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의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뇌
삶의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를 정의하는 일은 삶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계획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목표를 이뤘을 때를 떠올리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고, 같은 의미를 좇는 아군과 교류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라는 너무나 눈부신 목표를 향한 절박한 발걸음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보잘것없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 가끔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이나 결국 의미를 손에 넣지 못한 노년은 허무하고 공허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점점 개인화되는 현대 산업 환경에서 현대인들은 직접 자신만의 의미를 꼼꼼히 찾아봐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의지하던 이웃과 삶의 목표나 의미를 나누던 옛사람들과 달리, 현대인은 자신만의 의미를 꼼꼼히 찾느라, 삶의 의미나 목표를 쉽사리 정하지 못한다. 결국 많은 현대인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허무하고 공허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현대인은 자신의 똑똑한 비관과 의심, 회의를 극복할 논리가 필요하다. 특히 삶의 의미가 될 만한 다양한 가치를 모두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한 현대인에겐 삶을 지탱할 완전히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 온갖 가치와 삶에 관한 관점이 현대인이 의심한 바와 같이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삶을 극적으로 바꿀, 찬란한 삶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 영혼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영혼이란 허구의 개념 위에 쌓아놓은, 의심을 받고 있던 논리나 삶에 관한 관점은 유효하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우리의 삶을 100%의 확률로 아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삶의 의미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것이 합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믿어서 결과적으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뇌가 작동하는 방식 또한 의사결정의 근거를 꼼꼼히 따져보는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주장을 채택하는 비합리적인 방식에 가깝다. 비합리적인 뇌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굳게 믿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회 구성원과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 삶을 극적으로 바꿀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인의 의심과 같이 우리의 기대만큼의 보상을 줄 삶의 의미나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겐 이 오래된 믿음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운 삶에 관한 관점이 필요하다. 다양한 관점 중 기준이 될 만한 것은 뇌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며, 영혼이나 옛사람들이 꿈꾸던 삶의 의미를 부정했던 그 지식 체계이다. 우리는 다시 해당 지식 체계를 통해 세포나 뇌를 들여다보며 삶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삶이 공허하거나 허무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구성하는 더 작은 요소들은 우리 삶을 지속시키고자 매우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존에 위험에 될 만한 것을 앞두고, 통제할 수 없는 고통 혹은 불쾌함을 맛보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피해 살아남고자 하게 된다. 반대로 우리는 생존에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앞두고, 통제할 수 없는 끌림이나 유쾌한 기대감을 맛보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추구해 살아남고자 하게 된다. 이처럼 의식적인 통제 밖에서 일하는 우리 안의 다양한 기능은 우리가 살아남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그들이 생존 혹은 번영을 우선 가치로 여기며, 삶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를 근거로 삶에 관한 새로운 태도를 만들 수 있다. 바로 이전처럼 대단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 삶은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이다.
삶에 관한 새로운 관점은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를 이루는 더 작은 것들의 삶에 관한 관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앞으로 우리는 의미가 부재하더라도 삶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또 좇을 의미가 없어져서 목표나 계획, 동기 역시 사라졌는데 이 빈자리를 채워 넣는 것 역시 작은 것들이 해오던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늘 그래왔듯, 소중한 삶을 이어나가는 어려운 일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가고자 해야 할 일이 새롭게 정해졌다. 본격적으로 그 방법에 관한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를 이루는 요소가 살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관해 조금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리 뇌와 우리가 믿는 지식 체계가 이전처럼 우리를 사실에서 거리가 먼 곳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과 번영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는지 알아볼 것이며, 그것이 현재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근거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얘기해 볼 것이다.
