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좀 살만할까?
먹고살만하다. 기술이 발전해 풍요로움이 넘치는 시대에 살며 그중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에 살고 있다. 전반적인 인건비가 올라서 엄청난 숙련도를 요구하지 않는 직종에서도 어떻게든 먹고살만한 만큼의 임금을 준다. 식품 공학의 발달과 대형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엄청난 칼로리를 지닌 식품을 싸고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뇌의 작동방식을 이해해 보고자 뇌의 설계도를 물려준 조상들이 살던 거친 환경을 유추해 보는 일이 잦은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의 환경은 과거에 비해 생존을 도움이 되는 자원이 너무나 풍부하다. 즉 먹고살만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다지 살만하지 않은 것만 같다. 혹시 어쩌면 우리가 먹고살만하다고 느끼며 감사함이나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조건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우선 권태로워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우리 조상이 그래왔듯이 대다수 사람들은 타인을 따라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 직장인 시절까지 쭉 이어져오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장소로 가서 주어진 업무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집에 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대다수가 하는, 반복을 나 역시 하게 되면서 그 대가로 어느 정도의 먹고살만함을 누릴 수 있게 되지만, 반복이 쌓이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한 삶의 방식 자체가 권태로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대다수가 누리는, 흔한 먹고살만함을 권태로움을 대가로 얻게 되면서 먹고살만함은 딱히 감사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누군가는 권태로움이 주는 충격에 더 큰 무게를 부여하면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 달리 반복되지 않는 젊음 때문에 어느새 권태로움과 노화밖에 남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 보면, 확실히 사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긴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습관처럼 타인을 참고하면서 삶의 방식을 고민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 권태로움을 더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 분명 주변의 누군가는 당연한 권태에서 잘만 벗어나 있다. 나와 비슷한 반복적인 일상을 겪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풍요를 누리는 이가 있고,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도 충분한 정신적인 만족을 누리는 이가 있다. 혹은 권태와 상관없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소중한 인간관계를 형성한 이도 있고 공부와 깨달음을 통해 권태를 벗어난 이도 있다. 누구나 겪을 만한 문제를 극복해 낸 이들을 참고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권태가 극복 가능한 문제라고 바라보게 된다. 더 나아가 권태를 극복한 이를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로 여기게 되면서, 우리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권태는 꼭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로 취급하게 된다. 즉 반대로 권태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의 나 자신의 삶을 아직 부족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겪은 사람들 중 일부는 무언가 더 중요한 게 삶 속에서 결여된 것만 같다고 느끼게 되고 결국 그 결핍을 채울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손에 넣고 권태로움 혹은 결핍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애초에 권태로움이나 결핍을 해소해 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를 손에 넣는 일부터가 너무 어렵다. 또 막상 그 무언가를 손에 넣어도 권태로움이나 결핍이 완전히 해소되는 일은 없다. 구원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절대로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먹고살만한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도 삶이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진다.
