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행복한 것이다.
목표가 없어져서 더 이상 명령을 받지 않는 기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차갑고 딱딱한 철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기계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뜨거운 피와 탄력 있는 세포로 이루어진 생존 기계 역시 목표를 잃게 되면 나아가지 못한다. 여기서 목표란, ‘나’라는 존재를 존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생존 기계에게 ‘나’란 피부라는 경계로 바깥세상과 분리되는 커다란 세포 뭉치를 뜻하거나 피부로 분리가 됨에도 서로의 신경 세포를 동기화시키려 노력하는 집단을 뜻한다. 생존 기계는 ‘나’를 존속시키고자, 미래를 그리며 여러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중에서 장기적인 존속에 도움이 되며 동시에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을 선택해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자주,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며, 당장의 목표를 의심하고 바꾸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목표를 설정하고 좇는 일 자체를 의심하게 되며, 더 이상 목표를 설정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생존 기계는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똑똑한 것만 같은 생존기계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보상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기대를 배신하는 결과를 마주하며, 자신의 목표는 실패했다고 해석한다. 그 무지막지한 보상의 정체란, 불확실성의 완벽한 통제이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그러한 능력을 보상으로서 얻게 된다면 장기적인 존속이란 궁극적인 목표는 너무나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보상은 현실적이지 않아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 매력적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불가능한 목표를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번에 이러한 거짓말에 깊숙이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복잡한 단계를 거치며 매력적인 거짓말에 서서히 빠져든다. 더 장기적인 존속을 위해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그 먼 미래까지의 계획을 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모아둔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때 다양한 종류의 정보가 활용되는데,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생존과 직결되는 불확실성(환경, 주변 변수) 통제에 관한 정보다. 우리는 살고자 매 순간 주변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 변화와 자신의 행동이 상호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생존의 이익이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끔 노력한다. 즉 미래(주변 환경) 통제를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오래 살아남고자 이러한 통제 경험의 성공 혹은 실패의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그것을 다음 통제 시도에 반영하고자 한다. 때문에 생존 기계는 자연스럽게, 불확실성(미래, 환경) 통제 성공 혹은 실패와 관련된 다양한 변수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전의 정보를 반영한 통제 시도가 매번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마주한 생존 기계는 생존을 위해 더 이상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자, 자신이 이전에 만든 통제 조건과 실패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꿔야 한다. 하지만 애초에 생존 기계의 인과관계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 생존 기계는 감각 기관의 한계 등으로 다양한 변수에 관한 정보를 놓칠 수밖에 없기에 인과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에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너무나도 치열하게 일하는 생존 기계는 이러한 사실에도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파악한 정보만으로도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마주하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사실 인과관계 분석은 자주 실제 인과와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생존을 위해 통제 실패를 극복하고자 어떻게든 짜낸 통제에 관한 인과 관계는 서서히 이상한 방향으로 편향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통제 실패 혹은 성공에 관한 인과관계는 점점 좁아진다. 즉 우리는 점점 더 (통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생각에서 멀어져 A, B, C, D를 하면 (통제)되고 E, F, G, H를 하면 안 되는 게 삶이라는 정보에 휩싸이게 된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로도 포기하지 않고 생존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통제해 내겠다는 열정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에 적용되고 결국 미래 목표에 반영된다. 우리 안의 어떤 합리성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반영되는 것을 막을 것만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나온 주장을 낮은 신뢰를 갖고 바라보며 때문에 그 주장을 꼼꼼히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거의 ‘나’에 가까운 아주 가까운 지인의 주장은 이미 신뢰가 깊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냥 수용한다. 우리 안의 세포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소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세포 뭉치의 통제의 인과관계, 미래 통제에 관한 주장은 다른 세포 뭉치에게 있어서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또 다른 ‘나’의 주장이기에 쉽게 수용된다. 이처럼 사실 불확실성의 통제란 단순히 매력적인 보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나의 뜨거운 끈기가 담긴 주장이기에 수용된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끈기와 열정이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메타적인 인지와 방향에 관한 고려가 없는 끈기와 열정은 자주 안 좋은 결말로 이어진다.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마주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실패에 굴복하고 이 길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거나 실패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잘못된 길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표를 만들고 추구한다는 행위는 처음 의도와 달리 더 이상 존속에 기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몇몇 생존 기계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다시 작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다. 이전과 달리 존속에 기여하고, 존속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조건(보상)을 두지 않는 목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수용하는 정보가 제한적이기에 매번 미래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존속을 위해서는 생존에 있어서 기본적인 활동인, 통제 시도가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통제 시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 통제 시도를 할 동기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기대와 달랐고, 그럼에도 오히려 그 현실을 어떻게든 기대에 맞춰 해석하려 하다 보니 잘못된 목표가 생겼다. 개인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이처럼 통제 시도 결과에 매번 집착하는 방법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결과를 마주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통제 시도를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존속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믿음)를 통해 통제 시도를 이어나갈 동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통제 시도를 포함한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다. 보통 그 통제 시도의 동기란 해당 통제 시도가 의도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성공에 관한 확신이다. 생존 기계는 자체 생산한 확신(성공한 미래)을 한 발 앞서 경험했기에 기꺼이 불확실함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그런데 이처럼 생존 기계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 결과가 곧 자신이 환경을 충분히 통제해 낼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생존 기계가 궁극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 여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환경을 통제해 더 긴 기간 존속할 수 있다는 근거다.
