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심지어 우리 시야 밖에서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크고 작은 것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눈으로 봤던 것, 타인이 자신의 눈으로 봤다고 하는 것까지 참고해서 지금부터 내 눈앞에 생길 일을 예측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항상 올바른 미래 예측을 위해 필요한 정보의 양보다 턱 없이 부족한 양의 정보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꼭 미래를 완벽히 통제하는 일을 지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미래 통제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생물의 최종 목표는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다. 그 방법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사는 일, 살기 위해 앞을 내다보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 하듯, 살기 위해 엉성하게라도 미래를 예측해내야 한다. 아주 엉성하게 비유하자면, 생명체는 모두 이빨로 씹는 것을 꿈꾸지만, 이가 없기에 잇몸으로 씹으며 사는, 엉성하지만 치열한 집념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살아남고자 우리가 경험하는 크기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의 인과를 느슨하게 추적하고 규칙을 찾고자 노력한 결과, 정확도가 아주 낮지는 않은 미래 예측 방정식이 생겨난다. 게다가 경험을 쌓아가면서 부지런히 해당 방정식을 수정해 간다. 이러한 과정을 이어나가며, ‘나’의 삶을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는 나름 쓸 만한 방정식이(물론 앞으로도 계속 고치겠지만) 생긴다. 다시 엉성하게 비유하자면, 잇몸으로 씹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만든 수준의 임플란트 정도(아니면 잇몸으로도 씹기 위한 요리법 정도)는 만들고 장착해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나 신으로부터 세상(미래)을 통제할 완벽한 고차원 방정식을 선물 받고 태어난 존재도 아니고, 그것을 구축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서 사는 존재도 아니다. 파악할 수 있는 정보도 제한적이고 인지 능력도 자신이 꿈꾸는 수준과는 거리가 있지만, 생존을 이어가고자 시행착오에 뛰어들어 직접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정보를 뽑아 방정식을 만드는 존재다. 다만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나침반인, 그 방정식(혹은 방정식을 만드는 일)을 너무나 깊게 믿기에 자주 그것이 진리와 같다고 착각할 뿐이다. 어쨌든 사실 우리는 구축한 방정식을 따라 행동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하면 그 방정식을 고치고 다시 새로운 방정식을 따라 행동하는 일을 반복하며 삶을 연장해 나간다. 따라서 반대로 방정식은 생존과는 때어놓을 수 없는 삶의 이정표이자 삶을 이어나갈 동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번 백지에서 방정식을 구축하는 일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또 적은 경험으로 섣불리 만드는 방정식은 큰 리스크를 동반한다. 그래서 생물은 자신이 경험하는 환경이 어느 정도는 영원할 것이라고 가정하며, 해당 환경을 상수로 두고, 해당 환경에 적응(맞춰 진화)한다. 물론 이 합리적인, 효율에 관한 계산은 의식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는 아닐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는 그저, 두 가지 종류의 생식 세포가 만나 새로운 유전자 조합이 만들어지는 동안, 환경 속 특정 변수를 방정식의 새로운(이전 세대와는 다른) 상수로 두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더 정확히는 이미 끝없는 시간 동안 복제되고 분리되고 결합하고를 반복한 고분자화학물은 온갖 상수를 설정해 본 기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종마다 개체마다 그 방대한 기록 속에서 다른 부분을 활성화하거나 비활성화하는 선택을 하면서 차이가 생겨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생명체마다 그 생명체를 이루는 세포 수나 생김새가 다르고 삶의 형태가 다르다. 아주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한 개는 자신들의 사촌인 여우, 늑대와 달리 주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산다. 반대로 얼룩말은 자신들의 사촌인 말과 당나귀와 달리 주로 사람과의 공존을 자신의 삶의 상수로 두지 않는다. 또 신기하게 벌은 무리가 하나의 몸처럼 살아간다. 각각이 피부라는 경계로 나뉘고 독립되지만 그들의 삶의 형태를 바라보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동물을 이루는 여러 장기가 협업하는 모습과 같다. 오직 번식만을 담당하는 여왕벌은 마치 동물의 생식계 같고, 집단 유지를 위해 온갖 외부 활동을 담당하는 일벌은 마치 운동계나 감각기 같다.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마치 소화 기관을 이루는 세포가 자신의 업무에 질려 신경계로 이직하고 싶어 하는 일 없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벌 역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에 그들은 더욱 한 몸 같다. 이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삶에 관한 방정식 속 상수에 따라서 다양한 삶의 형태가 생겨난다. 또 이 때문에 유전자가 거의 같은 종은 비슷한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를 가질까? 물론 우리가 완벽히 비슷한 삶의 형태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며, 각자 다른 경험을 쌓게 되고 그에 영향을 받은 방정식도 변하며 개인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개개인의 삶 그대로의 모습은 이미 여러 변화를 거쳐 공통된 상수를 찾기 힘들어진 방정식이 발현된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공통 상수(인간의 삶의 형태)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신 우리는 삶의 형태를 파악하고자 우리 행동 원리의 뿌리를 추적해 볼 수 있다. DNA에 새겨진 설계도를 따라 만들어진 뇌는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우리는 뇌의 작동 방식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다. 즉 삶의 형태가 정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뇌의 작동 방식을 추적해 우리 삶의 형태를 파악해 볼 수 있다. 물론 뇌의 작동 방식 역시 세월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개인차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와 통계 기법 덕분에 우리는 공통적이면서 반사적인(그 연구에서만 의식적으로 조작하지 않은) 뇌의 작동 방식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역시도 현재 수준에서 파악 가능한 변수 간의 법칙을 찾은 과학적인 지식으로서 추후에 기술과 연구 방식이 진보하면 변화할 수 있기에 완벽한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견해가 더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 결과를 참고하며 우리의 삶의 형태에 관해서 확신에 차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무리를 짓는 삶의 형태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 뇌는 우리가 무리 지어 사는 삶의 형태를 갖도록 최적화되어 있다. 뇌의 다양한 작동 방식이 우리가 무리 지어 사는데 기여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단 우리가 타인과 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뇌의 작동 방식이자 기능은 바로 동조(모방, 동기화)이다. 뇌는 그 자체가 각자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뇌 세포 뭉치의 집합이다. 따라서 매번 의사결정을 위해 주장을 나누고 합의한 끝에 서로 동조하는 일을 반복한다. 