정리하자면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며 분업은 고도화되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직업 경험은 더 이상 자신의 직업 활동이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이바지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또 기술의 발전이 선사하는 풍요로움이 당연해지며, 우리는 생명체임에도 생존이 커다란 과제라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 결국 대다수에게 삶을 이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며, 그들은 전혀 다른 문제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과 그 일상의 연장선으로서 예상되는 단조로운 미래는 불쾌함을 선사해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은 주변을 돌아보며 확신으로 변한다. 자신과 같이 단조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매번 긍정적인 변화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들을 참고하며, 자신은 지금 무언가 문제가 있는 상태이며 답을 찾아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답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낸 답은 오답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매번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다. 무리하게 설정한 성공 조건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 가치 없게 바라보는데 기여하며,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불쾌함을 키울 뿐이다. 또 막상 그 불쾌함을 완전히 극복해 냈다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 깨달음을 얻었거나 성공했다는 이도 자신 역시 그 답을 찾는 과정에 있다고 증언할 뿐이다. 그 옛날 엄청난 부와 현명함을 지녔었다는 한 왕 역시 결국에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인에겐 너무나 익숙한 학문인 통계학에서도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고 원하는 결과만을 얻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옛 왕이나 통계학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미래와 그것에 반응하는 마음을 완벽히 통제해 우리 삶을 좀먹는 결핍 혹은 권태로움을 완벽히 극복할 무언가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리숙한 추측으로 만들어낸 위협적인 권태로움과 결핍의 실체를 직면할 필요가 있다. 실존하지 않는 결핍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거꾸로 추적하며 그 감정의 실체를 명확히 알 필요가 있다. 결국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엉성한 추측이나 삶에 관한 사상에서 벗어나, 환경적인 변수와 이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뇌에 관해 생각해봐야 한다. 거대한 허상에서 벗어나 뇌가 제기하는 삶에 관한 강렬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주장에 올바른 답을 제시하며 뇌에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소중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뇌는 더 잘 살고자 나름의 노력을 하며 끊임없이 의견을 제시한다. 그 의견은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하다. 게다가 애초에 이러한 뇌의 노력은 의식되지 않는다. 의식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뇌의 조용한 노력과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강렬한 느낌 때문에 마치 우리 의식이 외부의 대단한 존재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뇌 과학을 모르는 다수가 이렇게 영혼, 계시, 진리 등과 같은 환상에 빠져 자신이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다가가지조차 못한다.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일이 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지식을 활용해 머릿속에서 생긴 태풍을 잘 진압하는 일을 반복하고, 차차 태풍이 생기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을 잘 이어나가기 위한 일에는 이러한 수고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뇌의 관점에서 다시, 어떻게 이러한 일이 생겨났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우리가 결핍 혹은 권태로움이라고 해석한 뇌의 주장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 뇌가 자신이 속한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은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온갖 외부 정보를 모아 앞으로 닥칠 위기나 기회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예측은 반복되면서 환경에 맞게 최적화되어 간다. 예를 들어 먹고살만한 환경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식사는 딱히 귀중한 기회가 아니고 배고픔 역시 신경 써야 할 위기가 아니게 된다. 따라서 뇌는 그 두 가지 대상보다는 다른 위기나 기회에 더 신경 쓰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분명 먹고살만해져 생존 확률이 올랐음에도, 그 뇌는 여전히 다른 종류의 위기를 예측하기 때문에 불쾌함이 느껴지거나, 여전히 새로운 기회를 예측하기 때문에 기대감이나 권태로움(적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예측을 만드는 데 있어서 무리의 구성원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동조한다. 사회적인 동물은 거친 환경에 맞서고자 무리를 이루고 산다. 따라서 사회적인 동물은 살아남고자 성공적으로 무리에 속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자신이 속한 무리가 와해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회적인 동물은 더 나은 생존(생존을 위한 예측) 방식을 찾고 그것을 무리의 다른 구성원과 공유하고자 한다. 생존 방식의 공유를 통해 서로가 같은 무리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해당 환경에 맞는 생존 방식을 공유하며 무리 전체의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님, 성공한 이, 지식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위인 혹은 반대로 투자에 실패한 이, 마음에 병을 겪는 이 등 다양한 이들이 우리 삶의 참고 대상이 된다. 모방할 것과 모방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정보가 생성되고 그에 맞춰 위기와 기회의 종류가 수정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현대인이 추구할 기회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성공한 이들이나 깨달음을 얻은 이들처럼 되는 것이며, 반대로 위기란 현대 사회에 흔치 않은 생존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아닌 더 나은 이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뇌는 무리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적인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예측과 학습 그리고 동조가 만들어 놓은 희미한 느낌 위에 적극적으로 수용한 문화나 사상이 더해지며, 결핍과 삶의 의미라는 실체가 만들어진다. 무리 동물은 함께 살아남고자 말없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모방하는데,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더 복잡하게 만들어진 논리나 사상을 공유하기도 한다. 문화나 사상은 다른 종과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같은 종 내의 다른 무리와의 경쟁에 기여한다. 생산성을 높이고 무리 내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문화나 사상은 결과적으로 다른 무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며 해당 무리와 함께 존속한다. 우리 종이 만든 다양한 무리 중에서 가장 초기에 풍요로움을 경험했던 무리 중 하나가 만든, 삶에 관한 관점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극적으로 개선할 무언가가 있고 인간은 그것을 좇아 사는 존재라고 믿는다.
