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와 불안의 정체를 안 우리가 지향할 삶의 목표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가?”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점에 따라서 나름 이 문제를 풀만한 빈틈이 보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돼지의 입장이 되어 보면, 내세를 꿈꾸며 영혼의 끌림을 좇던 일은 배부른 존재나 할 수 있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생존은 공짜가 아니다. 돼지는 지금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충실했기에 배부름을 추구할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철학적인 입장이 아니라 과학이라면, 삶 넘어 무언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본다면, 삶에 관한 의문이 약간은 풀린다. 일단 살아야 하니, 사는 것에 관한 고민이 목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재밌게도 생존을 잊고 목표나 가치를 꿈꾸던, 이전의 소크라테스들 중 대부분도 결국에는 살기 위한 목표를 추구했다. 그들이 좇는 재화, 명성, 사랑, 깨달음 등 다양한 목표는 결국 기분 좋음 혹은 평안함을 단서 삼아 설정한 목표로, 더 큰 기분 좋음과 평안함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이 기분 좋음과 평안함이란, 뇌에서 판단하기에 뇌를 포함한 전체 세포 뭉치, ‘나’가 생존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생산하는 신호의 일종이다. 즉 우리는 결국 돌고 돌아서 살기 위한 목표를 좇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좇고 있던 목표 대부분은 결국 ‘나’의 생존과 관련이 있다. 우리 대부분이 추구하게 되는 목표라는 것은 결국 뇌의 일부에서 생산하고 또 다른 뇌의 일부에서 인지하는, 생존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짐을 알리는 신호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다. 그렇다면, 그 신호라는 것은 어떠한 변수에 영향을 받아 생겨나는 것일까? 생존에 관한 판단은 뇌가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생존에 관한 정보와 그에 맞춰 사고하거나 행동하라는 명령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고 해당 사건이 생존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측은 타고난 기질과 지금까지의 쌓인 경험(경험을 하며 다음 예측에 반영하기 위해 쌓은 정보)에 영향을 받아서 일정한 관성을 갖게 된다.
우리가 목표를 구상하고 좇는 모습 이면에는 뇌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생존에 이득이 될 만한 미래 경우의 수를 예측하는 모습이 있었다. 기질과 경험에 영향을 받아 일정한 방식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뇌는 생존에 이득이 되는 경우의 수를 도출해 내며 그 경우의 수가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신호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아주 단순화시켜서 표현하자면 목표라는 것은 생존에 이득이 되면서도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 신호에 영향을 받은 우리 의식은 무엇을 좇아야 할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좇았을 때 긍정적인 미래가 그려질 것이라는 감각, 그리고 그 미래가 꼭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된다. 즉 삶의 이정표와 그것을 좇을 동기를 갖게 된다. 정리하자면, 편향된 미래 예측 기능은 생존에 이득이 되는 경우와 실현 가능성을 계산하며, 살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주장한다. 그 주장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이정표와 그 이정표를 따라 걸을 동기가 생기며, 우리 의식은 이를 목표를 갖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쉽게 말해, 뇌의 일부가 이런 말을 하면서 생기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이렇게 하면, 나(우리)에게 좋은 일이, 높은 확률로 생길 거야. 즉 잘 될 거야. 그러니까 해.”
반대로 얘기하자면, 삶의 방향과 그 방향을 따라 걸을 정신적인 힘, 의지는 확신을 갖고 미래를 그려낼 수 있을 때 만들어진다. 즉 안정적으로 형성된 예측 편향은 결과적으로 삶의 이정표이자 동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를 포함해 우리 중 몇몇에게는 현대 환경에서 관성적으로 형성한 예측 편향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측 편향이 목표로 하는 장기 생존은 추상적인 목표이기에 그 추상적인 목표의 성취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다른 목표가 필요한데, 현대 환경의 영향을 받은 그 간접 목표는 오히려 자주 우리의 장기 생존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목표로 한다면 지금 당장 살아남는다는 조건을 만족하면서도 이어질 미래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생존을 추구하는 일은 곧, 미래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는 일이 된다. 이 때문에 생존을 추구하고자 미래를 향해 분주한 우리의 모습은 마치 삶 이상의 가치를 좇고자 지금의 삶을 소비하는 모습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편 그래서 우리는 미래까지 대비할, 더 나은 상태에 다다랐을 때, 생존을 확보했다고 판단한다. 즉 장기 생존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했음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또 다른 목표는, 더 나은 상태이다. 이렇게 정의한 생존 확보 판단에 관한 논리는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고와 행동의 시작점이 되는 미래 예측에 반영된다. 생존을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을 확보한 상황에 관한 정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미래까지 생존하고자 지금의 생존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더 여유로운 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점은 예측 및 계획 활동을 포함하는 다양한 생존 활동의 목표가 된다.