그렇다고 한다면, 꼭 모든 통제 시도에서 성공을 찾을 필요는 없다.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해당 통제 시도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따라서 사실은 성공 혹은 실패라는 결과를 직접 통제에 관한 복잡한 분석에 직접 반영할 필요는 없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자신이 충분한 영향력을 갖고 환경을 통제했음에도, 아주 우연한 변수가 출현해 통제를 실패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실패라는 결과를 직접 통제에 관한 부정적인 피드백으로서 활용하면 사실과 다른 분석을 할 확률이 매우 높다. 게다가 사실상 매번 의도한 방향으로 결과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자주 예상치 못한 실패에 노출된다. 이를 직접, 자신이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는 근거로서 받아들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통제를 시도하고자 하는 동기 역시 점점 작아져갈 것이다. 결국 그 생존 기계는 근본적인 생존 활동의 빈도를 줄이며, 잘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더욱,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통제 시도의 내용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환경을 통제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통제 시도와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활동에 동기가 된다면, 애초에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환경을 통제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직접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목표이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통제를 시도하고 그 통제 시도를 분석하는 일의 반복 속에서도 꿋꿋이 살고자 통제 시도를 이어나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 우리는 자신이 환경을 통제해 더 긴 기간 존속할 수 있다는 믿음을 먹고 한 발자국 나아가고 다시 그 믿음을 먹고 한 발자국 나아가는 일을 반복하며, 삶을 연장한다. 마치 먹고 사냥하고 먹고 사냥하고를 반복하며 수명을 연장하는 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온갖 상호작용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자기 자신이 멈추는 것을 방지하고자 할 수 있는 일은 그 믿음을 자가 생산하는 것이다. 다만 근거 없는 낙관성과 자만은 오히려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에 지금까지 그것이 필요한 논리를 정확히 마주하고자 노력한 것이며, 꼭 좋은 결과만을 마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마주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더 오랫동안 존속하고자 지금보다 더 잘 살고자 한다. 그런데 더 잘 사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놓치는 것이 있다. 더 오랫동안 존속하기 위해서는 사실 그 목표를 향한 의지나 동기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의지나 동기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환경을 잘 통제하고 있음으로 더 오랜 존속을 향해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나온다. 물론 더 잘 사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성취가 그러한 믿음을 형성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지만, 매번 의도한 성취를 손에 넣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다른 방법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식)는 직접 통제 과정에 개입해, 의도치 않는 결과를 마주하면서도 다른 뇌 세포 뭉치에게 그럼에도 잘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장의 결과에 관한 확신이 아니라,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믿음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생존 기계는 생존을 이어나가고자 두 가지 대상을 예측하고 통제하고자 한다. 바로 위험과 보상이다. 두 대상을 향한 통제 과정에서도 역시 보통은 결과를 의도한 방향으로 통제하려 하는 억지를 부리게 되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된다. 위험 통제의 경우, 위험 통제 실패는 생존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실패를 극복하고자 실패의 인과를 찾게 되는데 그렇게 억지로 만든 인과는 보통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사실 위험이든 보상이든 애초에 제한된 정보를 활용한 주관적인 계산을 통해서 예측된다. 그렇게 마음에서 만들어진 위험과 보상에 의도한 결과를 마주해야 한다는 집착이 더해지며, 우리는 매번 우리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위험에 끌려 다니게 된다. 게다가 위험에 끌려 다니던 경험은 학습되어 우리가 더욱 위험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위험 예측만을 반복하며 위험을 더욱 민감하게 예측하도록 편향된 편도체는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위험 출현의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더욱 민감하게 읽도록 만든다. 우물 안에서 한정된 시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개구리와 같이 실제로 스스로가 시야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늘 사방에 가상의 위험을 그려놓다 보면, 그 절망적인 세상에 지치고 좌절하게 되거나 이 세상을 한 번에 바꿔놓을 극단적인 탈출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위험에 끌려 다닌 결과는 이와 같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겁에 잔뜩 질린 이가 예측한 세상과 실제 세상은 자주 일치하지 않고 특히 안전한 현대 세상에선 더욱 일치하지 않기에 과한 조심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문제를 반대로 풀어나가다 보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무기력함과 특정 가치에 관한 과한 매몰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을 과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마음에 비친 세상이 절망적인 형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위험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위험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험을 과하게 예측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며, 또 무엇보다 모든 위험을 완벽히 통제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몇몇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위험을 완벽히 통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위험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곧 장기적인 생존을 확보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더 나은 삶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을 고쳐야 한다. 