번 자신이 한 예측과 실제 결과를 비교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며 다음 예측에 반영할 정보를 만들어낸다. 즉 학습한다. 이러한 예측, 감정, 학습이라는 일련의 과정 중 일부는 영혼이 추구할 바를 추측하도록 만든다.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학습을 통해 다음 예측에 반영할 정보가 쌓이며 ‘나’, 환경 그리고 특정 대상에 관한 편향된 예측 경향, 즉 믿음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믿음 중 일부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좋은 결과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내용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흔들리는 풀숲에 가까이 가서 포식자 같은 위험을 경험한 적은 없고 반대로 먹이와 같은 보상을 얻은 적이 많다면 흔들리는 풀숲에 관한 보상에 편향된 예측 경향, 즉 흔들리는 풀숲에 가까이 가면 보상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흔들리는 풀숲 혹은 보상에 관한 조건이자 믿음은 해당 환경에서 더 적절하거나 더 빠른 의사결정을 도우며 생존에 기여할 것이다. 믿음은 그 믿음이 설명하는 대상을 마주할 때의 감정과 함께 의식되는데, 우리는 그 감정을 영혼(마음, 정신)이 추구하는 바라고 해석하곤 한다. 즉 우리는 학습으로 형성한 믿음과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현상을 영혼이 추구할 바라고 해석했다. 사실상 해당 환경에서 확률 상 더 적절한 판단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높은 믿음과 감정에 영혼이 추구할 바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더 적극적으로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모르기에 그 믿음을 매번 의심하게 되면, 빠른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생존 확률이 높은 환경에서 살아남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추구할 바를 믿고 학습으로 만들어진 정보를 믿는 일은 적극적인 대처에 기여하며 생존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엄밀히 생각해 보면, 우리 뇌는 ‘내’가 하는 다양한 활동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어색하게 바라보거나 불편하게 바라보게 되면 자신의 신체나 환경에 관한 통제감을 잃으며 여러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고자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를 상상하게 되면, 그 정보의 공백을 메꾸고 ‘내’가 나 자신과 환경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통제감을 바탕으로 더 적극적으로 생존을 향한 행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추측은 엉성함에도 개체에 생존에 기여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통제감을 통한 적극적인 생존 활동은 우리와 같은 사회적인 동물의 생존에 있어서 비율상 그렇게 큰 기여도를 갖는다고 보긴 어렵다. 사회적인 동물의 생존에 있어서 더 중요한 요소는 혼자서 적극적으로 생존 활동을 하는 것보다 무리에 속하는 것과 그 무리를 따르는 것이다. 즉 엉성한 추측과 그 추측에 관한 믿음이 개체의 생존에 기여했어도 무리 존속이나 무리 생활에 기여하지 못했다면 그 믿음은 이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일은 무리 생활과 무리 존속에 충분히 기여한다. 오히려 집단의 발전에 기여하며, 그 때문에 기꺼이 존속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양한 사회적인 동물의 무리가 존재하며 서로 충돌하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가정한다면, 해당 환경에서 특정 무리는 다른 무리에 비해 우월해야만 더 오래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비해 기술이 퇴보한 옛 환경을 가정했을 때, 무리가 우월해지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핵심 조건은 바로 규모일 것이다. 즉 인간에 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발전한 기술로 만든 기계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수가 해당 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무리의 규모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내집단에 관한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이다. 같은 집단으로 묶이기 위해 어떤 조건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무리에 소속될 수 있는 잠재 구성원의 수가 정해진다. 이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신체적인 조건이나 치장, 출신지, 특정 존재에 관한 기호나 믿음을 그 조건으로 두기 보단, 추상적이고 모호한 조건을 두는 것이 잠재 구성원의 수를 늘리기에 더 유리하다. 그렇다면 특히 영혼에 관한 믿음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조건이며, 특히 인간이라면 대부분 영혼을 추측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정신 활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재 구성원의 수를 아주 크게 가져갈 수 있는 소속 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영혼에 관한 추상적인 경험과 믿음을 공유하며, 내집단 즉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정의하는 일이 더 큰 규모의 집단을 형성하도록 기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집단 구성원을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정의한 집단은 다른 내집단 정의를 가진 집단에 비해 규모의 한계를 두지 않고 성장해, 구성원 수를 확보하는데 더 유리한 입지를 고수하며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오래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믿음의 공유는 영혼을 믿는 집단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조하는 뇌는 같은 무리의 구성원이 추구해야겠다고 느끼는 바를 나 또한 거의 비슷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준다. 그 결과 우리는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가 공통된 것이라고 느낀다. 단순히 영혼에 관한 믿음을 공유했을 때는 각 구성원이 똑같은 무게의 가치를 지닌, 각각 존중해야 할 존재라는 결론에 그치지만 그 영혼이 추구하는 바가 공통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면 각 존재가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같은 지향점을 공유하며, 그 사회는 단순한 모임에서 벗어나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믿음의 공유는 더 큰 규모의 집단이 더 끈끈하게 협력할 수 있게 만들어 더 강력한, 경쟁력 있는 집단이 되도록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사상은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의 규모를 키우고 내실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며 해당 집단이 더 강력한 집단이 되어 여러 집단 속에서도 기꺼이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믿음은 개인이 가질 때에도 생존에 기여하지만, 그 믿음을 타인과 공유할 때는 사회적인 기능을 하며 집단으로서의 생존에도 기여한다. 그 믿음에 충실한 이들이 살아남고 자손을 남기기 유리한 환경이었기에 감히 믿음을 반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은 긴 기간 굳이 반박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며, 우리의 온갖 생각에 스며들었다.