그렇다면 더 나은 상태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될까? 뇌가 생존을 위해 미리 정해 놓은 기준(관성, 편향) 대부분은 직접 시도하고 그 경험을 분석하며 쌓은 정보를 통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 경험 분석에 관여하는 다양한 정보 중 큰 영향력을 갖는 정보 중 하나가 사회적인 정보이다.(다만 이는 무의식적인 정보처리 과정에 관한 추측이긴 하다.) 즉 우리는 무리 동물로써 주로 내집단이나 주변의 타인을 참고해 미래까지의 생존을 확보한 상태를 정의한다. 그러나 보통 현대인에겐 주로 참고할 내집단이 없다. 무리 동물은 같이 일하고 함께 생산한 것을 나누며 서로가 아군임을 확인한다. 혹은 생존 노하우를 공유하며 서로가 아군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산업 구조에서는 내집단에 속해 같이 일했다고 느낄 경험과 같은 것을 만들고 그것을 나눴다고 느낄 경험을 하기 어렵다. 또한 변화가 빠른 산업 한경에서 이전 세대의 노하우를 나누는 일 또한 불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대인은 목표로 할 것을 찾을 때, 그 조상과 달리, 자신과 밀접한 관계의 내집단을 참고하지 않는다. 밀접한 내집단이 부재하기에 더 멀리로 눈을 돌리게 된다. 불행히도 그렇게 접하는 정보란,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목표이다. 발달한 정보통신기술은 너무나 쉽게 지구상의 모든 정보를 전달해 준다. 그러한 정보를 전달받은 우리는 더 나은 상태에 관한 기준 역시, 전세계급에 맞춰 설정하게 된다. 쉽게 말해 마을의 어른들을 참고하며 삶의 목표를 정하던 무리 동물이, 현대에 와서는 마을을 잃고 지구 전체에서 최상위권의 삶에 관한 정보를 접하며 삶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루지 못할 대단한 깨달음, 부, 명성 혹은 그것이 줄 엄청난 크기 혹은 빈도의 행복과 평안함을 좇는다.
문제는 현대인 대다수가 그 목표가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기초 과학과 수학을 익힌 현대인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인과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신 혹은 우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변수가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추론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꿈꾸고 있는 대단한 목표와 자신의 현재 상태 사이의 괴리를 담백하게 계산할 수 있다. 대부분은 그 괴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이루지 못할 목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지식을 통해 합리적인 인과 추론을 할 수 없더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엄청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의 성공이 이어져야 하는데 당연히 모든 중간 목표를 성취할 확률은 매우 떨어진다. 당연한 실패를 경험하며, 원대한 계획이 어긋났다고 인지하게 되면 목표로 했던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더 나은 삶의 기준이 될, 성취의 기준은 더욱 높아지고 그리고 그 성취가 너무나 높아져 평생을 가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겨난다. 실패를 경험하며, 그 실패의 탓을 자신으로 돌리거나 세상이 원래 통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은 의심을 확신으로 전환한다. 좌절하고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기로 한다. 또 다른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는다. 거대한 성취의 발판이 되는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언젠가는 꼭 그 성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특정 중간 목표에 더욱 매몰된다. 혹은 자신이 설정한 중간 목표가 잘못되었다며 목표를 수정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이처럼 높아진 목표와 함께하는 미래 예측은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다주고, 실패의 경험과 분석은 다시 미래 예측 방식에 영향을 주는 정보를 생산하며, 우리 삶을 특정한 순환으로 인도한다. 그 순환은 높은 확률로 좌절, 매몰, 방황을 동반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먼 미래까지 삶을 이어간다는 궁극적인 목표의 성취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기준이 흔들리기 쉬운 환경에 산다. 전통적으로 참고하던 기준이 사라지고 너무 높은 기준만이 제시되는 환경 속에서 우리 뇌는 목표로 지향할 바에 관한 실현 가능성을 잘못 계산하게 된다. 그 결과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맛보지 못하는, 예측, 계획의 실패를 겪게 된다. 이러한 실패는 자주, 생존에 위협적이기에 우리 뇌는 예측과 실제 상황이 달라진 원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예측과 실제 상황의 괴리를 계산하는 기능은 그 괴리의 원인을 찾고자 주로 뇌가 관성적으로 따르던 정보처리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단,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 속 변수와 같은 요소를 검토한다. 자신이 이전에 설정한 목표가 필연적인 실패로 자신을 인도하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하나의 실패 상황에 매몰되어 그 실패의 원인을 찾게 된다. 그렇게 파악한 실패 원인과 그 원인에 관한 대응 방법은 높은 확률로 실패 극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정보가 쌓여 특정한 편향이 만들어지면, 그 편향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의 매몰, 방황, 좌절과 같은 일을 겪게 될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도 노력의 양에 매몰되어 방식을 고민하지 못한 기간이 있었고, 삶의 목표를 여러 번 바꿔본 적이 있으며, 무기력함에 빠진 적도 있다. 조급했었지만, 무엇을 할지 몰랐었고 무엇을 할 힘도 잃었었다. 관성적으로 형성한 목표는 더 이상 이정표가 되어주지 못했고 동기가 되어주지 못했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계를 다시 작동시키고자 건전지를 갈아 끼워 주듯이 이제는 이전의 목표를 대체할 새로운 목표(예측 편향)가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이 엄청난 과제를 수행하고자 뇌의 아주 일부분인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과정 대부분을 인지조차 못하던 의식이었지만, 다행히 의식은 경험에 관한 추가적인 분석을 통해 목표 설정에 영향을 주는 정보를 생성할 수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뜯어고칠 순 없더라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목표 정도는 수정해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애초에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실현 가능성을 잘못 계산해서 설정한 목표(그리고 예측 편향)에서부터 생겨났기에, 이러한 해결 방식이 어느 정도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간접 목표를 새로 설정해야 할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장기 존속을 위한 간접 목표를 이해해야 한다. 