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를 포함하는 다양한 생물은 자기 자신을 규정짓는 테두리를 그어 놓고 그렇게 정의한 자기 자신을 존속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 자체는 매우 다양하다. 각자 주어진 것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명체마다 ‘자신’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래서 생명체라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공통 목표로 묶어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음에도 정작 각 생명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은 모두 다르다.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마치 생명체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특히 직선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는 일로부터 아주 크게 벗어나 있다. 우리는 개체와 무리의 존속을 지향하는 뇌와 문화의 영향으로 무리 공통의 목표를 추구한다. 개체의 이기적인 생존이라는 소박한 목표랑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삶의 의미, 목표, 진리, 업보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단한 가치를 추구한다. 게다가 높아지는 생산성 때문에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게 된 현대인은 더더욱 지금 당장의 생존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처럼 사회적인 변수를 고려하면서 더 장기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지금 당장의 생존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야생의 동물과 마치 완전히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다를 뿐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추구한다. 다만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의 생존에는 아군의 생존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방식이 조금 복잡해졌을 뿐이다. 또 지금 당장 생존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기에 더 먼 미래까지 잘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다. 결국 우리가 인간이 추구할 바라고 여기는 삶의 의미라는 것도 다른 생명체가 추구하는 생존이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털 없는 원숭이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일과 털 있는 원숭이가 내일의 먹거리를 고민하는 일 그리고 점액 곰팡이가 어디로 뻗어갈지 고민하는 일이 결국엔 모두 유사한 일이라는 주장은 그 모든 일이 결국 생존을 향한 미래 예측과 의사결정 과정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우리는 과거부터 자신이 쌓아놓은 삶을 평가하는 먼 미래의 자신의 시점을 상상하며 지금부터 추구하기에 가장 알맞은 목표 혹은 의미를 고민한다. 이와 같이 미래의 시점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능력에는 가끔 그렇게 상상한 미래를 향해 기꺼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정신 활동인, 그 미래가 실제로 실현될 것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강력한 확신이 따라붙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미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며, 따라서 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매우 대단한, 고등적인 능력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의 근거가 되는 미래 예측에 관한 강한 확신은 오직 지금까지 뇌가 모아놓은 정보를 근거로 삼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부실한 편이다. 또 우리 생각과 달리 미래 예측은 우리만이 갖고 있는 고등 인지 기능이 아니다. 원시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일에도 우리가 고등 인지 기능이라고 여겼던 미래 예측과 의사결정 과정이 포함된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다. 우리는 하등 한 동물들이 모두,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없어 먼저 대비하지 못하고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대응만 하는 존재라고 여기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동물이 포식자에 관한 여러 단서를 놓치고 눈앞에 직접 포식자가 나타나고 나서야 상황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즉 쉬운 단서로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 예측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애초에 대부분 동물이 단서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더 나아가 눈앞에 포식자를 목격하고 하는 대응 역시 미래 예측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포식자를 마주하자마자 빠르게 움직였다는 것은 포식자에 관한 시각정보가 뇌에 들어오자마자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미래가 예측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예측에 관한 여러 대응 옵션 중에서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예측하고 그 예측에 대응하는 일은 모든 생명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살고자 하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 단순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래 예측 기능의 일부가 의식되기 때문에 이 기능이 지성, 이성, 정신, 의식, 마음, 영혼 등으로 불리는 것에 종속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억과 감각 정보를 단서 삼아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가끔 아주 천천히 의식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더 먼 미래의 목표, 더 중요한 목표를 고민해 볼 때 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그린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정보가 의식되고 의식되지 않는지, 그 기준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미래 예측이 의식 혹은 마음이나 영혼의 고유 기능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러나 뇌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미래 예측 대부분은 의식되지 않는데, 예를 들어 감정이 인지되기 전 이뤄지는 빠른 미래 예측은 의식되지 않으며, 단순한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미래 예측(움직임 시뮬레이션)은 잘 의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생생한 미래 예측이 가능한 것은 애초에 그렇게 많은 정보를 긴 시간 들여서 가공하는 일이 주로 의식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즉 장기적인 목표나 계획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의식적인 미래 예측의 전말은 보통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미래 예측을 진행하는 뇌에서 이례적으로 천천히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평소와 달리 그 정보처리 과정에 의사결정자 한 명(의식)이 더 추가되어 생긴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 예측은 딱히 지성, 마음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의 고유 기능이 아니다.