이렇게 생존을 위한 끝없는 예측과 학습은 비록 우리가 살만해졌을지라도 늘 새롭게 우리가 추구할 것을 제시하고, 동조는 우리가 좇을 더 나은 삶의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뇌가 빨아들인 사상은 우리가 애초에 그런 존재라고 못 박아 버린다. 끝없이 느껴지는 부족함과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한 끌림은 그렇게 사상과 만나 인간의 본질에 관한 굳건한 철학이 된다. 그러나 엄연히 이러한 규정에는 비약이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그 결핍을 완벽히 극복할 무언가도 우리가 상상해 낸, 실존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러한 철학에서 벗어나야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실타래를 반대로 풀기만 하면 그 방법이 보인다. 우선 사상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당 사상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동조나 모방이 올바른 대상을 향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반성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측과 학습을 통해 나타나는 주장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과 너무 멀리 떨어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조절하지 않은, 뇌의 활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가 이러한 뇌의 활동에 관여하며, 삶의 관한 생각과 경험을 바꿀 수 있을까? 즉 의식적인 노력으로 의식되지 않는 뇌의 활동에 개입해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예측과 학습 그리고 동조 활동에는 의식적인 개입이 가능하다. 뇌와 의식의 관계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인지행동치료와 같이 의식적인 노력이 장기적인 정신 경험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근거가 있으며, 플라세보 효과와 같이 의식적으로 수용한 사회적인 정보가 뇌의 활성화를 바꿀 수 있다는 근거도 있다. 이전에 다뤘던 의식(메타 인지)이 자신의 수행성과에 관한 내기에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를 참고하면, 의식은 마치 무의식적으로 처리되는 정보가 일정 이상의 중요도 혹은 크기를 가질 때, 그것을 다시 한번 분석해 통계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의식의 역할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의식의 활동은 분명 의식 밖에서 이뤄지는 뇌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예측과 학습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 뇌는 자신의 예측 방식을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춰 최적화하기 위해 자신이 내린 예측과 예측을 활용해 만든 대응 계획을 평가하고 그 내용을 다음 예측 혹은 대응 계획에 반영한다. 예측은 실제 결과와 비교되며 평가받는데, 이 과정에는 예측과 실제 결과의 일치 혹은 불일치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예측과 실제 결과가 일치해 예측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후에는 다음 예측에 반영할, 구체적인 성공 비결을 분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예측의 성공 혹은 실패의 주된 요인으로서 지목되는 것은 주로 자신, 환경 그리고 특정 조건이다. 예를 들어 뇌는 자기 자신의 예측 능력 혹은 예측 밖 변수 대응 능력 때문에 예측과 실제 결과가 일치했다고 평가할 수 있고, 환경에 변수가 너무 적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충분한 노력 혹은 돈의 투자와 같은 특정 조건이 함께 했기 때문에 의도한 결과를 마주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가 반복되며 나 자신, 환경 혹은 특정 조건에 관한 정보가 쌓이고 그들에 관한 취급도 변화하게 된다. 세 가지 요소에 관한 변화된 평가는 다음에 이루어지는 예측에 기본 상수로서 반영되고 결과적으로 편향된 예측 방식이 형성된다. 이는 세 가지 요소에 관한 장기적인 신념이 형성되었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예측 실패의 반복으로 나 자신과 환경 혹은 특정 조건에 관한 부정적인 신념을 형성할 수 있고 그 결과 회의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갖게 될 수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측과 학습이 삶에 관한 관점에 장기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이 모든 일은 보통 우리 의식 밖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할 수는 있다. 즉 과정을 인지하진 못해도 그 결과를 인지할 수 있는데, 예측과 학습의 결과는 신념, 태도 그리고 감정이라는 형태로서 인지될 수 있다. 우리는 경험 상 이를 아는데,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정신 경험이나 경향을 인지할 수 있는 의식의 기능을 메타 인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만연한 감정을 인지하거나, 신념이나 태도를 반성해 볼 수 있다. 또 특정 사건을 겪은 후에 그 영향을 받은 생각이나 감정을 되돌아볼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신념, 태도, 감정 등을 인지하고 이를 통해 거꾸로 우리가 예측 평가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생성했는지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보통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는 예측과 학습의 결과를 의식적으로 포착하고 그 과정을 추측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예측 경향(태도, 신념, 장기적인 감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까? 앞서 다뤘듯, 인지행동치료와 플라세보 효과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결과는 의식적인 노력이 신념이나 태도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미 이루어진 자신, 환경 그리고 특정 요소에 관한 평가 위에 새롭게 각 요소에 관한 의식적인 평가를 더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각 요소에 관한 신념이나 태도 혹은 장기적인(만연한) 감정을 수정할 수도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가 셀리그먼의 낙관주의이다. 