우선 궁극적인 목표 자체는 장기 존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에, 간접 목표를 성취한다고 해도 장기 존속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우리가 하는 일은 장기 존속에 기여할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변수 중에서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변수 하나 혹은 몇 가지를 선택해 해당 변수를 통제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돌고 돌아서 결국 간접 목표란, 삶의 목표로서 장기 존속의 수단이자, 존속에 주는 영향과 통제(실현, 성취) 가능성을 고려해 정해지는 것이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존속, 생존, 번영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생명을 연장하고자 건강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직관적인 판단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환경 속 온갖 변수와 상호작용 하면서도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함은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만 건강이 매번 가장 영향력 있는 변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존속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 중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관성적으로 형성한 간접 목표가 더 이상 목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새로운 목표란,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로 형성된, 삶 통제에 관한 믿음(예측 편향)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길을 잃은 현대인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라면 복잡한 조건 없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충분히 통제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는 삶 통제에 관한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변수에만 매몰되었기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산업화된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멀리 내다보며 생존을 고민한다. 당장 먹을 게 없어서 내일의 생존을 고민하던 우리 조상과 달리, 현대인은 아주 먼 기간까지의 생존을 고민하며, 그 먼 미래까지 나아갈 추진력을 얻고자 중간 과정 혹은 지금 당장, 엄청난 성취나 만족감을 손에 넣을 방법을 고민한다. 혹은 먼 미래의 생존 혹은 번영을 보장해 준다는 어떤 깨달음이나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이들도 있다. 추구하는 바가 과거와 이토록 극명한 차이가 나기에, 배부름은 곧 우리에게 엄청난 지성을 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현대인은 자신이 왜 이러한 고민을 했는지 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자신의 조상과 거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즉 현대인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먼 미래까지의 생존인 만큼 자신이 비교적 여유로운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일의 생존을 고민하던 조상과 같이 과한 고민에 빠져있다.
생각해 보면, 안전하고 풍요로운 도시는 가까운 단기적인 생존을 보장한다. 이는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먼 미래까지의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꼭 성취, 깨달음 찾는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궁극적인 것일 확률이 높다. 성취나 깨달음을 손에 넣으면서 느껴지는 것, 바로 미래에 관한 확신이다. 물론 직접 궁극적인 목표로 향하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과거 어느 순간까지는 무작정 미래에 관해 확신하기보단 그 수단이 되는 성취나 깨달음을 목표로 하며, 다양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풍요로운 현대 도시에서 이러한 중간 목표는 딱히 필수사항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현대에서 성취나 깨달음과 같은 중간 목표에 집착하게 되면, 미래의 생존이 확보될 것이라는 확신의 형성을 방해받게 되어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앞서 얘기했듯, 현대 환경에서 성취나 깨달음을 손에 넣었다고 판단할 기준에 관해 너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가까운 이웃의 의견이 성취나 깨달음의 기준을 정했지만, 현대인은 그러한 이웃이 없다. 가까운 이웃을 잃은 현대인은 자기만의 경험을 참고하거나 통신 기계를 통해 먼 이웃의 의견을 참고한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각종 극단적인 자극이 경험과 그 경험에 관한 해석을 왜곡시키기 쉽고, 또 통신 기계를 통해 얻는 이웃의 의견이란 것 역시 극단에 존재하는 희귀한 경우인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왜곡되고 극단적인 기준을 형성한 현대인은 성취나 깨달음과 점점 멀어진다는 신호인, 실패를 겪게 된다. 실패는 방황과 매몰, 좌절로 이어진다. 간혹 이 실패를 극복하고자 끈질기게 매달린 몇몇은 더 큰 혼란을 불러 올 사실을 알게 된다. 극단적인 수준의 성취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변수를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풍요롭고 안전한 도시의 풍경은 작고 나약한 인간에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교도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즉 자신이 생존에 있어서 긍정적인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잃게 된다.