정작 뇌나 세포는 말이 없다. 우리는 단지 부지런한 세포의 움직임을 관측하며 쌓은 엄청난 자료를 통해 그들이 결국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100% 진실이 아닌 것 위에 삶이라는 것을 쌓아야 하는 상황을 앞에 두고 우리는 두 가지 걱정에 빠질 수 있다. 우선 우리의 추측과 달리 뇌나 세포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다. 혹은 사실 더 무미건조한 진실이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우리와 몇 천 년 간 함께 해온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허구였던 것처럼 생존을 향한 의지라는 추상적인 개념 역시 허구일지도 모른다. 단지 어떤 원리로 인해 생긴 편향된 상호작용 방식이 마치 세포가 혹은 세포를 이루는 더 작은 무언가가 생존을 향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영혼 세계를 반박한 지금까지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아마 이와 같은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어쩌면 영혼이라는 허상을 넘어 뇌를 마주하게 되면서 삶에 관한 관점과 살아갈 방법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 것처럼, 생존 의지라는 허상을 넘어 더 작은 세계의 역학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새롭게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은 아직 그 역학을 완벽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그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목표를 잊지 말고 지향점을 변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살아갈 방법을 찾는 여정에 있다. 우리는 몇몇 어른들이 남긴, 오직 후회만이 예상되는 이전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을 목표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굳건한 이전의 삶의 방식을 반박하고자 과학이라는 지식체계를 사용했다. 그러나 과학을 응용해 삶에 관한 관점을 세웠다는 것과 진리를 좇으며 그것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겠다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지금 유효한 새로운 논리를 만들고자 과학을 활용한 것과 절대적인 지식을 좇는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어쩌면 절대적인 무언가를 좇아야만 한다고 조건을 두는 것은 영혼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만 영혼과 그 삶이 완전해진다는 조건을 둔, 이전의 삶에 관한 논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또 애초에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과학은 작은 인간이 세상을 알고자 힘을 합쳐 관측 가능한 근거를 부지런히 쌓아가는 지식 체계다. 따라서 어떤 근거가 새롭게 쌓이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기도 한, 유동적인 지식 체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불변의 속성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진리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의 근본적인 목표도 이전의 것보다 유효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과학이란 지식 체계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유효한 지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굳이, 애초에 지금 알 수도 없는, 우리를 이루는 가장 작은 세계에 관한 지식에 엄청난 가치를 두며 지금 유효한 삶의 방식과 지식 체계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삶에 관한 새로운 접근에 근거가 되는, 작은 세계의 역학이 마치 생명체가 존속을 목표로 하는 결과처럼 보이는 현상을 굳이 더 깊게 팔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생존 의지라는 모호한 무언가에 가능성을 한 가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실존할 가능성이 떨어지는 의지라는 것에 정신적인 무언가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의인화시키는 순간, 옛사람들이 영혼이라는 착각을 커다란 세계관으로 발전시켰던 일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생존 의지를 삶의 방식의 기본 논리로 세우면서 하게 되는 두 번째 걱정과도 관련이 있다.
두 번째, 우리를 이루는 더 작은 요소가 ‘나’라는 정체성의 존속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논리는 최선의 가치가 곧 생존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무언가를 최선의 것으로 두고 격렬히 추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법이 너무나도 다양한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기꺼이 오랫동안 고민하기보단, 고민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하고자 하는 욕구에 휩싸인다. 우리는 뇌를 공부하며, 의미라는 것을 손에 넣어 삶을 온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삶 그 자체가 소중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렵기에 그것을 해내고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마치 ‘나’를 이루는 더 작은 요소를 ‘나’의 실체로 보고 작은 요소가 최선으로 추구하는 바를 ‘나’ 역시 최선으로 추구하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이러한 착시에 쉬운 선택지를 고르고 싶은 마음이 더해지면, 생존이 곧 최선의 가치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논리는 직관적인 우려와 같이 실제로도 문제가 있다. 세포 혹은 그 안에 있는, 그것보다 더 작은 DNA나 단백질이 추구하는 존속이라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두고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하겠다는 논리는 세 가지 문제를 가질 수 있다. 첫 번째, 존속이라는 목표를 구체화하며 건강 유지나 번식과 같은 특정 목표에만 집착하게 될 수 있다. 존속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를 직관적으로 구체화하면 생존, 노화 방지, 번식 등의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목표를 단순화하게 되면, 마치 성공, 부, 명성, 화목한 가정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추구하는 것과 같다. 온갖 변수 속에서 이루기 힘든 목표를 좇게 되며 많은 실패를 겪게 될 수 있고, 또 목표의 수준 자체는 모호하기 때문에 막상 일정 수준의 목표를 이루게 되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목표만 집착하느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가치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건강을 유지하느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막상 건강을 손에 넣으니 더 건강해지고 싶어질 수 있고, 건강만을 추구하느라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 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를 좇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유효하다고 보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성공, 건강, 행복과 같은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를 좇은 결과가 우리가 상상한 만큼의 만족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우리의 의심을 완전히 검증하고자 우리가 상상한 만큼의 만족감을 보장할, 삶과 세상을 통제할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 결과, 삶과 세상을 통제하고 거대한 만족감을 줄 무언가가 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나타난 상상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삶에 근본적인 결핍이 존재하며 그 결핍을 해소할 무언가를 좇아야만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점이다. 존속을 최우선의 목표로 두고 건강 유지나 번식에 집착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 만든 삶에 관한 관점을 무시하고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이전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과 같다.