셀리그먼의 이론은 무기력의 학습 혹은 그에 대항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고 그 방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태도 혹은 신념 중 하나인 낙관주의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혹은 비관주의라는 태도를 정반대의 낙관주의라는 태도로 수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뤄온 예측과 학습 과정에 관한 가설과 어느 정도 일치하며 그 목적 또한 유사하다. 따라서 셀리그먼의 이론을 예측과 학습 과정에 관여하는 방법으로서 응용해보고자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셀리그먼은 특정 환경에서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에 노출된 개 중 일부가 다른 환경으로 이동해 이제는 노력만 하면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딱히 전기 충격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전기 충격에 노출되는 것을 관찰했다. 셀리그먼은 그렇게 개에 따라서 무기력하게 전기 충격을 받는 현상을 개마다 전기 충격을 예측하는 방식 혹은 전기 충격의 원인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셀리그먼은 무기력한 일부 개가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었던 이전의 경험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기력해진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무기력한 순응이 구체적으로 세 가지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석했다. 첫 번째는 부정적인 경험이 일어난 원인 중 일부를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인간에게 미움받아서’ 혹은 ‘자신의 발바닥이 손상이 가서’와 같이 전기 충격이 느껴지는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근본적인 원인인 자신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전기 충격이 나타나는 현상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부정적인 경험 혹은 그것이 일어난 원인(그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이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고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앞선 예시에서 이어서 예를 들자면 자신의 발바닥 손상이 영구적이라고 믿는다면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전기 충격과 그로부터 오는 아픔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경험 혹은 그것이 일어난 원인이 전혀 다른 경험에도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부정적인 경험, 결과 자체를 학습해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도 부정적인 결과나 경험을 예측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혹은 어떤 환경이든 모두 의도와 같이 흐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거나 자기 자신에 관한 비관적인 믿음을 가져 전체적으로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이와 세 가지 믿음을 일종의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보았고 비합리적인 신념을 수정하는 방법 중 하나인 인지행동치료를 통해서 해당 믿음을 수정해 결과적으로 학습된 무기력 혹은 비관주의 설명양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결과를 남겼다. 그 방법을 아주 간략히 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자기 자신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 추적해야 한다. 보통 신념이 형성되고 해당 신념이 예측 방식 혹은 원인 해석 방식에 관여하는 일 모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선 자신이 겪은 특정한 사건을 지정하고 해당 사건을 자신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돌아보며 자신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인 믿음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렇게 인지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비관적인 신념을 반박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결과의 원인을 자신으로 두고 그것이 지속될 것이라 여기며 다른 일에도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준 부정적인 영향을 따져가며 해당 믿음에 반박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식으로(반대로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 따져보며 비관적인 믿음에 반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며 낙관적인 믿음을 형성하는 정보를 쌓아 그렇게 쌓인 정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그것에 관한 비관적인 해석이 쌓아놓은 정보의 영향력을 극복할 만큼이 된다면, 비관적인 믿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깊은 경계로 나눠져 있다고 믿는다면 두 차원을 넘나드는, 이러한 인지행동치료 방식이 쉽사리 납득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차원을 깊게 나누는 옛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계속해서 다뤄온 뇌의 작동 방식과 의식(메타인지)의 역할의 관해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셀리그먼의 주장을 납득할 수 있다. 세포가 그러하고 개미나 벌과 같은 동물이 그러하듯 뇌를 이루는 뇌 세포 역시 그들의 정체성을 하나의 세포가 아닌 뭉치나 집단으로 본다. 그 결과 (비록 다른 일을 하더라도) 똑같은 ‘나’끼리의 대화는 근거를 포함한 많은 것이 생략되어 주장만이 넘쳐난다. 외부인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은 대충 토론하고 대충 동조하며 대충 집행한다.