이처럼 현대 환경은 어느 정도 생존을 보장해 주지만, 관성적인 고민을 반복하는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엄청난 성취와 깨달음이 내 손안에 없다는 것을 근거 삼아 미래까지 나아갈 자신감을 잃는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살기 쉬운 환경에서 그 어느 때보다 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더 이상 성취나 깨달음이라는 중간 목표가 아니라, 사는데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궁극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황당하게도, 풍요롭고 안전한 도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나아가도 된다는 확신이다.
게다가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통제하고자 시도해 볼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하다. 미래 생존에 관한 확신은 성공(성취) 경험(혹은 실패 회피 경험)을 쌓아서 얻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성공 혹은 실패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생성하는 정보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외부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당연히 매번 우리는 우리가 의도한 성공 혹은 실패를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결과가 나온 후에 뇌 안에서 벌어지는 원인 분석은 어느 정도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분석에 관여해 확신 형성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방법이 성공이나 실패라는 결과에 관여해 확신 형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방법보다 통제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환경을 고려하고 통제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더욱 우리의 목표는 생존에 관한 확신을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뇌의 생존 활동과 그 결과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와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생산해야 하고 특정 변수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생존에 관한 확신은 환경 통제 여부를 통해 생성된다. 우리 뇌는 환경을 통제하고자 미래를 예측하고 나타나는 변수와 자신의 상호작용이 원하는 결과에 이르도록 계획을 만든다. 계획을 실행하고 난 뒤에는 그 예측, 계획과 실제 상황을 비교하며 자신이 성공적으로 환경을 통제해 냈는지를 평가한다. 이때, 단순히 예측과 실제 상황의 일치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 혹은 불일치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다양한 변수를 분석하며, 환경 통제 여부를 보다 심층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에서 주로 고려되는 변수는 ‘나’와 환경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 그리고 환경 통제 성공 혹은 실패에 큰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특정 변수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환경 통제 성공 이유를 자신의 우수한 능력에서 찾을 수 있거나, 환경에 변수가 적어 환경 자체가 통제되기 쉽다고 분석할 수 있고, 혹은 투자한 노력의 양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석은 통제 방식에 관한 피드백이 될 뿐만이 아니라, 통제 성공 혹은 실패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더 정확하게 측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분석 결과, 자신이 충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아주 우연한 변수의 출현으로 통제 실패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면, 통제를 실패라는 결과를 마주해도 굳이 통제 확신, 미래에 관한 확신을 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자율성을 크게 느끼는 경우에는 통제감, 대리감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처럼 보통은 분석 과정에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통제 확신, 미래에 관한 확신을 유지하거나 강화한다.
게다가 이와 같은 정보가 형성되면, 해당 통제 시도의 성공 여부에 관한 피드백이 될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정보가 쌓여 예측 편향이 형성되고 전반적인 믿음, 태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환경 통제 성공 이유를 계속해서 노력으로 돌린 결과, 노력이 삶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믿음이 형성될 수 있고 혹은 환경 통제 성공 이유를 계속해서 자신의 능력에서 찾은 결과, 자기 효능감이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다시 다음번 예측과 계획, 원인 분석에 반영되어, 보통은 믿음을 재생산하고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통제, 미래에 관한 확신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런데 통제에 관한 확신을 생산하고자, 자신과 전반적인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특정 변수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성취와 깨달음에 집착하던 일과 사실상 같은 일이 벌어진다. 현대 환경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은 보장해 준다. 하지만 더 큰 성취를 목표로 한다면, 온갖 변수가 넘쳐나 상황마다 각 변수의 영향력이 매번 달라지는 환경에 노출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외부 변수에 의지하지 않는 자기 확신이다. 온갖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변수인 ‘나’라는 변수의 영향력이 강력해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결국 잘 될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복잡한 현대 환경에서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성공 여부나 특정 변수의 통제 여부를 가지고 상황 통제 여부나, 계속 나아갈지 말지를 평가하게 되면, 상황마다 매번 다른 답과 분석을 내리며 흔들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측, 계획, 비교, 분석 과정에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형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특정 변수에 관한 분석에 매몰되는 것을 지양하며, 통제 확신과 삶에 관한 확신을 형성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목표로 할 바는,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로 구성된 통제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은 예측 및 통제 활동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해당 활동에 의식적으로 개입해 조절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생존을 위한 예측 및 통제 활동은 생존을 방해하는 위험과 생존에 이득이 되는 보상을 향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번 글에서는 위험에 관한 예측 및 통제 과정을 분석하며, 해당 과정에서 자기 확신과 통제 확신을 형성하고자 해야 할 일을 다뤄보고자 한다.