세 번째 문제점은 작은 것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가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분명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의식할 수 없는, 작은 것이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며 의식되는 정신 활동이나 욕구에 반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삶에 관한 통제감이 떨어지는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더 작은 것들이 생존을 추구한다는 지식은 가끔 의식되는 생존을 향한 욕구 혹은 정신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한 정신활동이나 욕구는 ‘나’가 의식할 수 있는 다양한 정신활동이나 욕구 중에서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나’ 혹은 ‘나의 의식’과 생존 욕구를 가진, 나를 이루는 더 작은 요소를 어느 정도 분리된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삶의 주도권을 두고 둘 사이의 갈등 혹은 조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최선의 것으로 두고 건강 유지나 번식이라는 것을 향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게 되면, 의식이 추구하는 바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의 의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사결정 권한(대리감의 경험)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통제감의 훼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모두 생존 지향 혹은 존속이라는 개념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그것을 굳이 구체화하는 과정을 겪게 되면서 그것을 특정한 행동으로 정의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존 지향이라는 개념을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포와 뇌가 생존을 지향하고 그 영향을 받는 ‘나의 의식’ 역시 생존을 지향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얘기는 적극적으로 건강을 추구하거나 적극적으로 번식하라는 단순무식한 해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생존(혹은 번영 <번영은 곧 더 먼 미래의 생존을 보장받는 것을 뜻한다.>)을 지향하는 방식은 너무나 다양하고 때문에 삶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 역시나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와 우리를 이루는 작은 것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생존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 치고는 그 모습과 방식이 너무나 크게 다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신기하게도 다양한 생물이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각각이 지향하고 있는 생존을 성공적으로 이뤄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수많은 세포가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나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단순한 생명체는 딱히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차이 때문에 생존을 지향한다는 것은 너무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게 된다. 그저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 자신을 끝없이 복제하며 그 존재를 늘리는 것, 다른 이와 섞이며 자신의 일부만을 후대에 넘겨 생존하는 것 등 모두가 생존을 지향하는 행동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각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환경에 맞게 생존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래서 생존을 지향한다는 말은 단순히 건강을 추구하거나 번식을 추구한다는 얘기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 넓은 범주를 하나의 본질적인 개념으로서 정의하지 않는다면, 생존 지향을 구체적인 목표로 치환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살아갈 방법을 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밝혀진 더 작은 세계의 법칙(혹은 물리 법칙)을 참고해, 생존 지향을 구체적인 하나의 행동으로서 정의해 보는 일을 제안해보고자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존 활동이란 구분과 재구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분이란 정체성의 구분이다. 모든 생물이 예외 없이 세포라는 단위로 분리될 수 있음에도 그 최종적인 모습이 다른데 그 이유는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세포는 세포막으로 인간은 피부로 벌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기준으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한다. DNA를 통해 그 구분의 경계가 정의되면 그 구분을 공유하는 이들은 하나로 뭉치게 된다. 이를 통해 생명체에 따라 ‘나’는 하나의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세포막과 내부구조 그리고 몇몇 단백질의 합)가 될 수도 있고 세포 뭉치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체(그렇게 만들어진 세포 뭉치)의 뭉치가 될 수도 있다.
