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삶이 왜 헛 되다고 느꼈나요?
“지금의 자세로 쭉 걷다 보면, 노후에 무릎이 다 상해서 걷기 힘드실 것입니다.”
건강 검진을 받다가 우연히 신체가 불균형한 것을 발견하고, 결국에는 의사에게 이처럼 무서운 한 마디를 듣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답은 없다. 의사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 사람이 노후까지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 사람에 따라서 젊음을 즐겼다면 노후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고 정반대로 노후의 안락함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 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던 답은 없다.
옳은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나눈 삶에 관한 얘기는 이와 같다. 사실 답은 없고, 선택은 자유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저 말을 듣고 담담히 살아갈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나이가 들어보니 모든 게 덧없어. 지나간 젊음만이 후회되고 끝이 두려워.”
치열하게 살아간 끝에 어떤 의미도 못 느낀다는 무서운 한 마디를 가만히 듣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선택을 내렸다. 저 끔찍한 예언을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 내 삶을 기꺼이 쏟아붓겠다는 선택을 내렸다.
열심히 공부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 다시 괜찮은 학점을 받고 그걸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다시 열심히 산다. 일을 하며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운다. 아이는 다시 공부하다가 커서 일을 하고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다. 드디어 일을 관둘 때쯤 손자, 손녀가 공부하고 직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다시 짝을 만나 아이를 낳을 때쯤, 긴 삶, 반복이 끝난다. 모두가 너무 당연히 여기고 흔하게 따르게 되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이 지루한 반복 끝에 무언가는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권태로움을 인내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끝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의 고백을 듣고 다시 바라본, 삶의 방식은 텅 빈, 지루한 반복뿐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옛날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린 왕과 같은 얘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헛되고, 헛되도다. 허무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누가 정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기만투성이었다. 그런데 도움을 구하고자 더 나이가 든 이들에게 그 기만을 지적하면 삶이, 사람이, 세상이 ‘원래’ 그렇다며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삶에 관한 답을 찾는다는 철학도, 효율과 돈에 관한 고민을 하는 경영학도 답을 주지 못했다. 화가 난 상태로 찾은 성경이나 불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뜨거운 화를 차가운 냉소로서 표출하며 삭히게 될 때쯤, 완전히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부여된 ‘원래’를 없앨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없애며 삶을 이해하면, 기만의 출처와 대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에 관한 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호했던, 그 출처도 모를 원래를 조금씩 없애갈 수 있었다. 삶이란 원래 지루한 권태에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은 그 끝에 무언가 답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실은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따라 하면서 생존 확률을 높여왔다는 것이었다.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지침서를 따라 설계된 뇌는 시도 때도 없이 타인을 동조하고자 하고, 그 생존 지침서는 개인을 넘어 문화에 새겨지며 다시 동조 압박은 더욱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남을 따라야 한다는 느낌을 아주 강력하게 경험한다. 그 강렬한 느낌을 따라 ‘원래’나 ‘끝에 엄청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엉성한 이유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목표라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원래’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었고, 그것을 좇은 끝에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의 엄청난 보상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뇌와 문화의 작동 방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은 이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에 우쭐했다. 삶의 목표의 진상을 알고 그것을 부정한 자신이, 지적으로 더 우월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목표를 잃고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끼며, 점점 더 무기력해져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피곤하고 지쳐서 인 줄 알았지만, 14시간을 자고도 조는 자신의 모습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개인적으로 간과한 사실이란, 우리의 사고방식, 행동 방식이라는 것은 엉성하더라도 나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생물이란 원래 완벽히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아주 엉성한 방식으로 환경을 통제하고자 한다. 삶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엉성하게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엄청난 보상을 기대하며 열심히 삶의 목표를 좇는다. 존재하지 않는 보상을 기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 엉성한 목표라도 있기에 다음 사고와 행동을 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실행할 동기를 갖는다. 그래서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엉성한 동족을 비웃고 목표를 만들고 좇는 일을 완벽히 거부하게 된 결과, 삶의 이정표와 동기를 잃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생존 기계로서 한계를 가지고 엉성한 방법을 통해 어떻게든 존속하는 존재였다. 관점에 따라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그 존재에게는 계속해서 엉성한 생존 방법이 필요했다. 남들과 같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생존 기계에게는 여전히 삶의 목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연적인 허무함을 마주하게 만드는 삶의 의미, 목표의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일은, 단순히 그 진상을 파악하고 그 실체를 거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목표를 만드는 일까지 이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이 모든 일을 왜 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생존 기계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의 존속이다. 그리고 생존 기계는 지금 당장 마주한 목표의 성취를 통해 더 먼 미래의 일인 ‘나’의 존속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목표를 만들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확인할 수 없는 우리가 그 성취를 통해 미래까지의 존속을 보장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미래의 일을 지금 보장받고자 목표를 만들고 그 목표의 성취를 바라며 좇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존이고 삶의 목표가 그 목표에 기여하는 혹은 확인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면, 목표를 더욱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미래까지의 생존을 보장할 그 목표, 성취란 곧 생존에 영향을 주는 보상 그리고 위험에 관한 통제이다. 우리는 우리 생존에 이득을 주는 요소와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를 통제하거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더 먼 미래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 수 있다. 즉 목표란 보상과 위험에 관한 통제이다.
하지만 보상과 위험이 미래까지 완벽히 통제된다는 보장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엉성한 통제 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 속 다양한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목표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근거가 될 통제 실패를 겪게 된다. 그러나 엉성하지만 치열한 생존기계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를 수습하고자 한다. 최소한 다음에는 이러한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실패의 원인을 찾아 그 부분을 수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환경 속 다양한 변수를 놓치는 엉성한 정보 수집 능력으로 만든 엉성한 문제 분석 및 수정 대안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불확실하기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바라봐야 할 환경을 반대로 더 좁고 편향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기에 결과적으로 통제에 방해가 되곤 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통제나 완벽한 통제 방법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것은 존재할 수 없기에, 좇아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되지 않는 위험과 보상을 마주하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환경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도 환경을 계속해서 통제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 동기, 의지를 위해서는 지금 단편적인 실패를 겪어도 자신이라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위험과 보상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이 충분하다는 정보를 반복적으로 학습하며 위험과 보상에 관한 전반적인 통제감을 형성해야 한다.
한 가지 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지독한 무리 생물이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뇌는 누군가와 안정적으로 무리 지었을 때, 생존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강력한 보상을 손에 넣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타인관의 관계에 있어서 통제감 역시 학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과 다른 삶의 목표를 설정하며, 은근슬쩍 자신을 남과 다른 존재로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무리 짓는 일이라는, 아주 중요한 보상에 관한 통제를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영향력, 통제감을 기르는 일 또한 부지런히 해야 한다. 어쩌면 누군가와 무리를 짓고 그렇게 사랑하게 된 이들을 또 하나의 ‘나’로 여기며 그들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 진정으로 ‘나’의 존속을 하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나의 선택이자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서 설명해 봤다. 삶에 관해서 얘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모두가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원래’라는 이유든, 그 끝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보상을 기대하든, 목표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선택을 따라 살아간다면, 딱히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내가 찾은 나만의 선택을 강요하고 그들의 삶을 굳이 180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글로써 남긴 나의 선택이 모두에게 완전히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답을 잃고, 목표를 잃어서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같은 처지를 극복한 내용이 담긴 나의 글이 나름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고 읽으면서 의심이 느껴지던 길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처지에 누군가도 비슷한 일이, 최소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일이 생기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