위험을 정복한, 더 나은 삶은 실재하지 않는 목표라는 것을 알고, 위험이 통제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장기적인 생존을 확보하고자 필요한 것은 생존을 향해 통제 시도를 계속 이어나갈 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위험을 당장 통제할 순 없어도 결국 장기적인 생존이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위험 통제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에 관한 믿음을 키움으로서 의도치 않은 실패를 겪어도 그 실패가 주는 충격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을 기르기 위해서는 위험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생존 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이 위험을 충분히 통제해 낼 수 있다는 정보를 학습해야 한다. 또 적극적으로 위험 통제 상황에 노출되고 결과를 끝까지 책임져보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위험에 관한 전반적인 통제감을 기를 수 있다.
이처럼 온갖 위험과 그 위험을 경고하는 뇌의 일부의 잦은 경고는 자주, 우리가 꼭 쥔 삶의 고삐를 빼앗는다. 고삐를 빼앗기고 의도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우리는 금세 더 나아갈 동기까지 잃게 된다. 살아갈 동기를 찾기 위해서는, 거친 경고 속에서도 고삐를 놓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무엇보다 고삐를 되찾았다면 다시 그 고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한 동기를 조절해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인 장기적인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한 필수적인 중간 목표는 끝까지 가기 위한 동기를 직접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기르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는 믿음과 동기는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상의 예측과 통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눈앞에 그려놓은 보상을 손에 넣고자 매번 보상에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생존에 기여할 정도의 보상은 자신의 결국 통제 하 놓일 것이라는 믿음 자체를 기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현대 시대에서는 더욱, 보상을 손에 넣는다는 목표에만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위험과 달리, 몇몇 보상은 실제로 거의 매번 통제가 가능하다. 그 결과, 손쉽게 통제되는 보상에만 집착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보상 통제 역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위험 통제와 같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저번 글에 이어서 이번 글에서는 보상 통제의 필요성과 방법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보상으로 여기는 대상에 관해 먼저 다루고 넘어가고자 한다. 보상은 말 그대로 생존에 있어서 이득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환경에 따라, 또 자신의 상태에 따라 보상은 유동적이다. 예를 들어 염분이 충분한 상태에서 염분을 섭취하면 보상 회로 속 일부 부위에서 오피오이드(암묵적인 쾌락 경험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신경전달물질)가 분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염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염분을 섭취하게 되면 오피오이드가 분비된다. 그때의 염분을 섭취한 피험자는 마치 설탕을 섭취해 만족스러워하는 피험자처럼 혀를 날름거린다. 이처럼 보상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사회적인 동물은 직접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고도 보상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한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저 무리 속 다른 이에게 물어보면 된다. 한편 그래서 다른 이에게 들은 정보를 참고하는 것 자체가 생존에 도움이 되기에 사회적인 정보에 충실한 것 자체가 보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보상 판단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정보가 큰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같은 무리 구성원과 보상에 관한 기준을 공유하는 행위는 주변 환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서로가 같은 기준을 믿는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서로가 같은 무리이자 아군임을 확인할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약한 무리 동물은 무리로부터 버림받지 않고자 무리 속 다른 구성원, 특히 무리에서 한 사람 이상의 기여를 하는 어른의 무리(주류)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가 생존에 있어서 이득, 즉 보상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사회적인 정보는 우리가 보상에 관한 정보 처리를 함에 있어서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정보 중 하나다. 사회적인 기준은 보상을 규정하는 테두리가 되며,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우리는 그 테두리에 따르는 행위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무리 동물에게 있어서 가장 흔하고도 강력한 보상은 바로 주변이 주는 긍정적인 피드백이다.