게다가 마음과 미래 예측을 묶는 일에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일이 더해지며 우리는 미래 예측을 인간만이 가능한, 더 대단한 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내집단이 아닌 존재를 내집단의 정반대에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외집단의 존재를 ‘나 자신’ 혹은 ‘나와 같은 아군,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라보는데, 이때 주로 나 자신 혹은 내집단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마음 혹은 영혼의 유무이다. 즉 우리는 우리 외집단이자 적을 인간이 아닌 존재, 마음 혹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정의하곤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외집단이 마음의 기능을 갖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데, 예를 들어 경험을 음미하며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한편 적을 마음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일은 우리가 그 적을 무자비하게 여기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내집단과는 자원을 공유해야 생존 확률이 오르지만 외집단과는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친 환경에서 이러한 무자비함은 자주 생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적을 마음과 마음의 기능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일은 생존에 기여하며 그 경향이 우리에게 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하자면 이처럼 우리는 어떤 정보가 의식되는지 몰랐고, 우리가 적과 아군을 어떻게 나누거나 어떻게 대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미래 예측이 인간 고유의 기능이란 오해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오해했을 뿐, 생물의 행동 대부분은 미래에 관한 예측과 해당 예측에 대응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을 존속하기 위함이다. 삶의 지향점을 찾기 위해 삶의 의미 혹은 목표를 고민하는 일 또한 같은 구조를 띤다. 그 지향점이란 곧 미래까지 만족스럽게 존속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미래 예측 기능이 보통 생존을 지향한다는 것을 근거로 미래 예측 기능이 사용되는 삶의 의미 탐색 과정 역시 결국 생존을 지향한다는 주장은 약간 비약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약을 해결하고 미래 예측 기능과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미래를 예측하고 그 정보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미래 예측은 삶에 관한 고민의 동기를 만든다. 또 고민의 결론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관여한다. 우선 미래 예측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삶의 의미에 관한 동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각이나 행동의 동기에 관여한다. 생존을 위해 이뤄지는 미래 예측은 당장 해야 할 것에 관한 정보를 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정보는 그 행동을 하기 위한 다양한 준비를 불러일으킨다. 신경전달물질이 나오고 운동명령이 만들어지며, 그러한 정보는 뇌에서 시작해 척수를 타고 퍼진다. 그 영향으로 신체와 뇌의 상태는 예측한 미래와 그에 관한 대응 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상태로 변하게 된다. 꼭 그러한 대응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되고 신체는 에너지 소모를 위한 준비 상태에 돌입한다. 의식이 이러한 준비 상태의 영향을 인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동기가 생겼거나 강한 감정이 느껴진다거나, 긴장했거나 흥분했다고 표현한다. 즉 우리가 행동이 이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동기나 감정은 모두 이러한 미래 예측과 대응 준비 과정의 결과 중 하나이다.
뇌와 신체에서 생긴 준비 상태를 향한 변화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원리로 동기, 감정, 각성 상태라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된다. 예측을 통해 만들어진 대응방안을 꼭 따라야만 한다는 신호는 목표를 향한 어떤 정신적인 힘과 같이 느껴지는데 우리는 이를 동기라고 부른다. 또 대응할 미래(혹은 대응 방안의 내용)에 따라서 동기는 불쾌하거나 유쾌한 느낌을 동반하는데, 우리는 이를 불안 혹은 행복(에 관한 기대)으로 인지한다. 즉 불안은 예측한 위험 회피를 목적으로 하는 불쾌함을 원동력으로 하는 동기이며, 행복은 예측한 보상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유쾌함을 원동력으로 하는 동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인지하면서, 에너지 소모를 위한 각성 상태에 돌입한 신체의 변화를 인지할 때, 긴장했다거나 흥분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의식이 인지하고 이름을 붙인, 출처 모를 강력한 지향점은 사실 모두 뇌 안에서 이뤄진 미래 예측과 대응 과정의 결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설탕과 지방 덩어리를 입에 넣는 일부터,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땅히 좇아야 할 의미를 찾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지는 일까지 모두, 이러한 준비 상태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동기, 감정, 각성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 역시 미래 예측과 함께하는 동기의 영향을 받았기에 궁극적으로는 자기 존속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동기는 단순히 행동하기 위한 정신적인 힘이 아니라 그것이 목표로 하는 바를 향하라는 신호 그리고 그래야만 잘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목표로 하는 것을 살펴보게 되면, 동기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삶의 의미라는 목표의 후보로 여겨지는 다양한 가치 혹은 의미를 살펴보면, 그들이 결국에는 자기 존속을 위한 위험 회피 혹은 보상 추구를 향한 동기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공, 평균적인 삶(사회적인 정보에 충실한 삶), 행복, 진리, 믿음 등등 삶의 의미라는 것은 모두 그것을 추구했을 때의 정신적인(주관적인) 만족(혹은 불쾌 해소)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결국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위험을 회피(불안 회피, 평안함 추구)하거나 보상을 추구(결핍감 회피, 행복 추구) 하기 위한 수단이다.