그러나 매번 모든 일이 이렇게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매번 엉성하더라도 나름의 저울질이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팽팽한 토론(많은 정보)이 오고 가는 일종의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특정 정신 기능이 개입해 그들을 중재하기도 한다. 그 정신 기능은 의사결정을 앞두고 팽팽히 맞서는 여러 주장을 인지하고 쌓인 외부 정보를 검토하며 각 주장의 타당성을 저울질한다. 단순히 토론하고 협력해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을 하는 다른 장기와 달리 뇌는 이와 같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인지’까지 할 수 있다. 앞서 다뤘지만 이 특이한 기능을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메타 인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정신 기능 덕분에 우리는 드물게 관성을 벗어나 오래 고민하고 의외의 의사결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히 이 기능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해당 기능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불친절한 주장뿐이고 그것을 납득하고자 응용할 수 있는 정보 또한 특정한 형태로 압축된 기억이나 현재 감각기관을 통해 접근 가능한 외부 정보이다. 따라서 가끔 접근 가능한 정보를 엉성하게 끼워 맞춘 엉성한 논리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뇌가 이와 같은 의사결정 방식을 갖고 정신 활동을 이어나간다면, 의식적인 활동은 충분히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의사결정 관성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가설을 통해 인지행동치료의 과정을 납득했다고 해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애초에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회의적인 태도와 무기력함이 꼭 나쁜 것일까? 생물 대부분의 행동과 정신 활동이 결국 생존을 지향한다고 믿는 공부하는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뇌의 판단을 나쁘거나 좋다고 정의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다. 즉 어느 쪽도 나름 주관적으로 판단한 환경에 알맞게 대응하고자 형성된 신념이자 태도이기에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낙관 혹은 비관은 환경에 관한 주관적인 판단을 통해 형성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더 나아가 해당 태도는 학습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한 태도이자 신념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가치관과 환경에 관한 견해를 더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낙관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의식적인 신념이 아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서 접근해 보자.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타고난 기질 위에 예측과 대응 그리고 결과에 관한 해석을 반복하며 쌓인 자신과 환경에 관한 정보를 토대로 형성한 편향적인 예측, 대응 방식이자 장기적인 신념, 태도이다. 즉 낙관주의 혹은 비관주의 모두 특정 환경에서는 적응적이다. 예를 들어 보상에 치중된 예측 방식의 결과인 낙관주의는 위험보다는 보상이 많은 환경에서의 생존에 적합한 태도이며, 반대로 위험에 치중된 예측 방식의 결과인 비관주의는 보상보다는 위험이 많은 환경에서의 생존에 적합한 태도이다. 따라서 두 가지 태도를 놓고 둘 중 하나 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말 끔찍한 환경에 처해있다면 확실한 기회를 기다리며 가늘고 길게 생명을 유지하는 비관주의가 더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과 우리가 가진 목표에 더 적합한 태도를 고민해 볼 수는 있다. 지금의 환경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풍요롭고 환경의 변화가 잦다. 이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생존을 넘어 번영(웰빙)을 삶의 목표로서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변화가 잦은 환경에서 다수가 동의하는 번영의 기준 역시 계속해서 변하게 되고 결국 사람들은 다양한 삶의 가치관을 갖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갖게 된다. 