이 때문에 무리 동물에게 있어서 보상의 범위에 관한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진다. 긍정적인 피드백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단도 보상이 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실제로 시장에는 상품화된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단이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상품 중 하나가 성장의 경험이다. 성장의 경험은 그 자체가 긍정적인 피드백이지만, 성장의 경험을 파는 대부분의 상품은 그 경험을 타인과 공유되도록 만드는 것까지 신경 써서 설계된다. 설계를 따라 성장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면 우리가 가장 달콤하게 여기는, 타인으로부터 얻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게 된다. 예를 들면, 게임에서 성장을 위한 수단을 구매한 이는 굳이 눈에 띄는 순위 창에 들어가 타인과 성장의 정도를 비교하게 되고, 여행을 통해 경험의 확장이자 성장을 한 이는 SNS 업로드 이벤트도 할 겸, 굳이 그 여행 경험을 사진으로 포착해 타인과 공유하게 된다. 이는 해당 상품이 궁극적으로 주변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누리기 위함이란 것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우리는 부러워, 좋겠어, 잘했어, 대단해 등의 피드백을 얻는 것에 대단한 가치를 두고 그러한 피드백을 얻고자 몇몇 상품을 소비한다. 반대로 몇몇 상품이 궁극적으로 파는 것은 그 상품을 소비함을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얻는 긍정적인 피드백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명시적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얻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그토록 달콤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보상 회로나 도파민에 관한 짧은 지식을 주워들은 똑똑한 현대인은 눈에 보이는 설탕 덩어리를 입에 넣는 일을 능히 조절할 수 있음에도 그보다 더 달콤한 긍정적인 피드백은 끊임없이 입에 넣는다. 애초에 다수가 주는 피드백, 다수의 여론, 대중의 의견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매번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이 무엇을 보상으로 여기고 추구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통해 보상을 경험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보상을 받았다는 모호한 정보만을 착실히 쌓아간다.
자신이 추구하는 보상의 실체를 뚫어보지 못한 현대인은 이처럼 마케팅과 여론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이 정한 보상의 기준, 행복에 기준에만 끌려 다니게 된다. 하지만 소비, 투자라는 선택 자체는 자신이 내리는 것이기에, 애초에 자신이 그 영향에 끌려 다니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오히려 눈에 보이는 사실을 통해 자신이 보상, 행복을 통제(자율적인 선택)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더욱 현대인은 보기에는 자신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영향 아래에 있는 선택의 반복을 멈출 수 없다. 현대인은 자신이 보상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감각에 매우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 대부분은 자신의 보상에 관한 자율성(통제감)이 손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믿음은 어렸을 때부터 서서히 형성된다. 직장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어린아이조차 직장인의 삶을 상상하며 일과 상사, 거래처에 찌들어 자율성이 고갈된 삶을 떠올린다. 이를 통해 사회적인 동물이 사회적인 정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다시 한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시, 우리 대부분이 보상 경험을 뇌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 무언가로부터 보상, 행복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즉 인과를 추적하기 어려운 보상을 얻은 경험을 통해, 보상의 통제는 외부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어린아이조차 이러한 교육을 받기에 직장이란 곳이 보상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보상에 관한 자율성은 곧 내가 직접 선택한 보상으로부터 느껴진다. 우리는 이를 흥미나 내재적인 보상 등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뇌를 촬영해 봐도 흥미, 내재적 보상이란 개념은 대리감(자율성, 통제감)을 처리하는 뇌의 일부와 보상 회로가 동시에 활성화되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흥미가 뇌에서 생겨나는 일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고 또 그렇기에 자신이 흥미라는 감각의 경험을 조절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흥미에 관한 주도권을 놓치고, 흥미를 조절되지 않는 개념으로 여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마치 자신이 특정 대상과 태생적으로 짝지어져 있으며, 그 대상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 대상으로부터만 흥미를 느낄 수 있기에 그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아니 교육 현장에서 공유된다. 아이들은 어른의 입을 통해 흥미란 숨겨져 있으며, 찾아내야 하는 대상이라고 배운다. 또 더 나아가 그 흥미를 찾아서 그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아야만,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직장에서 삭막함이 아니라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배운다. 