물론 그 토론과 합의는 우리 생각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그들은 어차피 서로가 ‘나’라는, 같은 정체성을 가짐을 알고 서로가 ‘나’(서로)의 생존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기에 누군가가 치열하게 주장하기만 하면 보통은 일단 납득하고 동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하나의 뇌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동조하는 일은 뇌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뇌의 일부는 자신이 ‘같은 무리’라고 인지한 타인의 뇌 활성화를 모방하고자 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해당 타인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뇌 활성화 상태를 추측해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활성화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타인의 감정이나 주장에 반사적으로 동조하게 되며(반대로 거절에 어려움을 느끼며), 또 가끔은 타인의 감정을 아주 생생하게 공유받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나’라는 정체성은 마치 벌과 같이, 같은 무리로 까지 확장된다. 어쩌면 우리와 벌 정도의 크기 차이를 가진, 우리를 벌이나 개미 정도의 크기로 인지할 아주 거대한 지성체가 우리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벌의 삶의 형태를 바라볼 때의 감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혹시 어쩌면 애초에 세포나 세포 뭉치가 협업하는 방법이 일정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벌이나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 뇌나 장기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매우 닮았기에, 세포나 세포 뭉치가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생존을 향한 협업 방식은 일정한 형태로 제한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때문에 ‘나’를 위한 삶을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한 삶이나 내가 아군으로 인식한 사람의 삶과 구분하기 어려워하며, 자연스럽게 단체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진정으로 ‘나’만의 삶을 살지는 않는다. 피부라는 경계를 통해 세상과 ‘나’를 구분하고, ‘나’를 독립된 개체로서 인지하는 빈도가 잦은 일부 뇌(의식)와 달리 대부분의 뇌 부위는 ‘나’라는 개념을 자주 집단에게 까지 확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삶의 방식은 실제로 생물의 최종 목표에 기여하기에 필요하다. 무리 동물은 생존을 위해 뭉치기에 남을 위해 살아야 ‘나’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 ‘나’를 확장해야 한다고 믿는 일부 뇌의 주장은 피부라는 경계를 인지하고 내가 타인과 분리됨을 인지하는 ‘의식’의 주장(생각)과 상충하기에 의식이 그 의견에 평생 동조하지 않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동조를 주장하는 일부 뇌는 의식이 자신을 정신체로서 인지하며, 인간을 정신, 영적인 존재로 인지하는 경향 가진다는 것을 파고든다. 바로 영혼, 정신,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물리적인 분리를 넘어 하나로 이어진 존재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 결과 마치 굉장히 의식적인 부분처럼 보이는 삶의 목표(형태) 역시, 결국 ‘나’만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조그마한 뇌의 일부에서 다른 뇌의 일부와 신체의 활성화를 마치 한 차원 위에서 관조하는 것만 같은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에게 신체적 제약을 벗어난 어떤 기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그 관조자에게 마음, 정신, 영혼이라는 명칭을 붙이곤 한다. 이처럼 우리는 놀라운 인지 경험의 원인을 추적하며, 잘 만들어진 기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을 초월한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놀라운 정신 경험을 해석할 때 역시 주로 마음과 영혼에게서 그 원인을 찾곤 한다. 피부라는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머리를 이어 놓은 것만 같은, 동조나 모방이라는 경험을 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갑자기 발생한 동조(공감)를 경험하면서, 뇌가 상대방을 추적하고 따라 하는 기계라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대신 각자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가 같기에 분리된 몸에서 각자 사건을 주관적으로 경험했음에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엉성한 인과 추론 끝에 나오는, 영혼을 가진 자들이 같은 것을 따르자는 주장은 또 재미있게도 실제로 무리 생활에 기여하며 오랫동안 인류 사회에 깊게 스며들었다. 결국 우리는 마음과 영혼이 추구하는 대상, 즉 진리나 신을 추구한다. 현대에 와서는 존재 의의나 삶의 의미와 같은 것을 모두가 추구하는데, 결국 모두가 추구하는 기준을 자기 삶의 지향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명칭만 바뀌었을 뿐 진리나 신을 추구하는 일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 즉 우리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마땅한 것을 추구하며, ‘나’만의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을 산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지향하는 삶은 남 혹은 모두를 빼고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은 공통 기준, 목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핑계 삼아 더욱 ‘나’가 아니라 모두에게 파고든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나만의 삶을 위한 이정표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렵게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 역시 결국 시도 때도 없이 사회적인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애초에 정말 순수한 ‘나’의 삶을 찾고 싶다면, 사회적인 정보를 전혀 고려할 필요는 없다. 타인이 제시하는 삶에 관한 정보를 오히려 참고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늘 남과 함께 살아간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생존하고 번영하고자 남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모두와 함께 어울려 살고자, ‘나’의 삶의 방향을 고민할 때 모두와 함께하는 방법, 즉 남에 관한 고민을 빼놓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삶의 형태를 돌아보게 되면, 진짜 ‘나’만의 의미, 목표를 찾으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와 같은 무리 동물은 무리에서 ‘나’의 의미, 목표를 찾으면 마치 구원받은 듯이 만족해할 것이며, 실제로도 우리가 설정한 삶의 의미나 목표는 순수히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무리’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우리는 기본적으로 남과 모두에 영향을 받아 삶의 방식을 정하게 된다.
사실 생존이 목표라면 꼭 ‘나’ 일 필요는 없다. 생존입장에서는 ‘나’의 독립, 즉 자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자유는 오직 나만이 상황과 선택에서의 통제자라는 의미이다. 생명체는 더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상황의 통제에 있어서 자신만의 영향력(해당 사건에서의 자율성)을 따지고자 한다.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잘만 통제될 것이라면, 꼭 나의 영향력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황의 통제이며, 자신의 영향력은 상황 통제 성공이라는 결과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변수일뿐이다. 때문에 상황이 잘만 통제될 것이라면 굳이 자유를 내세우며 타인과 집단을 이루는 것을 꺼릴 필요는 없다.