생존 활동이란 이렇게 구분한 ‘나’를 온갖 요소와의 상호작용이 필연적인 환경 속에서도 유지해 내고자 부지런히 ‘나’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환경에서 온갖 요소와의 상호작용에 노출되다 보면 생명체는 자신이 구분한 ‘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나’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가 실존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생명체는 그 모습을 유지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한다. 이 일련의 활동은 재구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선 생명체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손상되거나 변형된 자신의 옛 구성요소를 버리고 다시 새롭게 그 구성요소를 만들기 위해 외부의 물질을 받아들이고 그 물질을 변형시킨다. 이러한 재구축 과정은 식사 혹은 호흡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재구축은 때로는 더 큰 단위에서 이뤄지며 이 때문에 세포가 통째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또 ‘나’와 너무 멀지 않은, ‘나’와 그렇게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 존재와 섞여 환경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들고자 존재를 처음부터 재구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생존 활동은 구분된 ‘나’를 유지하고자 하는 재구축 활동이라는 정의로서 어느 정도 설명된다.
이러한 정의 하에 구분이 갖는 특징 때문에 생존 활동이 다양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구분은 유동적이다. 온갖 변수와의 상호작용이 끝없이 펼쳐지는 환경 속에서 ‘나’라는 울타리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히려 변화가 넘치는 환경에 맞춰 ‘나’라는 울타리를 있는 그대로만 유지하는 일은 반대로 ‘나’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전략적인 선택을 해서 인지 혹은 애초에 그저 ‘나’라는 울타리가 물리적인 법칙 하에 어느 정도 유동적이기 때문인지 확언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구분은 가변적이다. 또 결과적으로 가변적인 구분은 생존 활동을 이어나가는 일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특히 사회적인 동물에게 구분은 더욱 가변적이다. 무리를 이뤄 생존하는 사회적인 동물에게 있어서 무리 구성원의 생존은 곧 ‘나’의 생존과 직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이웃이나 가족을 마치 ‘나’처럼 여기고 헌신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유지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세포는 단 하나의 특정 세포의 유지에 집착하기보단 수많은 세포의 집단인 ‘나’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이들은 뇌라는 세포 뭉치를 더욱 존중한다. 우리는 더 큰 세포 뭉치가 되면서 온갖 세포가 수용하는 정보를 한 곳에 모아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세포뭉치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뇌이다. 모든 세포는 분명 ‘나’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때문에 생존만을 강력히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더 자세히 바라보면 뇌가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나’의 기준을 변경하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을 존중한다. 따라서 생존을 지향을 구체적인 목표로 치환한 결과는 단순히 건강을 추구하거나 번식을 추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생존하고자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좇고 위험이 되는 것을 피한다. 우리는 이 단순한 법칙이 더 장기적인 계획을 만드는 데에도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 결과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대단한 것을 장기적으로 좇다 보면 더 긴 기간 안정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외에도 다른 복합적인 이유가 합쳐져 우리는 최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장기적으로 추구하는 일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 행복, 진리, 신 등을 좇는다. 진리나 신을 부정하고 인간 혹은 생물을 과학적으로 들여다보겠다는 이들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을 한다. 추상적인 생존 의지를 섣불리 건강 혹은 번식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결국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둔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환경은 더욱 복잡하다. 하나의 가치를 좇는 과정은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무조건 긍정적인 미래를 선사해주진 않는다. 또 그 환경에 반응하는 우리 역시도 더욱 복잡하다. 다양한 생존 활동을 건강 유지나 번식으로 제한하다 보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생존 활동은 마치 ‘나’라는 존재를 구분하고 그것을 상호작용이 넘치는 환경에서도 유지하고자 자신을 계속해서 재구축하는 활동에 더 가까워 보인다. 특히 ‘나’라는 존재의 구분이 어느 정도 가변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활동은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DNA의 강력한 생존 의지를 따라 오직 건강 유지와 번식이라는 목표를 따르는 생존의 노예, DNA가 탑승한 로봇이라는 추측은 틀렸다. 생존 의지의 존재를 수용하면서도 생존 그 자체만을 최고선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생존이란 생각보다 다채로운 활동이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자유롭게 살면 된다. 특히 신경 세포 뭉치는 다른 세포로 하여금 자유로운 선택을 할 권리를 얻어냈다. 온갖 세포 심지어 뇌 세포의 일부도 의식되지 않는 사이에 생존에 관한 주장을 할 테이지만 그렇다고 의식되는 뇌 세포(혹은 그 활동이) 꼭 그 주장에 완전히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다양한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해보라는 말이지, 건강 유지나 번식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최선으로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단 하나의 최고의 목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을 벗어던지고자 노력해 왔다.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소중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의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후쿠오카 신이치. (2020).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