살면서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비율적으로 가장 많기에 직장 생활을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곧 삶 자체를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흥미를 찾아내는 것은 삶의 의미이자 목적 중 하나인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그러나 흥미의 실체를 모르면서, 무작정 대리감과 보상 회로의 활성화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대리감은 자기 효능감과 유사한, 환경 통제에 관한 감각이기에 자기 효능감과 보상 회로 활성화의 조합으로도 흥미와 유사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흥미를 쉽게 느낄 수 있는 상황 중 하나가 자신의 능력에 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느낄 수 있는 경쟁에서의 승리이다. 실제로 흥미 유발 교육에서 많이 쓰이는 장치가 아이들로 하여금 승리의 경험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번 승리 경험만을 반복할 수는 없다. 경쟁에서는 필연적으로 패배 경험을 하는 이가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패배한 아이는 부정적인 피드백과 함께 해당 경쟁 내용에 관한 흥미를 유지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매번 1등을 하는 아이 또한 속이 편한 것은 아니다. 경쟁 상황에 빠지게 되면, 무리 동물은 자신이 적군으로 둘러싸인 환경에 있다고 인지하게 된다. 그렇게 환경이 위험하다고(불확실성, 변수가 넘친다고) 인지하게 되면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 훼손되며. 자기 효능감을 유지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는 오래가지 못한 흥미 경험을 통해, 그 경쟁에 내용에선 자신이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문제는 이렇게 대다수가 흥미를 잃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흥미를 느끼겠다는 소수가 흥미를 잃은 것이 주류가 되어버린 분위기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만의 흥미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다수에게 철이 없거나, 열정만 앞선다거나, 공부를 포기했냐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은근히 받게 된다. 이러한 피드백을 버티면서 자기만의 길을 걸을 이는 거의 없다.
흥미에 관한 가능성을 열어뒀거나, 혹은 그 어려운 환경을 뚫고 흥미와 직업 생활을 일치시킨 이들 역시 막상 일을 하다 보면 흥미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이와 협동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성과를 비교하게 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원치 않아도 따라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비교와 원치 않는 복종은 자기 효능감, 자율성, 대리감 등을 훼손시키고 흥미를 훼손시킨다. 이처럼 직장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직장 생활은 보상은 있지만, 자율성은 없기에 흥미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결국 이렇게 직장 생황에서 흥미를 찾는 이는 거의 멸종하게 된다.
직장 생활에서 흥미와 자율성, 그리고 행복을 찾지 못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해당 요소가 부족해 시들어 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보상에 관한 경험으로 여가 시간을 꽉 채우는 일에 집착한다. 그러나 보상을 선택하는 일 자체가 자율성과 보상 감각을 줘서 잠시, 흥미, 자율성과 같은 경험을 느끼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거나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또 다른 일이다. 여가 생활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못해 오히려 특정 여가 생활에 관한 효능감과 흥미가 깎일 수도 있고, 특정 여가 생활에 적응되어 더 이상 보상 감각을 느끼지 못해 흥미가 떨어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각 감각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며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결국 불안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과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다. 특정 여가 생활, 소비에 매몰(중독)되거나, 여러 종류의 여가 생활, 소비 사이를 방황하거나, 자신은 애초에 행복이나 흥미를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과 함께 좌절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행복이라는 감각에 관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나온다. 행복이라는 주관적인 단어는 불안이라는 주관적인 단어와 같이, 쾌함이라는 감각이 느껴지는 동안의 모든 일을 포함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 의미 자체가 넓고 제각각이다. 이 쾌함이라는 감각은 보상을 주관적으로 예측하고 통제하고자 노력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 어쨌든 보상, 쾌함이라는 감각은 그 통제 시도의 시작이 될 외부 단서가 필요하긴 해도 주관적인 정보 처리 과정을 통해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쾌함은 아이스크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에 관한 정보를 받은 뇌의 일부인 보상 회로가 그 정보를 가공하고 의식을 포함하는 다른 뇌 부위에게 전달하며 인지되는 것이다. 마치 흥미에 관한 오해와 같이 우리가 태생적으로 어떤 대상을 마주하면 행복을 느끼도록 짝지어진 상태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기질과 쌓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하는지도 모를 행복을 주는 대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한 채로 스스로가 어떻게 보상 감각을 조절할지를 더욱 고민해야 한다.