외부 환경에 관한 정보를 수용한 온갖 신체 부위는 그 정보를 뇌에게 전달한다. 뇌는 과거부터 쌓아 놓은 정보를 참고하며 새로 들어온 정보를 분석해 생존에 이득이 되는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그중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을 고른다. 선택한 계획이 실행되고 예측과 같거나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뇌는 예측 성공 혹은 실패에 대응하고자 다시 또 다른 정보 분석을 시작한다. 동시에 다음 정보 분석에 적용할 정보가 새롭게 쌓이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며, 우리 삶은 연장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뇌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생존에 끼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것이다. 즉 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지를 먼저 계산한다. 보상과 위험을 분류하면, 그에 맞춰서 약간씩 다른 전문 기능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보상과 위험의 분류, 예측, 대응 과정이 모두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해당 과정이 느낌의 형태로서 의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두 가지 활동이 약간의 차이를 갖기에 분류한 내용에 따라 느껴지는 느낌 또한 달라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보통은 보상과 관련된 정보처리의 경우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고 반대로 위험과 관련된 정보처리는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
우리는 보통 보상 예측이 동반하는 쾌한 느낌을 행복, 위험 예측이 동반하는 불쾌한 느낌을 불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러한 주관적인 느낌만(오직 불쾌함과 유쾌함만)을 특정해서 불안,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측, 대응, 학습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의식적인 현상까지 불안 혹은 행복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각자가 정의하는 불안과 행복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대응 과정에서 신체가 활성화되고 긴장이 인지되는 것을 근거로 불안을 정의할 때 긴장까지 포함시키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학습 과정을 통해 불쾌함이 만연해지고 무기력함으로 발전하는 것을 근거로 장기적이고 만연한 불쾌함, 우울함이 불안이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예측 과정은 다양한 후속 과정으로 이어지고 그동안 불쾌함 혹은 유쾌함이 쭉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느낌이 유지되는 동안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중구난방으로 묶어 불안 혹은 행복을 주관적으로 정의되는 일이 빈번하다.
문제는 불안과 행복의 중심부인 불쾌함과 유쾌함이 우리 의식에게 이정표이자 동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측한 미래에 관한 알맞은 대응 계획을 구상한 특정 뇌 부위는 다른 뇌 부위와 해당 계획을 공유하고 다른 뇌 부위에게 협력을 요구하고자 자신의 계획이 긍정적인 미래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주장은 불쾌함 혹은 유쾌함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불쾌함은 곧 예측한 위험에 대응하라는 신호로서 대응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강렬한 확신(주장)이다. 반대로 유쾌함은 곧 예측한 보상을 취하라는 신호로서 그렇게 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강렬한 확신(주장)이다. 따라서 불쾌함과 유쾌함은 우리가 앞으로 특정한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목표를 갖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목표에 관한 의식적인 정의가 제각각이기에 각 느낌을 인지한 의식은 혼란을 겪는다. 지향할 바는 명확해야 하는데, 애초에 그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불안이 해소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불안이 동기이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누군가는 행복을 쾌락(헤도닉)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만족(에우데모닉)으로 나눠 그 둘의 차이를 논한다. 한쪽에서는 소소한 행복의 삶의 지향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도파민을 만 악의 근원으로 취급한다.
이는 모두 쾌함과 불쾌함이 느껴지는 예측 과정이 다양한 후속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글을 읽으면서는 불안과 행복에 관한 주관적인 의견을 모두 잊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불쾌함과 쾌함에 관한 기존의 다양한 정의는 예측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며, 결과적으로 목표를 찾는 과정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불안이든 행복이든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과정에 따라서 다르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 맞다. 앞서서 다뤘듯, 우리가 주로 개입해할 과정은 분석, 학습 과정이고 그 개입을 통해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생산해 통제에 관한 낙관적인 태도를 형성해야 한다.