특히 감정과 학습으로 형성한 믿음이라는 나침반이 이끄는 바를 좇아간 끝에 영혼이 극적으로 변해 완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존속하고 있다. 우리와 같은 물질적인 것만을 주로 믿는 현대인은 더 이상 영혼을 믿지 않지만, 영혼을 부정하고 생긴 빈자리에 삶, 의미 등을 넣으며 해당 믿음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삶이 완전해질 것이라는, 단순히 단어만 바꾼, 본질은 똑같은 형태의 믿음을 가진다. 그 결과, 우리는 영혼이나 완전한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믿고 추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좇는 일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의미를 좇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무지의 원인은 영혼과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믿음이 삶에 관한 견해에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야 삶이 완전해진다는 생각은 반대로 의미 없는 삶과 생존 그 자체를 부정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현대인은 존재하지 않는, 더 가치 있는 무언가, 의미를 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비루하게 여기며 부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잘못된 믿음이 이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얘기했듯 영혼이 추구하는 바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분명 우리 삶에 기여하기에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를 믿는 것은 내외부 정보의 불균형을 이겨내고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또 학습을 통해 만들어낸 여러 정보를 영혼이 추구할 바로 여기며 믿게 되면 자신과 환경에 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거나 특정 조건에 관한 정보를 만들어내 긍정적인 미래를 경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계획할 수 있게 된다. 즉 영혼을 믿는 우리는 좇아야 할 대상을 설정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할 수 있으며, 아직 그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고, 여러 장애물을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더 발전한 가술을 가진 사회의 거주민들은 이 다양한 혜택을 누리기 어려워한다. 우리 조상은 남들을 적당히 모방하며 살았고 그렇게 남들과 같이 영혼이 추구할 바를 좇았다. 즉 대다수가 큰 고민 없는 모방을 통해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믿고 추구했기 때문에 그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될 영혼이 추구하는 바의 정체에 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웃이 아닌 발전한 기술의 결정체와 일하며, 삶을 모방할 이웃을 잃었다. 또 기술과 교육의 발전을 통해 믿음의 근간이 되는 영혼에 관한 다양한 사상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직접 다양한 추상적인 가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겹치며 현대인은 무엇을 좇을지 직접 고민하고 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홀로 비판적으로 추상적인 가치를 분석해 본 결과, 이 길의 끝에 원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인은 섣불리 추구할 것을 설정하지도 못하면서, 좇을 의미나 목표가 없는 자신의 무미건조한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의심을 가진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나 목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다양한 기여를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의미나 목표 없는 삶을 부정적으로 여기던 관성만이 남아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긴 기간 우리를 지탱해 온 사상과 삶에 관한 견해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변화한 사상 속에서 우리는 좇을 바와 해야 할 일을 잃게 된다. 이미 가치나 의미를 손에 넣었다면, 완전해진 삶에 새롭게 더할 무언가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삶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더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의미 있는 삶의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삶을 대할 수 있어야 이전의 사상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부정하는 일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오직 결핍을 통해서만 동기를 형성하던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뇌를 이해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더 나아가 삶의 유지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우리가 매번 인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삶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논리는 우리를 구성하는 뇌나 세포가 생존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근거로 한다. 우리를 포함한 동물은 생존을 위협하는 무언가를 대할 때, 고통이 동반되어 자연스럽게 그것을 피하게 되며 반대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보상을 대할 때, 기분 좋음이 동반되어 자연스럽게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본능이라고 부르는,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정신활동이나 행동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세포들이 생존을 지향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을 근거 삼아 살아남는 것은 뇌나 세포가 지향하는, 그들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 혹은 단순한 목표라는 추측이 이어진다.