이처럼 실제 우리는 타인이 설정한 삶의 목표를 추구하고, 또 암묵적으로는 과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의 크기(자유) 보다 통제 성공이라는 결과 자체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속마음이 매번 발현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더 높은 빈도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표면적으로 자유를 꿈꾸고 나만의 삶을 꿈꾸는 모습이다. 즉 우리는 무리에 녹아들고자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리와 나를 구분한다. 생존을 위해 무리와 나를 구분하고 ‘나’의 영향력(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리가 함께 일하고 난 뒤에는 공동 생산물을 분배하고자 각 개체의 기여도를 책정하는 일이 생기는데, 이때 자신의 영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주장하는 일이 필요하다. 반대로 대리감을 느끼지 못해 자신의 영향력으로 인한 인과를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는 이는 공정하게 협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며 협동을 위해 필요한 구성원 간의 신뢰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범위를 유동적으로 바꿔가며 생존한다. 때에 따라서는 무리와 나를 동일시하기도 하고 오직 ‘나’에 관해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놀랍게도 우리는 때에 따라서 삶의 형태와 깊게 연관이 된 강력한 관성을 쉽게도 바꿀 수 있다. 이 놀라운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의사결정을 관조하고 수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메타인지(의식)이다. 실제로 피험자에게 협력(무리) 혹은 배반(개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결과를 해석한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그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메타인지(의식)의 활성화 여부이다. 두 사람이 서로 분리된 환경에서 번갈아가며, 서로 받을 보상을 공정히 분배할지(이타적 선택) 혹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분배할지(이기적 선택)를 선택했다. 해당 실험에 일부 시행에서는 피험자가 의식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의사결정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아주 짧게 설정했다.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상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타적인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의식적인 사고를 할 시간을 충분히 줬을 때, 이기적인 선택의 확률이 올라갔다. 연구자는 이러한 결과를 우리의 기본적인, 반사적인 정보처리 및 의사결정은 무리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의식적인 생각은 그 관성을 깨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가 무리 생활에 벗어나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도록 기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무리 생활에서 벗어나 진짜로 ‘나’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특히 나만의 삶을 고민하는 아주 의식적인 사고를 하는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단한 메타인지가 만능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의식이 하는, 이 익숙하지 않은(뇌에게 있어서 기본 값은 무리 생활이다.) 사고의 결론은 자주, 극단적이고 때문에 엉성하다. 의식은 주로 무리 생활과 ‘나’만의 삶을 흑과 백으로서 억지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형태에서는 나를 위한 것과 우리를 위한 것이 완벽히 분리되지 않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의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한 채, 그저 단순히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추구하던 것의 반대 방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답에 도달한다. 이렇게 나만의 삶에 관한 고민의 답이 자주 엉성해지는 것은, 의식이 처음부터 어떤 명확한 정답을 갖고 관성을 깨는 일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보통은 모방과 동조에 관한 주장만이 가득 찼던 뇌에 대리감과 자율성에 관한 주장이 커지며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일이 생겼기에 이를 조정하고자 참여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를 안고 의식적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바를 찾고자 하지만 답에 도달하지 못한다. 기나긴 과정 끝에 실패를 마주하고 지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아예 그 길을 포기하거나 혹은 특정 가치에만 매몰되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소수가 끈질긴 노력을 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보이는 진실이란,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긴 노력 끝에 찾은 ‘나’만을 위해서 사는 방법에는 자신을 위한다면 자신이 속한 무리에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어렵지 않고 당연한 답은 반대로, 우리가 그토록 기대했던 진정 나만을 위한 삶, 그 삶으로부터의 구원 같은 것이 원래부터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의식은 아주 예리한 통찰로 한계를 넘어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관성과 반대되는 길을 강력히 주장했을 뿐이다. 이러한, 기대를 배신하는 사실을 마주한 이들은 결국 무기력해지거나 냉소적으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이 과정을 통해 그저 아주 얕은 결론에 도달하는 이들도 있다. 몇몇은 단순히 이타적인 목표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만 같은 이기적인 혹은 개인주의적인 목표를 지향하게 된다. 이들은 개인의 행복, 개인의 성공이란 것을 지향하며 주로 그와 반대에 있는 것만 같은, 인간관계라는 변수에 관해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과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인간관계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모순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결국 기대한 만큼의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만을 위한 삶을 찾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은 대부분 실패한다.
지구상 최고의 지성체처럼 보이는 우리가 사실상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 이기적인 삶과 이타적인 삶을 완벽히 구분하려 하는 바보 같은 일을 한다는 사실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뇌가 작동하는 절차에 관한 설명은 우리가 이러한 실수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자율성과 대리감에 관한 강렬한 주장을 받아들인 의식은 먼저 ‘나’의 경계를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 뇌는 먼저 ‘나’의 테두리를 정하고 그다음 그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일단 메타적인 사고가 뇌의 주된 의견이 되면서 ‘나’의 테두리가 좁아지면, 한동안은 ‘나’와 집단을 동일시하는 사고로부터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아군과의 상호작용을 변수로서 고려하며 의사결정하기 어려워한다. 즉 ‘나’와 이웃을 구분하고 거리를 두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전과 달리, 협력한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된다면, 표면적으로는 이타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개인에게 큰 이득이 되는 선택지를 외면하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를 위한 것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잠시 멀어진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나’만의 삶을 고민하며 타인과 나를 구분하고 이기적인 목표라는 얕은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그렇게 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말이다.
따라서 ‘나’만의 삶을 위한 지향점을 고려하는 일을 얕은 수준에서 하게 되면 모순에 갇히게 되어 득보다는 실이 더 커질 확률이 크다. 특히 우리는 이를 더욱 명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기존의 삶의 지향점으로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고 의문에 차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삶의 지향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고자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온갖 공통 목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공통 목표를 따라 추구하던,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얻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에 주목하며 여러 목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는 목표에 깊이 심취하게 된 이유를 추적하다 보니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뇌와 뇌의 의사결정 방식에 관해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예측하고 학습하는 뇌는 여러 예측, 학습 경험을 통해 삶을 통제하기 위한 인과 법칙을 섣불리 구축했고, 우리는 그 완벽지 않은 인과 법칙을 따르며 엉성한 목표를 추구했다. 또 동조하며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뇌는 우리가 그 엉성한 목표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더 강렬히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이러한 과정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신에 관한 정보에 한해서는 전능한 관조자라고 믿는 메타인지는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신념(예측 편향, 목표)을 인지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라면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그 목표를 정당화했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이들처럼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열렬히 좇던 일의 전말을 파악하게 되면서, 우리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다른 이들을 관조하는 입장에 놓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은근히 그들과 지금의 자신을 구분하게 되기 쉽다.
사실 지금 우리는 삶의 목표를 좇게 되는 과정을 관조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적극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여전히 다수가 추구하는. 완벽한 통제라는 보상을 목표 삼아 사는 일을 거부하고 그들과 다른 삶을 추구할 것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나’의 존속이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사실을 명시하며 그것을 위해 완벽한 통제라는 불가능한 보상을 추구하는 일은 득 보다 실이 많다고 여긴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엄청난 보상을 가정하는 일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기로 했다. 불완전한 통제 시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나’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불완전한 통제를 하게 됨에도 꺾이지 않고 ‘나’의 존속을 계속 이어나갈 동기이다. 그러한 동기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전반적인 통제감, 낙관주의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로 했다.