핵심 역시 앞서 다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험을 예측하고 대응하며 다음 예측을 위해 이전의 예측과 상황을 분석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자신이 상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환경은 덜 위험하며, 특정 변수가 엄청난 영향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상황이 통제될 것이라는 정보를 쌓아나가면 된다.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러한 정보가 쌓일 확률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러한 정보를 쌓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통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평가는 성공 경험을 통해 형성되거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강력한 자율성을 가진 경우에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측이 실제로 실현되었는지를 평가하고 분석하다 보면, 다음 예측에 반영할 노하우를 생성할 수가 있다. 때문에 뇌는 예측 경험을 학습한다. 이때, 예측이 잘 실현되었으면, 보통은 예측을 한 당사자와 당사자가 처한 환경에 관한 긍정적인(낙관적인) 평가가 형성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예측이 실현에 실패해 환경 통제에 실패하게 된 경우, 예측 당사자와 당사자가 처한 환경에 관한 부정적인(비관적인) 평가가 형성될 확률이 높다. 이처럼 보통은 실제로 환경 통제에 성공했을 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자신과 환경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가 형성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미래를 완벽히 예측해 매번 환경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방법은 존재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변수와 그들의 상호작용을 모두 파악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파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와 달리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를 미리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평가를 하기 어려워한다. 기술의 발달로 풍요로운 환경에 살게 된 우리는 더 장기간의 생존을 목표로 더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길 꿈꾼다. 과거에 비해 더 높은 목표를 이루고자 부지런히 더 많은 변수를 온전히 통제해야 하는데, 마침 발달한 기술과 더 높아진 교육 수준이 우리가 더 많은 변수를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즉 우리는 과거에 비해 주변 변수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더 빈번한 위험 통제 및 보상 통제를 시도한다. 그러나 시도 자체가가 많아지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 경험 역시 많아지며, 그러한 경험이 쌓는 정보도 많아진다. 이처럼 일관적이지 않은 결과들, 즉 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일관성 있게 자신과 환경에 관해 낙관적인 정보를 형성할 확률이 낮다. 통제 시도에 매번 참여하는 자신과 환경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주된 변수가 아니라면, 다른 특정 변수가 통제에 있어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해석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 혹은 실패 여부만이 자신과 환경에 관한 평가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성공, 실패 후 그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성공 혹은 실패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과 환경에 관한 평가를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패하더라도 이번 실패는 우연이며 여전히 자기 자신이 환경에 통제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한다면, 실패가 무조건 자기 자신에 관한 비관적인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현대에서는 너무 많은 변수를 파악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인과관계 해석에서도 더 많은 변수를 고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변수가 많아지고 결과에 관한 영향력이 더 분산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향력은 이전에 비해 더 낮게 측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정말 옳은 것일까? 대부분의 차가운 현대인은 구체적인 근거 없이 ‘나’라면 할 수 있다는 뜨거운 사람을 벌거벗은 임금님 정도로 여긴다. 이처럼 너무 똑똑한 현대인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나’라는 감각, 즉 높은 자율성을 쉽사리 손에 넣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형성하기 어려워하고 이를 쌓아 만들 수 있는 환경에 관한 통제감과도 거리가 멀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쌓고 이를 토대로 통제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현대 환경에서 뇌가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실패에 집착하게 되고 그로 인해 통제감 저하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정 뇌 부위가 주로 위험 통제와 관련된 기능을 한다는 것은, 그 부위는 다른 부위에 비해서 위험 통제와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비율이 높다는 뜻이다. 이처럼 특정한 정보를 주로 처리하며, 특정한 주장을 주로 하는 모습은 외부에서 봤을 때, 마치 해당 부위가 해당 정보를 생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모습처럼 보인다. 뇌는 아마 이처럼 각자 특정한 정보가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들이 뭉치고 협업하는 모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장면은 그리 흔치 않다.
위험 통제를 시도하는 세포 집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험을 예측하고, 위험에 대응하며, 자신의 예측을 돌아보며 위험 통제에 관한 정보를 학습하는 일을 진행하는 세포 집단은 위험이야 말로 생존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로 여기고 이들을 어떻게든 통제하고자 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은 애초에 위험을 완벽히 통제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빈번하게 나타나는 실패는 이들의 뜨거운 믿음에 찬물을 끼얹는다.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위험을 통제하고자 하는 세포 뭉치는 이 찬물에도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고자 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실패를 겪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위험 통제 실패라는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학습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입장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고 하다 보면, 잘못된 인과관계 추론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이처럼 필연적인 실패를 허용하지 않고, 실패를 완전히 극복하려고 억지를 부리다 보면 오히려 삶에 악영향을 주는 방법을 찾게 될 확률이 높다.