먼저 그 구체적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뇌가 보상을 처리하는 과정을 다뤄보자. 뇌는 생존에 필요한 보상을 확보하고자,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상 출현의 단서를 포착한다. 그렇게 예측한 보상이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되면, 효율과 가능성을 고려해 해당 보상을 취하는 경우의 수 중 하나를 고르게 된다. 그렇게 선택한 목표(계획)를 실행하기 위한 다양한 신호(명령)가 만들어지고, 이때 가끔 의식은 그 신호의 일부를 의식하며 흥분, 기대, 긴장 등을 경험하게 된다. 보상 통제 시도가 이루어진 후에는 경우의 수가 실현되었는지를 평가하며, 통제 성공 여부를 평가하게 된다. 또 보상 통제 성공 혹은 실패라는 결과에 영향을 준 변수를 분석하며, 다음 보상 예측 및 통제에 반영할 정보를 생성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생명체는 보상을 통제하고 생존을 이어나간다.
위험 통제의 결과를 분석하는 기능과 같이 보상 통제의 결과를 분석하는 기능에게는 다음번에 보상의 통제를 성공하는 것이 생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성공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할 대상이며 실패는 무조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열정적이지만 부자연스러운 목표 때문에 몇 가지 문제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예상치 못한 여러 변수와 그들의 상호작용에 노출되다 보면 원하는 보상을 손에 넣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지난번에는 보상이었던 무언가가 상황이 변하며 더 이상 보상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처럼 보상과 보상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일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통제 실패조차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원인을 억지로 추적하다 보면, 잘못된 결론을 낼 가능성이 크다. 먼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이 처한 환경의 통제 난이도에 비해서 자신의 통제 능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이 쌓이게 되면,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해당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을 무언가가 나타날 때까지는 최대한 아무것도 시도하지 말자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상 통제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학습하게 되면, 무기력해지거나 특정 조건에서 과하게 충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또 한편 보상 통제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갖는 특정 조건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정보가 쌓이면, 특정 변수에 매몰되어 다양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특정 변수에 관한 충동성이 형성될 수도 있다. 혹은 여러 변수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게 될 수도 있다.
한편 보상 통제 성공의 조건을 억지로 분석하려는 시도 역시 삶을 이어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가 쌓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특히 현대 환경에서는 많은 이들이 보상 통제와 관련된 정보처리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하고자 한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보상을 통제해 기꺼이 손에 넣었다는 감각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다 보면, 누군가가 의도한 방향으로 성공에 관한 분석을 쌓으며 편향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보상 통제 성공에 관한 정보와 동반되는 기분 좋음을 경험하며, 손에 넣어진 보상과 그 보상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상 통제 성공과 쉽게 엮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겪은) 환경이라면, 해당 보상은 반복적으로 취할수록 고갈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뇌는 그것이 고갈되기 전에 우리가 다른 자원을 찾도록 해당 보상을 계속해서 취할 때의 리스크를 더욱 부각해 보상에 관한 정보 처리를 진행한다. 그렇게 우리는 특정 보상에 적응되고 질려 다른 보상을 찾게 될 것이고, 그렇게 행복(보상 통제 성공)과 해당 보상을 엮는 일 역시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은 이러한 적응을 극복할 방법을 파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방법을 응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고자 한다. 가장 매력적인 보상인 주변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응용하거나, 우리 뇌가 기회가 되면 일단 무조건 취하고자 하는 몇몇 보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과거와 다른, 이러한 환경에 노출되며 우리는 보상 통제 성공의 원인을 특정 변수, 특정 보상에서 찾는 일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 결과, 중독은 의식적인 행복의 조건처럼 꾸며지며 누군가의 삶의 지향점이 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 성공과 실패의 변수가 유동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럼에도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자신에 의해 통제된다는 믿음을 형성해야 한다. 즉 매번 보상을 손에 넣을 방법, 행복할 방법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보상, 행복의 단발적인 통제 여부와 관련 없이,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통제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 보상과 행복에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능히 그것을 결국엔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천천히 현명한 선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에 상관없이 보상 통제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이 크다는 정보를 쌓는 일을 반복해 믿음, 태도를 해야 한다. 계속해서 다뤄온 셀리그먼의 낙관주의 학습법이 이를 위한 방법으로서 유효할 것이다.