이처럼 우리가 그러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이러한 과정은 모두의 존속에 맞춰져 있던 우리의 초점을 ‘나’의 존속으로 돌려놨다. 게다가 보통이면 어중간한 결론과 모순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에서 끝까지 가는, 흔치 않은 길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삶의 목표를 찾는 과정에서 그 주제에 깊이 심취하며, 삶의 목표를 기준으로 타인과 나를 은근히 구분하게 되었다. 즉 ‘나’의 테두리가 좁아졌다. 실제로도 우리는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다른 대다수의 이들과는 다른 것을 좇는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누군가와 다른 것을 믿고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과 그 사람이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와 자신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게 된다. 게다가 새롭게 추구하게 된 목표의 내용 역시 홀로 위험과 보상에 관한 통제감을 기르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타인의 존재나 타인의 도움이라는 변수를 배제하고 있기에, 더욱 오직 ‘나’에 한정해서만 삶을 그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생존은 내가 속한 무리의 존속에 영향을 받는다. 즉 우리는 ‘나’를 위해 살면서 동시에 자신의 무리를 위해 살아야만, 진정으로 ‘나’를 위해 살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이정표이자 동기 역시 무리 구성원,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무리까지 확장하며 살아왔다. 그 사실을 명심하며, 삶에 관한 고민을 할 때에는 확장된 ‘나’, 우리, 인간관계에 관한 내용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고민한, ‘나’의 존속을 위해 위험과 보상에 관한 전반적인 통제감을 기르는 방법은 반쪽짜리 내용이다. 나머지 반쪽을 찾지 못하면, ‘나’의 존속이란 목표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마지막 과정으로서 가장 강력한 보상이자 위험임에도 우리가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인간관계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우리가 ‘나’의 삶의 목표라고 부르는 것에는 항상 남 혹은 집단이 끼어든다. 어렸을 때는 부모를 고려하며 살아가고, 어른이 되기 전에는 지금의 무리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무리에 속하기 위해 살아간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 자신이 구축한 무리를 위해서 삶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내 삶의 이유를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늘 내가 속한 집단을 고려하면서 삶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더 오래 생존하고자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는 당연하다. 무리 동물에게 있어서는 무리에 속하고 그 안에서 영향력을 갖는 일이 생존을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늘 남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리와는 생존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기에 그들과는 동조를 끊어내기도 하며, 또 같은 무리 내에서도 가끔은 자원의 차등 분배를 위해 서로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어도 속한 무리 혹은 상황에 따라서 내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리 동물에게 동족이란 늘 동조하고 싶은 보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멀리하고 싶은 강력한 위험이기도 하다. 한편 애초에 보상과 위험 모두 두 가지 종류의 신호를 줄 수 있기도 하다. 보상의 경우 취하면 잘했다는 피드백을 얻을 수 있지만, 취하지 못하게 되면 위험을 경고할 때와 같은 강렬한 경고를 경험할 수 있다. 위험 역시 회피하지 못하면 경고 신호가 증폭되지만, 성공적으로 회피하면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보상으로 여기는, 좋아하는(쾌한) 아군이어도 그에 관한 갈망이 너무 강해지면,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조급한(불쾌한)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실수하면 너무나도 소중한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한(불쾌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대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다. 즉 생존과 깊은 관련을 가진 위험 혹은 보상이 예측 혹은 통제를 벗어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통제 실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통제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응용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기에, 완벽한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그래서 크게 기대하지 않던 통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반복될 것이라고 예측하던 통제 실패가 단발성으로 끝날 수도 있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필연적인 환경에서 살고자 주변을 통제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측하지 못하는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통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마주했을 때 그것이 주는 충격을 적극적으로 줄이며 능동적으로 통제 동기를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잘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생존 기계가 통제 실패 혹은 성공으로부터 배워 다음 통제 시도를 성공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존 기계는 자신의 엉성한 예측, 통제 실력을 보완하고자, 자신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생성하고 이를 반영해 자신이 미래를 예측, 통제하는 방식을 수정해 나간다. 이러한 최신화는 생존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껏 보완한 예측 방식으로도 매번 잘 통제되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매번 상황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고 어떻게든 실패의 원인, 성공의 조건을 찾으려고 하다 보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 잘못된 결론에는 우리를 둘러싼 변수가 매번 변하기에 얼핏 보기에 비슷한 상황이어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상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 결론은 한 번의 경험으로부터 추출한 실패의 원인, 성공의 조건을 미래 예측에 있어서 고정값으로 둔다. 즉 하나의 실패와 그 원인에 해당하는 변수에 매몰되어, 다음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며, 애초에 그 변수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실패와 그 원인에 해당하는 변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다른 일에까지 확장하는, 어리석은 일과 같다.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관계에 관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기괴하게 섞은 모습으로서 관계를 비추는 색안경을 씌우게 된다. 이 색안경 때문에 우리는 관계 통제에 있어서 편견이 반영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성공과 실패를 오고 가는 관계 경험 끝에 섣불리 성공의 조건을 설정한다.
“내가 더 잘난 사람이었다면, 사람들로부터 기분 좋은 경험(관계 통제 성공)만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사람마다 상황마다 서로 상호작용한 결과가 좋아지기 위한 조건은 달라진다. 따라서 사실 어떤 방향으로 잘난 사람이 되던, 매번 기대한 만큼 대단한 결과를 남길 수는 없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일관적이지 않은 관계에 지쳐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친구도 뭣도 필요 없어. 아니 부질없어. 인간은 혼자 사는 거야.”
쌓인 관계 통제 실패 경험은 유전자에 새겨진 무리 생활에 관한 정보가 듬뿍 반영된 뇌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타인을 매력적인 보상으로 바라보고 반사적으로 다가가는 뇌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리며, 그 태도를 고치라고 조언하지만, 온갖 뇌 활동에 기본적인 방향이 되는, 아군을 ‘나’로 여기며 아끼는 태도를 뿌리부터 고치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학습을 담당하는 뇌는 나름의 타협을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무리 내 아군이 생존에 있어서 강력한 보상이라는, 뇌의 기본적인 작동 원칙을 지키면서도 관계 통제의 위험성을 반영하고자 아군의 범위를 좁혀버린다. 즉 고립된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며, 인간이란 원래 혼자 사는 것이라는 의식적인 해석을 하는 동안, 실제 뇌에서 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여전히 인간은 아군과 무리를 이뤄야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는 아군이라고 여길만한 이들이 거의 없구나.”