이렇게 자신, 환경, 특정 변수와 실패의 관계를 억지로 찾다 보면 다양한 방식의 추론이 만들어지는데 그중 하나가 특정 변수와 실패의 인과를 강력하게 묶는 경우다. 실패를 분석하다 보면, 돈, 운, 노력의 양, 노력 방식과 같은 특정 요소가 실패와 성공의 경계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라는 추론을 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실패와 성공을 나누는 핵심 요소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만들어지는 다양한 정보는 특정 요소에 매몰되는 결과로 이어지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를 매번 바꾸며 방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복되는 성공과 실패 경험 속에서 하나의 요소만이 분명 그 성공과 실패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정보를 반복해서 생산하게 된다면, 그 요소에 더욱 매몰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실패 경험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자신이 추구하던 요소의 영향력을 크게 부정하게 된다면, 실패마다 실패를 극복할 특정 요소를 새로 찾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실패를 완전히 극복할 방법이 있다고 믿으며 특정 외부 요소를 통제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믿게 된다면, 하나의 요소에 매몰되어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외면하게 될 수 있고, 혹은 반대로 매번 여러 요소 사이를 방황하며 통제에 관한 확신을 서서히 잃어갈 수 있다.
또 분명히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실패가 끈질기게 버티는 이유를 자신과 환경에게서 찾게 될 수도 있다. 살기 위해서는 꼭 위험을 통제해야 하는데, 그 통제를 매번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통제를 시도하는 주체인 자신이 못나서 일수도 있고 혹은 통제 시도를 당하는 주체인 환경이 매우 드물게 통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정보는 못난 자신도 환경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게 될 드문 기회, 혹은 거친 환경이 성공적으로 통제될 드문 기회까지 최대한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니 특별한 기회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판단 때문에 예측 및 통제 시도 자체가 줄이고자 무기력해질 수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보와 편향이 섣불리 생기는 것을 막고자 기억, 학습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또 가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주는 불쾌함의 누적을 참지 못하고 드디어 이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기회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갑자기 아주 도전적인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신과 환경이 절망적인 상황이라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무기력함에 빠지거나 학습 능력이 저하되어 그 상황을 탈출하고자 상황이 생각보다 절망적이지 않다는 정보를 쌓아갈 새로운 예측 및 통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거나 해당 시도에서 학습을 할 수 없게 된다. 또 절망적인 상황을 가장 안전하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마주한 위험을 하나씩 극복해야 하는데,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판단은 그와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확률을 높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실패가 반복되며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누군가는 특정 요소에 관한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믿음이 생성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표를 바꾸는 일을 반복한다. 또 실제로 만연한 불안이 무기력함과 인지, 학습 능력의 저하라는 증상을 가진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가끔은 그 우울증이 갑작스레 도전적인 행동을 하는 조증과 함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돌아보며, 불안이 위험 예측 및 대응, 학습 과정과 함께한다는 것을 근거로 학습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 생성의 반복이 다양한 부적응적인 행동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위험 통제를 시도하는 뇌 부위는 생존에 있어서 위험 통제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과제를 어떻게든 성공시키고자 한다. 실패의 경험에서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꼭 찾아내고자 하고 그러한 열정은 자주, 실패에 관한 잘못된 인과관계 추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위험 통제 후에 이뤄지는 학습에서는 잘못된 정보가 쌓이고 그러한 일이 반복되며 잘못된 편향, 태도가 만들어져 결과적으로 잘못된 목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편향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쌓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지금까지 여러 번 제안한 셀리그먼의 낙관성 학습을 활용한 방법을 다시 제안하고자 한다. 셀리그먼은 똑같이 반복된 통제 실패를 겪으면서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좌절하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고자,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 태도를 통해 상황을 분석하는, 상황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렇게 주관적으로 생성된 정보가 쌓여 다시 특정 태도, 믿음으로 이어지거나 기존의 태도가 더욱 굳건해지는데, 이를 의식적으로 개입해 조절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셀리그먼이 설명하는 이러한 정보 처리 과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뤄온 환경 예측 및 통제 과정과 같이 인간의 정보 처리, 수용 및 태도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셀리그먼이 제안하는, 의식적으로 정보를 조절해 태도를 바꾸는 방법을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의식적으로 정보를 쌓아 편향을 바꾸는 방법으로써 활용해 볼 수 있다.