의식의 오해와 문화적인 영향이 겹쳐 가치는 신체의 삶을 넘어 영혼을 충족시키거나 영혼의 세상의 업을 쌓는 무언가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사실 가치는 자기 자신의 삶이 성공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신호를 목적으로 하는, 뇌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자기 존속에 필요할 것이라고 여기는 무언가다. 실제로 모든 가치가 삶을 더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성공을 추구하며 어느 정도 돈을 모으거나 우월함을 인정받으면 더 오래 잘 살 수 있고, 주류(평균)의 삶을 추구하며 구성원과 같은 삶을 살고 같은 가치를 추구하면 무리에서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다. 또 사랑은 후대를 남기거나 강력한 아군을 만들어 또 다른 방식으로 존속할 수 있고, 행복이나 불안은 보다 직접적으로 뇌의 생존 신호와 연관이 있다. 깨달음은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통제해 낼 수 있다는 감각 즉 통제감과 연관이 있어서 생존에 관한 주관적인 확신과 관련이 있고, 또 주변 구성원에게 우월함을 인정받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깨달음을 공유하는 일은 아군을 만드는 일이며, 구체적인 사상에 깊게 빠지는 일은 그 끝에 나타날 강력한 생존 보상을 꿈꾸며 생존에 관한 자기 확신을 한층 더 견고히 하는 일이다. 한편 그렇기에 더욱 무엇 하나에만 깊게 매달리는 일이 답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동기는 매번 환경의 변화에 따른 완전히 새로운 미래 예측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그 개체의 수명동안 일정 반경 내에서 어느 정도 정해진 변수와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산다. 이때 생활 반경 속 여러 변수와의 상호작용 하며 자신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변수에 비해 더 먼저 상황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환경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예측 방식을 최적화시켜 놓는 일이 더 잘 존속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생명체는 학습 작용을 하며 예측을 최적화시키는 일을 해내고 있기에, 반대로 그렇지 못한 생명체는 상호작용에서 약자에 위치에 놓이며 존속해내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예측 방식은 환경 학습을 통해 편향되기에 동기 역시 편향되고 동기가 지향하는 목표 역시 편향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인구와 그에 따른 다양성이 존재함에도 대부분의 삶의 의미 후보가 비슷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미래 예측은 학습 과정을 통해 편향되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하는 동기로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의 답으로 여겨지는 것을 연상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다.
왜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삶의 의미 혹은 이유를 찾게 된다. 가장 좋은 삶의 방식 중 하나는 곧 그 삶의 주인의 존재 의의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미 찾다 보면, 삶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그러한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정하는 이가 부모님이든 신이든 물리 규칙이든 자연이든 진리든 어쨌든 삶의 이유나 의미는 '나'의 탄생 전에 정해지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착시를 만들어내는 뇌나,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온갖 사상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새로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상상에 속도를 불어넣는다. 아쉽게도 이러한 상상 끝에 보통은 그 의미의 존재에 관한 구체적인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대신 느슨하게라도 결론을 내리는데, 그 결론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란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존을 뛰어넘는 가치를 인지하고 좇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이 현실을 뛰어넘는 세계를 감지하고 분석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름에도 분명 초월적인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내리는 결론을 속물적이기 짝이 없다. 삶의 의미의 후보자들은 대부분, 실제 삶에서의 만족감이나 평안함을 목표로 하며, 단지 그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처음 삶에 관한 고민을 시작하는 시점과 삶의 의미에 관한 나름(속물적인)의 답을 내리는 시점에서의 뇌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모순의 이유가 보인다. 뇌(혹은 그 일부)는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아도 늘 우리가 존속해 내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그 경우의 수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한다. 그 영향으로 가끔 우리는 강력한 동기와 감정에 휩싸이며, 의식적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를 검토하게 된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지?' 란 질문을 하게 되고 이윽고 '왜 사는 것일까?' 란 질문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사실 존재가 의미를 좇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뇌의 영향으로 의식적으로 삶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답 또한 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러한 믿음의 근거가 되는 강력한 확신은 뇌의 편향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선 우리가 답을 만들고자 접근하는 자료가 편향되어 있다. 의미를 찾기 위해 접근하는 정보에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그 경험에 관한 사회적인 피드백 그리고 개인적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주관적인 피드백과 해석은 경험을 편향시키며 때문에 우리가 의사결정을 위해 접근하는 정보는 이미 어느 정도 편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뇌는 이미 어느 정도 답을 갖고 있다. 뇌는 더 나은 경우의 수를 만들기 위해 이전 경험의 분석하고 학습한다. 그 과정을 통해 이미 무의식적인 기호, 즉 편향이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적인 의미 탐색은 이 편향에서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의사결정의 근거가 되는 강렬한 확신이란, 우리의 합리성에 관한 자기 감탄이 아니라 단지 편향된 기호에 관한 강렬한 의사 표현이었을 뿐이다. 치열한 계산 끝에 강렬한 확신을 경험하며 의사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대단한 지성, 합리성에 감탄하는 장면을 제대로 바라보면 사실 개인적인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편향을 그대로 따라 걷는 뇌만이 있을 뿐이다. 즉 진실은 다음과 같다. 