너무나 오랜 기간, 무리와 함께 살아온 우리는 무리 경험에서 실패를 겪으면서도 무리 생활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게 되기보단, 무리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스스로 고립된 인간, 즉 외로움에 깊이 빠진 이들에 관한 연구를 참고하며, 인간관계 통제 실패의 결과가 인간 자체를 혐오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외로움을 겪거나 타인을 만나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뇌여도 특정한 사람은 보상으로 처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외롭지 않거나 외향적인 사람이 낯설어도 호감이 느껴지는 이들을 바라볼 때 보상 회로의 일부분이 활성화되듯, 외롭거나 내향적인 뇌 역시 이미 깊은 관계를 형성한 이들을 바라볼 때 보상 회로의 일부가 활성화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외롭거나 내향적인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모든 타인과의 관계를 거북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얕은 관계를 가진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거북해할 뿐, 그들 역시 무리 동물로서 여전히 아군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 얕은 관계를 가진 타인을 보상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인지 변화가 이루어진다. 즉 얕은 관계를 가진 타인을 주로 보상이 아닌 위험으로서 여기게 된다. 따라서 관계 통제 시도를 포기하며 고립을 선택한 이들은 주로 자신이 위험(적)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적인 생각과 행동의 빈도가 높아진다. 외로움을 깊게 경험하는 이들의 세 가지 특징이 그들의 내부에서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움을 겪는 이들은 사회적인 정보에 민감하고, 정보를 부정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을 가지며 마지막으로 위험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는데, 이러한 경향은 결과적으로 낯선 타인을 적으로 여기거나 낯선 타인에게 공격성을 표출하게 하는데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설명하자면, 외로운 이들은 자신이 수용한 사회적인 정보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정보로서 여기며 잘 흘려듣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학습을 통해 보통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불확실성, 위험이 크다고 바라보기에 자신이 수용한 정보로부터 주로 위험에 관한 정보를 추출하고자 한다. 즉 이 두 가지 경향이 겹치며, 관계 통제 실패 경험을 깊이 학습한, 고립과 외로움을 선택한 이들은 주변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며 그렇게 처리한 정보를 주로 위험의 전조로서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보통의 사람이라면 흘려들었을 말을 세세하게 검토하며 그 안에서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가 될 만한 것을 기꺼이 찾아낸다.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이들은 인지한 위험에 관한 강력한 대응 동기를 갖는다. 그 결과 이들은 위험을 적극적으로 포착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포착한 위험에 충동적으로 대응하곤 한다. 즉 이들은 타인이 나를 험담한다고 섣부른 추측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에 관해 보복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이어지기 쉽다. 이처럼 외로운 이들이 갖는 공격성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요소에 관한 설명은, 무리 동물이 무리 생활을 부분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주로 아군의 범위를 줄이고 적군의 범위를 넓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일관적이지 않은 관계 때문에 관계의 일부를 포기하게 되면,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유지할 관계의 제한선을 계속해서 줄여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들은 여러 가지 조건을 통해 엄선한 소수의 관계를 제외하곤 아군이 아닌 적으로 두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밀어낸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새로운 이가 아군으로서 편입되는 일은 드물며, 또 새로운 유입을 통해 아군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는 일도 드물다. 반대로 기존의 아군이었던 자가 아군이 되기 위한 엄격한 기준에 통과하지 못해 퇴출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아군의 범위는 한층 더 좁아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타인이라는 생존 보상의 고갈을 경고하는 외로움은 더욱 강렬해지고 보상 통제 실패 경험 역시 더 학습된다. 결국 고립을 유발하는 예측 편향은 더욱 심해지게 되며, 이 모든 일의 근본적인 원인인, 아군의 범위를 과하게 줄이는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관계 통제 경험으로부터 씌워진 색안경은 우리를 곤란한 곳까지 인도할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인이라면 더욱 그렇게 될 위험에 처해져있다. 색안경은 다양한 관계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색이 빠질 수 있다. 즉 우리는 관계에 관한 경험을 이어나가며, 관계에 관한 섣부른 결론, 편견을 철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산업 환경에 적응하고자 자신이 가진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커리어에 투자해야 하는 현대인은 관계 통제 경험에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한다. 어쩌면 현대인이 더욱 고립되는 것은 무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보다 타인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던 조상들이 살던 환경과 달리, 자신의 직업에 쓰는 시간의 비율을 훨씬 높이는 것이 생존에 있어서 중요한 환경에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들은 과거에 비해 서로 물리적으로 더 떨어진 생활공간, 노동 공간, 생활 방식을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고립, 좁은 인간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결국 홀로 아파트에 살며 개인의 성공(커리어), 개인의 행복을 목표로 매일 바쁘게 사는 현대인은 자연스럽게 그 마음의 울타리까지 매우 좁아져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우리가 처한 환경, 그리고 우리가 관계로부터 겪는 극적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게 하거나 타인을 적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색안경을 자발적으로 쓰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의도적인 노력 없이 쉽게 얻을 수 없다. 아주 오랜 기간, 생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태도는 그 중요성을 고려해 봤을 때에도 그저 마음먹기를 통해 갑자기 변할 확률은 거의 없다. 타인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존과 관련 있기에 인간관계에 관한 태도는 생존과 관련된 여러 간접적인 믿음을 차근차근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보상과 위험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보상과 위험의 한 종류인 인간관계에 관한 통제 믿음은 관계를 잘 형성해하고 유지해 본 경험이 쌓아 형성할 수 있다. 각 경험으로부터 관계를 잘 형성하고 있다는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지향점이 명확해야 하며, 자신이 관성적으로 내리는 주관적인 판단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낙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결국 생존과 깊은 연관이 있는 위험, 보상에 관한 태도, 믿음을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하는 방법은 결국 지금까지 다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라면 결국 존속에 필요한 정도까지는 위험 혹은 보상을 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경험 해석을 쌓고 또 그런 해석을 할 만한 경험을 쌓고자 적극적으로 통제 시도를 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관성적인 해석 방식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지향점이 명확해야 하며, 낙관적인 믿음의 필요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위험이자 보상인 타인과의 관계, 무리생활에 관한 믿음, 태도를 형성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선 자신이 어떤 정보에 영향을 받아 관계에 관한 정보처리 및 의사결정을 하는지 의식적으로 인지하며, 관성을 깨고 새로운 해석을 쌓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세포 뭉치는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또 서로가 하나의 뭉치로서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협력의 결과가 긍정적일 것이라는 확신을 강하게 경험한다. 