그 방법을 아주 간략히 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은 자신에게 형성된 태도, 편향을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위험 통제 시도의 결과가 나온 지점에서 자신이 해당 결과를 자동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자신의 태도, 편향을 확인하는데 용이하다. 이렇게 태도, 편향의 밑거름이 되는 특정 정보를 쌓이는 것을 포착했다면, 해당 정보를 부정하고 자신이 의도한 내용의 정보를 의식적으로 생산하여 덧씌운다. 이때, 환경 통제에 있어서 자신과 환경에 관한 낙관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것을 지향하고, 특정 요소의 영향력을 과대 해석하는 것을 지양한다. 이를 반복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라면 자신이 처한 환경을 잘 통제하며, 환경에 잘 적응해 존속을 이어갈 수 있다는 예측 편향이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위험을 앞두고 책임지고 선택하는 훈련을 반복해, 위험 통제에 관한 자기 효능감, 통제감을 쌓아나가는 방법이다. 해당 방법은 대리감을 연구한 패트릭 하가드 교수의 한 연구를 근거로 한다. 하가드는 타인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은 보통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마주하더라도 해당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명령자로 여기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대리감이 낮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추측을 검증하고자, 벨기에 육군사관 생도를 대상으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결과, 실제로 일반 병이나 하급 생도의 경우 일반인에 비해 대리감이 낮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급 생도의 경우에는 대리감이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결과를 상급 생도가 꾸준히 받아온 훈련에 의한 차이로 해석했다.
군인은 장교, 부사관, 병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장교는 주로 명령을 하고 병사는 주로 명령을 따른다. 사관학교는 장교를 육성하는 장소지만, 사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명령하는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학년 사관생도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명령을 받는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일반 병사처럼 대리감 통제감이 저하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되기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한다. 상황에 알맞은 명령을 내리고자 자신이 마주하게 될 다양한 상황을 미리 공부하고, 모의 상황에서 직접 명령을 내려 보기도 한다. 또 그렇게 내린 명령이 여러 변수를 마주하며 의도치 않은 결과로 나타나는 경험을 하고 해당 결과를 책임지고 후속조치를 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전시 상황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이겨내고자 자신의 통제권을 상급자에게 넘기던 하급 생도는 전시 상황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직접 통제해 이겨내고자 하는 상급 생도가 된다. 즉 상급 생도의 상대적으로 높은 대리감은 (전시) 상황 통제 시도 훈련을 반복하며 형성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전시 상황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해당 상황의 통제에 관해 자신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급자에게 자신의 통제권을 넘기는 병사의 모습은 마치 통제하기 어려운 위험(그리고 실패)을 어떻게든 통제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여겨지는 특정 변수에 매몰되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하급생도가 훈련을 통해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듯, 우리 역시 비슷한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자신이 환경을 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추측되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관한 믿음인 자기 효능감이나, 자기 자신이 벌어진 사건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믿음인 자율성, 대리감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통제감과 큰 상관을 가진 유사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훈련의 내용은 군사 훈련과 마찬가지로, 마주하게 될 상황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불확실성, 위험을 앞두고 직접 선택(대응)해보는 경험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대응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먼저 마주하게 될, 위험 통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위험 예측과 통제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떤 목표로 이루어지는 이해 해야 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듯, 이 모든 활동이 생존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통제감 형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이어질 위험 통제 시도를 반복에서 위험 예측 및 통제 과정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쌓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이처럼 상황을 이해하고 목표를 명확히 했다면, 위험을 통제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며, 통제 경험을 쌓는다. 다만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끝까지 해당 결과를 책임지며,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위험이 어느 정도 통제 될 것이라는 정보가 생성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반복하며, 위험 통제에 익숙해지고, 결국에는 자신에 의해서 그 결과가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는 정보를 쌓게 되면, 자기 자신에 관한 낙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위험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위험 통제 시도에서 관성적인 학습이 이뤄지지 않도록 개입하거나, 위험 통제 시도의 맥락과 목표를 이해하고 위험 통제 상황에 적극적으로 노출되며 그 결과를 끝까지 통제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섣부른 결론을 내며 위험에 관한 잘못된 편향이 형성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라면, 언젠가는 해당 위험을 결국에는 통제해 낼 것이라는 믿음을 쌓아나갈 수 있다. 결국 많은 것이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위험을 통제하는 일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한 믿음을 키워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위험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닌, 자신의 의도에 맞게 위험 경고 신호에 대응하는 삶을 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보상 통제, 행복에 관한 얘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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