너무 대단한 것을 누리는 극단치에 있는 사람을 포함해 참고할만한 번영의 기준에 관한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현대인은 자기만의 번영을 정의하고 그것을 좇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일 중 하나는 타인이 제시하는 몇몇 기준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환경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많은 일을 시도하는 것에 더 적합한 태도인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셀리그먼이 학습된 무기력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설명양식으로서의 낙관주의를 제시했듯, 낙관주의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학습된 무기력 즉 좌절을 극복하는 것이다. 즉 실패에 굴하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시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태도이다. 따라서 삶의 방식 혹은 삶의 목표를 능동적으로 찾아야만 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낙관주의가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비관주의가 현대 환경에서 어떠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학습된 무기력과 관련이 있어서 비관주의 끝이 마치 무기력함이나 우울함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에 치중된 예측 방식이 오직 한 가지의 태도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위험에 편향된 예측 경향과 만연한 긴장감, 불안함은 위험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즉 누군가는 위험을 주로 예측한 끝에 비관주의가 되어 주변의 위험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이러한 동기와 목표는 현대 사회를 잘 살아나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와 별개로 그것이 주는 정신적인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비관주의를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비관주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편향된 인지와 편향된 경험을 선사한 다는 것을 모르고 비관주의가 궁극적으로 유쾌한 경험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비관주의자 중 일부는 자신이 예측한 모든 위험을 제거하게 된다면, 비로소 삶에 안정과 행복함이 만연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틀린 내용에 가깝다.
어찌 보면 많은 현대인이 위험에 관한 정보에 집중하며, 비관주의자를 합리화하기 위한 잘못된 신념을 만들게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현대 환경은 사람들이 위험 제거에 집중하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준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개개인에게 이전과 차원이 다른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 삶을 극적으로 바꿀 끔찍한 위험에 관한 정보 역시 넘쳐난다. 넘쳐나는 위험에 관한 뉴스는 위험에 관한 정보와 사회적인 정보 모두를 민감하게 처리하는 뇌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이미 그러한 영향이 가용성 휴리스틱, 부정성 편향, 손실 집중 편향 등으로 학술적으로 정의되며 연구되는 만큼, 우리가 그 영향으로 쉽게 위험 편향 예측을 갖게 될 것이란 추측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보통 위험을 제거하는 일은 보상을 발굴하는 일보다는 어렵지 않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새로운 보상을 발굴하고 그 보상을 얻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는 일에 비해서, 이미 목표가 정해진 상황에서 그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제거하는 일이 더 쉽다. 두 가지 일의 난이도를 나누는 요소 중 하나는 각 일이 고려해야 하는 변수의 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가 상대적으로 변수가 더 적고 이 때문에 후자의 경우가 구체적인 노하우를 남기기 용이하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업무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교육받는 내용에 흔히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리스크 관리는 현대인이 업무 현장에서 혹은 개인 자산 투자 현장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노하우 중 하나이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가 보상보다 위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갖게 된 위험 제거라는 삶의 목표는 보통 그 기대만큼의 보상을 주지 못한다. 위험에만 집중하는 태도 자체가 예측, 인지, 경험에 관한 편향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처리하는 것에 치중된 태도를 그 결과가 결국 행복일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의식적으로 합리화하며 더 강화하게 된다면, 뇌의 주관적인 미래 예측 경향은 보상보다 위험을 더 예측하도록 편향될 것이다. 