그래서 사회적인 정보, 기질,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관성, 상황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주관적인 의사결정이 편향되거나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잘 내리지 못하고 당연히 그러한 의사결정이 내려진 과정을 돌아봐야 한다는 판단 역시 잘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전혀 일관성 없는 의사결정을 쌓으면서도 매번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경험과 학습이 일관성 없게 이루어지며, 관계에 관한 태도도 우리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어 그렇게 친했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친구를 만날 여유가 없어서 인지, 갑자기 자신의 초라함이 느껴져서 친구가 날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 혹은 다른 친구나 인터넷으로부터 얻은, 언젠가는 깨질 관계의 특징이라는 정보와 그 친구와 자신의 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지금 특히나 외로워진 상태여서 관계에 관한 부정적인 편향이 강화돼서 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이처럼 온갖 정보를 처리하며 바쁜 뇌와 달리, 의식이 그러한 정보 하나하나에 접근하며, 자신의 의사결정 과정을 검토하는 일은 드물다. 다만 어째서인지 모를 거부감만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결국 그 거부감을 따라 의사결정 해야만 한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그 이유를 찾게 된다. 그렇게 나름의 근거를 확보한 의사결정에는 더욱 강한 확신이 생겼기고 결국에는 그 친구와 관계를 끊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그 내막을 잘 알지도 모르면서 확신에 차 의사결정을 한다. 게다가 이렇게 의사결정을 한 경험은 다음에도 그러한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해도 된다는 근거가 된다. 결국 이러한 경험이 계속해서 쌓이면서 관계 통제에 관한 일관성 없는 믿음, 태도가 형성된다. 따라서 의도적인 방향으로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확신에 차곤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반성하고 조절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의식적으로 자신의 관계에 관한 일관된 의사결정 논리, 태도를 형성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관계 통제 경험을 쌓는데도 도움이 된다. 관계에 관한 일관된 논리를 갖는다는 것은 즉 당신과 내가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규칙을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앞으로 둘이 펼쳐나갈 미래에 불확실성을 줄이는 행위는 믿음을 갖고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규칙을 만들 수도 없고,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을 어기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규칙이 존재하기에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할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내린, 일관적이지 않은 선택에 관해 책임질 수 있다. 이렇게 규칙을 어기고 믿음을 배신했지만 그것을 책임지는 일은 그 관계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히지 않도록 해줄 수도 있다. 따라서 그토록 중요한 보상이자 위험인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관성적으로 내리는 의사결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나름대로 논리적이고 일관적인 의사결정을 새롭게 내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그 과정도 모른 채 확신에 차서 내리는 의사결정을 검토하고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성향이다. 성향은 생존과 관련된 특정 대상, 예를 들며 타인과 같은 대상이 ‘나’의 생존에 줄 수 있는 잠재적인 영향력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생겨난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답은 없고 답을 만들 방법도 없기에 각자 그 영향력을 다르게 계산하게 되면서 성향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겉으로 보기엔 거의 비슷한, 모임에 나가 적극적으로 사교활동을 하는, 외향적으로 보이는 A와 B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 속을 보면 약간 다른데, A가 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외로움이 싫기 때문인 반면에 B가 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타인과의 얼굴을 맞대고 상호작용하면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맛있는 음식과 같은, 다른 종류의 보상을 취하면서 느끼는 보상 감각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다. 즉 A와 B 모두 타인과 무리 생활을 하는 것을 보상으로 바라보고 그 보상을 취하고자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만, A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보상을 얻지 못했을 때의 위험을 매우 크게 계산했기 때문이고 B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보상을 취했을 때의 결과를 과대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생존과 관련 있는 대부분의 대상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위험이 될 수도 있고 보상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마다 무언가를 보상 혹은 위험으로 여기는 이유가 다르다. 또 누군가는 너무 귀중한 보상이 손상될까 봐 그 보상을 마주할 때마다 불안과 같은 불쾌함을 겪을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걱정 없이 그저 기분 좋음만 만끽하는 등, 특정 대상(그리고 그 대상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손실과 이득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산하기에 보상과 위험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진다. 즉 이를 이해하고 보상 혹은 위험에 관한 복잡한 태도, 즉 자신의 성향을 바라보며 그 성향을 구성하는, 특정 대상에 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주관적인 보상-위험 계산 방식을 추적하다 보면, 자신의 성향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성향을 특정해 낸다면, 사회적인 정보 등의 영향을 더 크게 받으며 생겨난, 관성적인 타인과의 상호작용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향에 더 알맞은 교류 방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성향을 파악해 보니 그 성향이 환경과 과하게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며, 그 둘 사이의 합의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타고난 기질에 경험이 더해지며 만들어진다. 즉 생존 기계는 조상으로부터 기본적인 생존 지침서를 받고 태어나며, 살아가면서 그 지침서의 내용을 자신이 처한 환경에 더 알맞은 형태가 되도록 수정해 나간다. 그런데 무리 동물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새로운 구성원이자 잠재적인 생산 주체인, 조그마한 아이가 직접 자신의 몸과 생존 지침서를 가지고 거친 세상과 부딪혀가며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정식을 만드는, 매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는다. 반대로 아이 역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섣불리 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리 동물이 아이일 때부터 주변 환경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로 하는 일은 자신이 속한 무리로부터 환경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다.