보상에 관한 자신의 통제감을 기르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이 직접 보상을 통제해 보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 흥미의 구성 요소인 보상 감각을 발굴하고 통제감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해당 방법은 직접 흥미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기도 한다. 즉 우리는 직접 흥미를 발굴해 나가는 경험, 한 분야의 애호가, 전문가가 되어가는 경험을 통해 보상에 관한 통제감을 기를 수 있다. 앞서 다뤘듯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이들은 우리가 특정 자극으로부터 행복, 흥미를 느끼도록 설계된 상태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과 달리 실제로 한 분야에서 계속해서 흥미를 유지하는, 애호가들은 운이 좋게 운명의 짝을 만나서 흥미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 가장 처음 시작지점에서 해당 분야의 애호가들이 갖는 감각은 해당 분야를 그냥 지나쳐버린 어떤 이가 느끼는 호기심에 가까운 기대, 흥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금세 호기심이 고갈되어 그 분야를 떠난 이와 달리 애호가들은 그 흥미의 씨앗을 꾸준히 길렀다.
호기심이 있던 분야에 끈질기게 매달리며, 그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성을 기르는 일은 마치 그 분야에 숨겨져 있던 엄청난 보상을 발굴하는 일과 같다. 우선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성을 기르는 일은 자기 효능감을 키워 해당 분야에 관한 통제감을 기른다. 해당 분야에 흥미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게다가 전문성을 기르는 일은 보상을 확장시켜주기도 한다.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성을 습득하면, 해당 분야를 이루는 요소와 그 요소의 상관관계를 더욱 깊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파악하는 정보가 확장됨으로써 보상으로 느껴질 만한 자극을 파악하는 경우도 더 늘어나게 된다. 음악 분야로 예를 들면, 들어서 단순히 좋거나 신난다는 초보자의 경험과 달리 특정 악기, 구성, 해당 음악의 역사 등을 파악하고 더 풍부한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습득한 전문성은 주변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며, 보상으로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 꾸준히 전문성을 기르는 일은 통제감을 기르고 더 많은 보상을 경험하는데 기여한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보상의 단서를 풍부하게 포착할 수 없던 한 분야에 빠져들어 자신의 노력으로 직접 해당 분야에서 보상을 이끌어낸 경험은 자신의 행동 혹은 노력이 보상을 통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정보가 쌓이도록 해준다. 이러한 정보를 쌓아 보상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함으로써 보상을 얻고자 특정 외부 조건이나 변수에 끌려다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물론 당연히 이는 여가 생활뿐만이 아니라 직장 생활에서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살기 위해서는 삶에 필요한 것을 얻는 행위에 관한 동기를 얻고자 자신이 보상을 통제해 낼 수 있다는 감각(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감각(믿음)은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거나 저절로 옳은 방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통제감은 자주 이상한 방향으로 편향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일을 겪으며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선 행복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학습 과정에 개입해, 통제에 관련된 정보가 어떠한 방향으로 쌓였는지 확인하고 조절해야 한다. 또 한 분야에서 성장하고 흥미를 형성하며, 직접 보상을 발굴해 본 경험을 쌓아, 보상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실체가 뭔지도 모르는 행복에게 그 무엇보다도 값진 우리의 삶의 고삐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위험이자 보상이며 또 통제감 형성이라는 삶의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소외되기 쉬운 보상인, 인간관계에 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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