그 결과 위험에 관한 단서를 더 잘 포착하게 될 것이며, 위험 경고 신호와 동반하는 불쾌함의 빈도 역시 올라가게 될 것이다. 결국 보상 발굴이 아닌 위험 제거에 치중된 생각과 행동을 반복한 이는 대부분의 위험을 제거하게 되더라도 그 머릿속에서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을 위험을 계속해서 예측할 것이기 때문에 행복과 평안함이 아닌, 불안함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관주의가 무기력함이 아닌 불안이나 긴장감과 같은 위험 제거를 향한 적극적인 동기로 이어진다면 현대 사회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번영이라는 목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현대인에게는 그 일을 계속할 동기이자 번영의 증거가 될 유쾌함, 만족감이 필요하다. 필요한 정신 경험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예측하는 일의 빈도가 높은 비관주의보다는 보상을 예측하는 일의 빈도가 높은 낙관주의가 더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뇌에 관한 내용을 활용해 삶을 긍정하고 뇌가 주는 여러 삶의 부정적인 정보 역시 극복할 대상으로 보는 입장에선 당연히 낙관주의가 더 낫다. 감정이 곧 뇌가 예측 내용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결국 비관주의는 위험에 편향된 예측을 하는 태도로서 ‘안 될 거야.’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보상에 편향된 예측을 하는 태도로서 낙관주의는 ‘잘 될 거야.’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태도와 상관없이 정신 경험이나 행동이 달라지긴 하겠으나, 당연히 보통은 비관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보단 낙관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삶을 결핍으로 보는 일에서 벗어나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예측 편향 형성에 개입할 방법이 있다. 셀리그먼이 제안한 방식처럼, 이미 예측과 그 예측에 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의식적으로 꺼내와 반성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예측 방식을 어느 정도 의도한 방향으로 편향시킬 수 있다. 그 방향으로는 비관주의보단 낙관주의가 나을 것이다. 물론 셀리그먼의 설명양식과 우리가 다루는 예측 편향이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둘 모두 위험과 보상 둘 중 하나를 편향되게 예측하는 생존 전략으로 접근한다면 유사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웃을 모방하며 생존(단기적인 생존)을 추구하지 않고 번영(장기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결핍에서 벗어나 삶을 바라보기 위해 낙관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위험을 외면하라는 얘기가 아니며, 보상을 무조건 추구하라는 얘기 또한 아니다. 두 대상을 향한 올바른 대응 방식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두 번째로 추구할 위험과 보상의 기준을 흔들어 놓는 동조 역시 어느 정도 개입할 방법이 있다. 뇌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뇌를 모방한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가 평생 감정의 공감과 사상의 공유를 강요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처럼 다가오지만, 사실 뇌의 동조에는 조건이 있다. 뇌는 보통 내집단(나와 같은 무리)이라고 판단한 타인만 동조한다. 동조를 포함하는 무리 동물의 사회적인 활동 대부분은 자신이 속한 무리와의 상호작용을 목표로 하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자신의 생존이다. 자신의 생존과 상관이 없는 외집단은 동조의 대상이 아니며 보통 외집단은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계하고 적대시할 대상이기에 내집단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뇌 활성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나 모든 타인에게 동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경계는 유동적이다. 한 개체가 여러 무리에 속해 있을 수도 있으며, 무리 내부의 구성원의 유출과 유입이 생길 수도 있다. 또 한 거대한 무리 안에 작은 무리가 여러 개 형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생활 방식을 봤을 때에도 이러한 일이 흔한데, 따라서 그 경계를 유연하게 가져가는 개체가 현대까지 살아남았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경계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조절 가능하다. 예측 편향을 조절했듯, 정보를 쌓아 자신이 동조할 대상 역시 조절할 수가 있다.