즉 우리가 내리는 관계에 과한 의사결정 방식 또 그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관한 성향은 모두 사회적인 정보에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우리는 무리에서 정한, 특정한 관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작용 한다는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며, 자신이 마주한 관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사실 친구 관계, 연인 관계, 부모 자식 관계, 사제 관계, 직장 동료 관계, 선후배 관계 등에서 정해진 답이라는 것은 없다. 정해진 답이라는 것은, 우리가 관계의 형태 혹은 관계에서의 의사결정을 고민하면서 바라는 것은 결국 그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한 결과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미래로 향하게 되는 것을 얘기한다. 그러나 다시 얘기하지만, 온갖 변수의 난입이 펼쳐지는 실제 환경 안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번 긍정적인 미래로 향하기 위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리 동물은 자신과 무리의 번영을 위해 아주 오랫동안, 나름 괜찮은 것만 같은 방법을 적극적으로 공유해 왔다. 자신의 생존과 아주 밀접한 아군의 적극적인 추천과 자신이 직접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효율적인 측면에서의 이득, 그리고 다수가 따르는 것은 실제로도 나름 괜찮은 빈도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근거 삼아 우리는 상호작용 방식 역시 모방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방이 깊어지며 그것이 절대적인 답이라고 까지 여기게 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관계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기질, 경험 그리고 사회적인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각 요소는 우리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마주하도록 기여하는 것이 아님에도 매우 강렬한 확신을 동반하며 우리 의사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게다가 이러한 영향력이 생겨나고 그 힘을 행사하는 과정이 인지되는 것도 아니다. 또 그렇게 인지되지 않는 영향력을 따라 의사결정을 내려 본 경험은 다음에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어 의사결정에 관성이 생기도록 기여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관성을 긍정하게 되며,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된다. 그러나 관성에 관한 긍정, 굳은 신념과 태도는 예상과 다른 통제 실패를 마주하며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편향되어 갈 확률이 높다. 이러한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꾸로 추적하며, 기질, 경험, 사회적인 정보가 절대적인 이정표가 아닐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의식적인 판단을 더해 의사결정을 만들고 관성을 해쳐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적인 판단이 향할, 관계 통제에 있어서 지향점이란 무엇일까? 그 지향점은 보상 통제에서의 지향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 상호작용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절과 관계 실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계속해서 관계 통제(형성 및 유지) 시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실패와는 별개로, 장기적으로, 전반적으로 봤을 때 결국 관계가 통제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단편적으로 실패를 마주하던 성공을 마주하던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라는 변수의 영향력은 훼손하지 않고 키워주어야 한다. 즉 ‘나’라는 변수가 관계라는 보상의 통제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만 다른 조건을 붙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특히 자신과 자신의 선택이 관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근거를 관계를 맺은 상대방의 상대적으로 낮은 영향력에서 찾는 것은, 관계 통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조건을 두는 것과 같다. 즉 이와 같은 조건은 영향력이 낮은 상대와의 관계를 선호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처럼 특정 조건과 특정 관계 형태에만 매몰되게 되면, 불확실성이 넘치는 환경에 알맞게 대응하지 못할 확률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의 방향과도 맞지 않다. 사실 자신이 더 큰 영향력을 지닌 관계만을 선호한다고 해서 꼭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달리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에게만 쏟아 줘서 상대적으로 더 쉬운 관계처럼 보이는 반려 동물과의 관계, 그와 사실상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인간관계만을 맺는다고 해서 꼭 삶이 파멸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한 관계야 말로 자신의 영향력이 넘쳐나는, 행복한 미래만이 보장되는, 정답에 가까운 관계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자 나름의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개입할 정당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에 관한 의심이 생겼고 그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그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와 맞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하면서, 즉 삶이 늘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그러한 삶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게 또 의욕을 갖고 이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관계에 특정 조건을 두는 것은 곧 절대적인 기준을 두는 것과 같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바와 맞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 경험이 ‘나’로 인해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방향을 향하게 된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타인 역시 그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우선 인간에게 타인은 강력한 보상이자 위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교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은 보상에 가깝게 처리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나와 비슷한 영향력을 지닌 타인도 결국 나와 같이 관계를 보상으로 바라보며, 관계의 형성과 유지 그리고 그 안에서의 긍정적인 경험, 즉 궁극적으로 관계 통제를 추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무리 동물은 주변 이웃, 즉 같은 무리의 구성원처럼 보이는 이들이 자신의 생존에 끼칠 영향력을 알기에, 인간이라면 대부분이 일정 빈도 이상의 교류를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웃과 어느 정도는 잘 지내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타인과 자신이 관계에 있어서 바라는 바가 어느 정도는 같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그다지 비합리적이지 않다. 또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적어졌지만, 발전한 통신 기기와 교통수단을 통해 거리적인 제한 없이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된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더욱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의 커리어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느라 누군가와 교류할 시간 자체는 적어져서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 긴밀하게 지낼 사람을 엄선하곤 한다. 실제로 바쁜 현대인 대부분은 타인과 교류하며 보내는 시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 시간이 커리어와 관련된 이점, 혹은 생산성을 지니길 바란다, 그렇기에 교류에서 그러한 가치를 창출해 낼 사람을 엄선해 교류할 사람(친구)으로 삼는다. 이처럼 보다 확실한 가치가 창출되는 관계를 선호하다 보니, 현대인은 자신이 그러하듯, 인간이란 확실히 눈에 보이는 대가 때문에 관계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인의 믿음과 달리 사실은 누군가와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늘 잠재적(장기적)으로 가치 있고, 이 때문에 무리 동물은 교류한다. 조건, 눈에 보이는 가치에만 매몰되어 천천히 교류를 음미하지 못하게 된 현대인은 무리 동물이 본능적으로 교류 그 자체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계 통제, 교류의 조건을 줄이고 자신의 영향력만을 확인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 필요성을 인지했다면, 다시 우리가 지향하는 관계 통제감을 형성할 방법을 얘기해 보자. 자신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이와 함께 관계를 통제하면서도, 그 관계가 자신이 지향하는, 장기적인 관계로 통제될 것이라는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자신이 상호 간의 교류 그 자체를 보상으로 여긴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상호 간의 신뢰를 키우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통해 신뢰를 형성하거나 손상시키는 지를 알아야 한다. 무리 동물은 서로 동조하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함께 거친 환경을 함께 이겨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즉 관계 경험에 있어서 통제 성공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단이란, 자신의 제안에 관한 동조 혹은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조나 호혜다. 반대로 거절은 관계 통제 실패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히 상황에 따라서는 단발적인 거절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발적인 거절을 부풀려서 관계 통제 실패의 근거로서 여기지 않고,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상대방의 의도를 곡해하지 않아야 관계를 장기적으로 통제해 본 경험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단발적인 거절이 자동적으로 과소평가나 곡해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이 장기적인 영향력을 주는 정보로서 여겨지는 것을 막고자 거절 이후의 자신의 기분을 의식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생성된 정보를 반박하며 새로운 정보를 쌓음으로써 거절 경험이 관성을 형성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나’의 영향력에 관한 과소평가나 상대방의 의도에 관한 곡해를 막고자, 직접 서로를 보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확인할만한 신뢰 형성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그 자체만으로 전반적으로 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믿음, 그러한 방식의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동조나 호혜, 또 거부를 피하는 것에 특별한 조건이나 이유를 두지 않는 시도를 해볼 수 있다.