그런데 정말로 그들은 살아남는 것을 지향할까? 정말로 생명체와 그것을 이루는 더 작은 단위인, 세포에게 있어서 살아남는 일은 맹목적으로 추구될 만큼 특별한 무언가로서 여겨지는 것일까? 여러 정황을 통해 우리는 더 작은 세계에서 그러한 지향이 발현되었다고 여길만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뇌의 작동 방식과 생존에 있어서 이득이 겹치며 영혼이 추구하는 바라는 허상이 생겨난 것처럼,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특정 요소가 겹치면서 생존의 의지가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일관성 있게 의심을 갖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답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또 그러할 필요도 없다. 즉 우리는 다시 한번 최고의 답을 찾아야만 삶에 의미가 생긴다는 이전 세대의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하는 일이 최고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최고의 답을 찾는 과정을 폐기하고 그것을 대체할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영혼을 믿고 추구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으나, 자신에게만은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답을 찾았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 이전과 달리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만든, 삶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 역시 현재 시점에서 쌓인 과학 지식을 통해 만들어진, 영원한 지식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영혼에 관한 사상 자체가 최고의 답을 다루는 사상이고 또 그것을 대체할 생각을 찾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이전의 믿음을 대체하는 삶에 관한 새로운 관점이 마치 새로운 최고의 답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실제로 한 일은 그렇게 엄청나게 거창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살고자 우리의 부적응을 최선을 다해 해결했을 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생존과 번영을 향한 의지가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생존과 번영을 향한 의지가 절대적인 지향점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자 추구하는 것이 꼭 절대적인 무언가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소중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던 삶에 관한 관점에서 벗어나 이전과 같은 문제를 공유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새로운 관점을 최선을 다해 만든 것일 뿐이다. 의심에 가득 찬 우리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최고의 목표가 아니라, 의심을 뚫고 살아갈 논리와 힘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진화론이나 심리학을 얕게 아는 이들이 오해를 통해 만들어내는 삶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을 취한다. 몇몇 이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더 작은 요소들이 생존과 번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존과 번영을 향한 의지를 새로운 최고의 지향점으로서 임명한다.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지향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생존이나 번영을 향한 의지는 삶을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일 뿐, 최고의 지향점이 아니다. 이는 영혼, 진리, 신 등을 믿는 관점에서 진정으로 벗어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무언가를 절대적인 정답, 지향점, 선으로 여기는 일에서 벗어나하기 때문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상상하며 그것을 추구하거나 손에 넣는 일을 가정해야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의미나 가치를 좇던 이전의 삶에 관한 태도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러한 틀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믿음을 단어만 바꿔서 고수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생존과 번영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절대적인 선이라고 믿는 것은 신, 진리 등을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절대적인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살아갈 방법과 동기를 형성하는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과 동기를 찾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절대적인 답을 찾는 일에 갇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의지에 관한 더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 호기심이 존재할 수는 있다. 호기심을 해소하고 주장의 근거를 더하기 위해 그 실체를 완전히 밝혀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존재를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요소에 관해서는 얘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 글에서는 그 의지를 추측하게 해주는 다양한 요소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