특히 자신의 삶에 관한 고민을 할 때에는 가끔, 근거 없는 주장 모두를 외집단의 주장으로 여겨야 할 필요도 있다. 다행히 몇몇 연구 결과는 이러한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얘기해 준다. 게임 이론의 연구를 응용해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의사결정을 나누는 조건을 알아내보고자 한 연구에 의하면, 자기 자신에 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길게 갖는 것이 이기적인 의사결정을 하는데 기여한다. 이는 자신에 관해 의식적으로 길게 고민해 보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된 동조를 진정시키고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특수한 내집단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기여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나 자신 삶에 관해서만 생각하거나, 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형성한 내집단의 기준을 더 엄격하게 좁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좇았던 위험과 보상을 재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재생산한 사상 역시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지금까지와 같이 기존의 사상에 관한 믿음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그 논리를 재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상과 그 사상이 깊숙이 침투해 남긴 흔적을 지울 수 있다. 또 깊숙이 침투한, 삶의 결핍을 유도하는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논리를 대체할 새로운 논리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만드는 것도 효과적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고민하며 새로운 논리를 더 깊이 검토하다 보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전 사상의 흔적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더 적합한 단기 목표와 계획에 관해 제안하고자 한다. 이전의 사상은 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신 활동을 오해하며 결과적으로 삶의 결핍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결핍을 극복할 대단한 무언가를 좇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이에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의 방식과 달리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의 관한 논리와 방식을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평생토록 이어지는 끌림이나 불쾌함이 근원적인 결핍을 해소시켜 줄 절대적인 답에 관한 이정표라는 옛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뇌는 그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며 계속해서 살아남고자 끌림이나 불쾌함을 동반하는 활동을 이어나갔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결핍이나 그것을 채워줄 대단한 무언가를 가정하지 않고 뇌의 다양한 활동을 보조하거나 혹은 조절하며 뇌를 포함해 우리를 이루는 다양한 세포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동참하기로 했다.
더 이상 결핍을 가정하지 않고 그것을 해소할 대단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뇌의 특정 활동 그리고 그것과 함께 인지되는 여러 종류의 동기가 무의식적인 예측이나 동조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뇌라는 신경 다발이 수용하는 정보가 변하면서 계속해서 새롭게 예측과 동기가 생성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매번 그 동기에 잘 대처해야지만 삶에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과 보상에 관한 태도나 신념을 의도한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번 새롭게 나타나는 뇌의 요청에 매번 알맞게 대응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단 매번 새롭게 단기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만들어 대처하는 것이 더 알맞다. 물론 대부분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 수도 있고 소중한 삶을 최선을 다해 이어간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매번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고 그에 알맞은 대처를 하고자 노력해야, 뇌의 활동을 올바르게 이해한 대처방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전처럼 무언가 대단한 것이 뇌의 활성화를 한 번에 통제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전의 사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잘못된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삶의 의미에 관한 잘못된 접근 방식을 부정하고 삶에 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에 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다뤄봤다. 의식(메타인지)으로서 다른 뇌 활동과 함께 공존하며 삶을 꾸려가는 일은 쉽지 않다. 강렬한 정신 경험을 전조도 없이 주는 뇌 때문에 뇌에 관해 연구할 수 없었던 옛사람들은 뇌에서 오는 신호를 오해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는 뇌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강렬한 정신 경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뇌는 나름대로 잘 살아보고자 예측하고 학습하며 타인을 참고하고 사회적인 정보를 흡수했다. 그 결과가 가끔 강렬한 정신 경험 혹은 동기로서 인지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함으로써 나타나는 강렬한 정신 경험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눈앞에 나타난 강렬한 경험에 끌려다니지 않고 더 멀리에 있는, 뇌의 궁극적인 목표에 동참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예측이나 동조에 시작부터 관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특정한 편향을 만드는 것을 막고 반대로 의도한 방향으로 예측이나 동조 편향을 만들 수 있다. 때마다 뇌의 활동이 남긴 감정, 태도, 신념 등을 검토하고 그것을 의도한 방향으로 편향시키려는 일을 단기 목표로 두고 반복한다면, 삶이 더 살만하다고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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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orillo, C. D. (2013). Two dimensions of value: dopamine neurons represent reward but not aversiveness. Science, 341(6145), 546-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