통제 실패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생존 기계는 신뢰 역시 완전무결하길 바란다. 그래서 매번 기대한 동조나 호혜가 이뤄지고 거부가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 동조나 호혜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을 설정하곤 한다. 예를 들어 동조나 호혜 횟수나 질에 있어서 상대방에 비해 우위를 점한다거나, 거부가 발생할 때 보상한다는 조건을 걸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뢰가 단발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는 일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조건을 걸며 신뢰를 형성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신뢰라는 것이 그러한 조건 없이도 형성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믿음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생존 기계가 관계를 통제하고자 관성적으로 하는 일에서 반대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다. 즉 관계에 관한 조건 없는 통제감,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조건을 제거하고, 필연적인 모난 부분을 마주하며, 그럼에도 잘만 유지(통제)되는 관계를 경험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는 거절이 전반적인 신뢰에 있어서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지니지 않는다는 내용을 학습할 수 있다. 단발적인 거절이 존재해도 서로가 서로를 보상으로 여기며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동기가 존재한다면, 관계는 결국 잘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조건이 필요 없다는 믿음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상으로 바라보기에 서로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베풀며 관계, 신뢰가 의도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보상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호혜와 배신 혹은 동조와 거절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불확실한, 관계라는 것을 호혜와 동조라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종종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와 나와의 관계를 평가해 보는 일을 한다. 즉 우리는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이 충분히 동조할만한 사람, 보상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자신 있게 불확실한 관계 형성 시도에 뛰어든다. 특히 우리가 목표로 하는, 동등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단편적인 실패가 존재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자발적으로 호혜와 동조를 이어나가는 관계를 위해서는 더욱 이러한 자신이 필요하다.
나의 존재가 보상이 되기에는 충분하다는 믿음을 갖고자, 최소한 자신의 존재 가치에 관한 지나치게 비관적인 정보를 줄여야 한다. 그러나 생존기계가 더 오래 살아남고자 흔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미래의 위험을 부지런히 예측해 현재의 안락함, 만족을 깨부수고 예측한 위험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주,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면 부정적인 미래를 마주할 것이라는 정보를 생성하고 수용하며, 더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 미리 더 많은 준비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말을 쉽게 실천하지 못한다.
자신의 부족함에 관한 단편적인 문제의식을 동기 삼아 더 오래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지신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 형성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소중한 자신의 삶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인지한 사실이 단편적인 문제의식을 마주하는 일의 반복으로부터 훼손되지 않도록 단편적인 문제의식이 다른 추가적인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면, 그것을 부지런히 반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동적인 예측 끝에 갑자기 지금에 비해 영어에 더 능숙해져야 한다는 위기감에 휩싸일 수 있다. 이 동기가 ‘부족한 자신은 영어라도 더 잘해야 그나마 쓸 만해진다.’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이 모든 일이 소중한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자신의 삶을 더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요소, 예를 들면 자산(자원)과 자신이 마주한 단편적인 문제의식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게 궁극적인 목표인 생존을 위해서는 자원 비축이 필요한데, 자원을 더 많이 비축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외국어 관련 능력을 개발하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논리를 정리하며, 자신이 마주한 단편적인 문제의식이 정확히 어떠한 맥락에서 나왔으며 삶에 있어서 정확히 어떤(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는지 인지하게 되면, 그 문제의식이 자신에 관한 다른 비관적인 정보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특히 현대인은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단편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발전한 자신을 칭찬하는 일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 기술의 진보를 좇느라 평생에 걸쳐 성장해야 할 현대인은 너무나 쉬워 보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보이는, 자기부정에서 벗어나 자신을 수용하는 일을 잘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을 삶의 기준으로서 두고 성장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일은,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마주하는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성장의 동기를 만드는 일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자신이 인지한 위기감, 문제의식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고민해야 하며, 그것의 심각성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줄이고 또 가끔은 자신의 노력과 그 결과를 칭찬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여러 가능성을 가진, 그래서 불확실한 인간관계에 기꺼이 뛰어들 용기와 자신의 선택에 관한 긍정을 유지할 인내심은 자신이 타인의 눈에 사랑받을만한 사람으로서 비칠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끝없는 성장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흔하다 보니 이러한 믿음은 부지런한 노력 없이 형성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부지런한 채찍질이 결국 간접적으로 자신의 관한 애정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사실을 자주 마주하려고 노력해야만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
자신을 진정 끔찍이 사랑한다면 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오랜 기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둘러싸여야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자주 또 하나의 나처럼 여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거절은 너무나 아프게 느껴진다. 그 아픔은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를 위한 존재는 피부로서 세상과 분리되는 ‘나’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관계를 포기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아픔의 원인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히고, 또 우리가 자주 ‘남’과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잊힌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관계에 관한 잘못된 결론에 빠져들고, 관계에 관한 자신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긍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아픔이 일시적이고 또 아주 단편적인 미래에 관한 예측만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 아픔이 ‘남’과 ‘나’를 섞으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의를 바꿀 정도로 강렬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의 존속이라는 목표는 매우 추상적이다. 피와 살로서 이루어진 세포 뭉치라는 물질, 유기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생존이라는 목표가 추상적이라는 것은 매우 새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벌과 개미는 ‘나’와 ‘우리’를 자주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게 넓어진 정체성은 ‘나’의 존속을 위한 선택지를 매우 다양하게 만든다. 그들은 피부로서 남과 구분되는, 자기라는 개체를 위해 살 수도 있고, 하나의 둥지에서 살아가는 무리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그중에서도 더 친밀한 친구를 위해 살 수도 있고, 무리의 우두머리를 위해 살 수도 있다. 이렇게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많아지기에, ‘나’의 존속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 된다.
또 다른 무리 생물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단순히 피부로서 세상과 분리되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울타리 안에 받아들인 이를 위해서 살아간다. 때로는 친구를 위해, 때로는 가족을 위해, 때로는 함께 일하는 이들을 위해, 때로는 반려동물을 위해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리라는 개념, 아군이라는 개념은 더 다양한 이들이나 더 다양한 기준을 품고 살아가게도 만든다. 때로는 자유를 위해, 때로는 평등을 위해, 때로는 돈을 위해, 때로는 신을 위해, 때로는 진리를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나’와 ‘우리’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오직 피부 안의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쉽고도 단조로운 일인가? 아마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렇게 ‘나’의 범위를 줄이면, ‘나’의 존속은 얼마나 짧아지게 되는가? 어쩌면 ‘나’와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생존기계가 자신의 엉성한 처지를 최대한 극복하고자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