상상 속 합리적인 이성은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뇌가 가진 편향의 영향 아래에 있고, 따라서 현실을 뛰어넘은 세계의 존재는 통찰로 꿰뚫어 본 숨겨진 진실이 아닌 단순한 상상이었으며, 삶의 의미나 이유를 좇는다고 했지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뇌의 신호를 따라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좇았을 뿐이다. 결국 의미를 좇는다며 복잡한 고민 속에 빠지곤 했던 우리는 사실 쭉 살아가기 위해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답에 가까운 방법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굳이 의미나 이유를 찾았던 것은 그것을 참고 삼아 방법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정보를 통해 경험의 차등을 기대하고 또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편향 또한 주관적인 경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상상하거나 경험한 이러한 차이는 더 우월한 답이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의 근거가 되지만, 차이는 주관적인 기준으로 형성된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기에 딱히 절대적인 답이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각자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자기 자신을 존속시키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방법이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보긴 어렵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울타리에 가족까지 포함시킨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존속 방법이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존속하는 방법일 것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울타리를 개체로 둔 사람은 앞선 이에 비해서는 이기적인 방법이 존속에 더 적합한 방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존속시키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고의 답이 없을 뿐, 꼭 해야 하는 일은 존재한다. 존속 자체를 해내기 위해서는 보상과 위험 그리고 그것에 관한 신호를 꼭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던 존속을 위해서 위험과 보상을 추구하는 일은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정의에 따라 위험과 보상의 정의 또한 어느 정도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보상을 좇고 위험을 피하는 일은 해야 한다. 물론 보상을 좇거나 위험을 피하는 일은 굳이 매번 의식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보통 뇌가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여러 변수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위험과 보상에 관한 의견이 우리가 처한 환경에 맞지 않은 경우가 생긴다. 그 결과 해당 의견이 오히려 우리의 존속을 방해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근본적인 삶의 결핍이 해소된다는 사상(사회적인 정보)과 삶의 의미를 찾은 것만 같은 너무나 대단한 사람들에 관한 정보 그리고 그 사람들을 좇으며 생긴 여러 실패 경험은 결과적으로 비관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로 이어진다. 각 태도는 다시 실패, 위험에 관한 과하게 편향된 정보와 삶의 결핍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재생산하며, 우리가 존속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그 결과 우리는 존속을 위한 활동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보상과 위험에 관한 신호는 실제와는 다른, 환경과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를 만들어서 환경에 알맞지 않아 존속을 방해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뇌와 우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고 위험 신호와 보상 신호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먼저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굳건한 오해를 깼다. 우리는 뇌의 여러 기능을 의식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영혼, 합리성, 절대적인 답이 존재한다는 오해를 만들었다. 이러한 오해는 인간이 자신의 영혼의 결핍을 채울 의미를 좇고자 사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론은 사회적인 동물 사이에서 공유되며 사상으로 변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일에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근거가 되는 것이 모두 오해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했고 결국 그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제대로 된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방식을 찾고자 다시 뇌와 그 기능을 살펴본 결과 해당 기능은 대부분 자기 존속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이 오해와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졌듯, 때로는 자기 존속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곧 자기 존속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 목표를 위해 가끔 오류가 나는 미래 예측 기능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이야기는 그 신호를 잘 조절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위험 신호, 보상 신호 그리고 각 신호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지에 관해 이야기해 볼 것이다. 의식이 메타인지라는 기능으로서 정보를 종합해 학습과 편향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미래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자신의 의견이 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라면, 지금 글을 쓰고 읽는 우리 의식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위험과 보상에 관한 학습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편향되는 것을 막고, 존속에 관한 의식적인 답이라는 의도한 방향으로 편향시키는 것이다. 이때 의식적인 답과 ‘잘 살고 있다.’는 유쾌한 감각이 자주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학습을 통해 편향이 의도한 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목표로 보다 나은 답을 만들기 위해 뇌와 환경에 관해 공부하고 매번 나타나는 반응의 최선의 답을 내고자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다음은 위험 신호와 보상 신호를 조절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다뤄 볼 것이다.
참고 문헌
Murugan, N. J., Kaltman, D. H., Jin, P. H., Chien, M., Martinez, R., Nguyen, C. Q.,... & Levin, M. (2021). Mechanosensation mediates long‐range spatial decision‐making in an aneural organism. Advanced materials, 33(34), 2008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