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에 관한 과학은 우리가 겪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범인이 의식되지 않은 뇌의 활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영혼과 그것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라는 것을 믿도록 만드는 다양한 초자연적인 경험 또한 사실 의식 밖에서 처리되는 정보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은 우리가 현상을 설명하고자 임의로 만들어놨던 영혼이라는 개념을 지우고, 그 빈 곳을 뇌의 작동원리에 관한 다양한 근거로 채워놓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심리학자나 과학자들도 우리가 좇아야 할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사리 부정하지 못한다. 어쨌든 믿음을 갖고 의미를 좇는 것이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에 이득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사실과 다른 믿음이 주는 혜택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몸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리벳의 연구를 얕게 해석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는 의식의 역할을 더 좁게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논리를 따라 의식이 만들어낸 삶의 의미 또한 크게 의미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당시에는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결론과 함께 삶의 의미를 찾던 과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매달렸던 삶의 과제를 드디어 마무리했다는 기쁨도 잠시, 이윽고 지독한 회의감과 무기력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다는 의식적인 생각은 모든 동기를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삶 전체의 걸쳐 좇을 무언가가 없어지자, 당장 내일 새롭게 해가 뜨고 난 뒤에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무기력함이 기분을 지배했고, 뒤돌아서면 졸렸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 밖에 나가 산책을 하려고 해 봐도 금방 잠이 와 벤치에 기대어 졸았다. 그렇게 하루 14시간이 넘게 자고 그나마 깨어 있으면 꾸벅꾸벅 조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갑자기 삶의 의미를 부정하며 자신의 모든 동기를 지우고 자신을 무기력함에 가두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결국 그래서 다시 한번 성급한 결론과 함께 지워버렸던 삶의 의미라는 것이 해오던 일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삶의 의미라는 것을 형성하는 뇌의 정보 처리 과정과 특히 그중 하나인 예측과 학습을 살펴봐야 한다.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뇌의 활동이 겹치면서, 삶의 의미가 형성된다. 우선 의식적인 정보처리나 소유 감각, 대리감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또 예측과 학습 그리고 인지되는 감정은 마치 우리 삶에 꼭 좇아야 할 정답이라는 것이 있다는 추측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사회적인 뇌는 틈만 나면 내집단에 속한 타인의 뇌를 모방하는데, 그 모방은 감정을 포함한 타인의 주관적인 정신경험을 나의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옮겨놓는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이 사회적인 뇌가 영혼과 지향할 바에 관한 경험 역시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영혼을 가졌으며 같은 지향점을 가졌다는 추측을 만든다. 이러한 추측은 인간이 집단을 형성하는 경향과 만나 문화나 사상의 형태가 되고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사회적인 동물은 공통된 무언가를 근거 삼아 같은 집단이 되는데, 이때 관측가능한 공통점을 근거로 삼기보다는 영혼과 같은 추상적인 경험의 공유를 근거로 삼게 되면서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더 크고 더 협력적인 집단은 높은 생산성을 과시하며 다른 집단을 흡수하고 더 오랜 기간 존속하게 되었고, 영혼과 그것을 지닌 자가 추구해야 할 바를 향한 믿음의 공유는 그 강력한 협력과 생산성의 바탕이 되며 해당 집단과 함께 오랜 기간 존속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만큼 합리적인 지식 역시 쌓였기 때문에 우리가 문화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뇌는 무슨 인터넷에 연결된 인공지능처럼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반영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뇌 속에서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일어나는 토론은 명확한 근거와 깔끔한 논리를 주고받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어차피 모두가 하나의 존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부실한 근거와 강렬한 주장만이 오고 가는 모습에 가깝다. 즉 우리 뇌는 근거가 명확한 합리적인 생각만을 해내는 존재가 아니다. 새로 태어난, 비합리적인 뇌는 옛사람들처럼 영혼과 추구해야 할 바에 관해 경험하고, 사회적인 뇌를 경험한다. 그리고 문화와 사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쉽게 빨아들이며, 영혼의 세계를 상상하고 좇아야 할 바를 믿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는 현대에 와서는 직업인이 되기 위한 기나긴 준비를 치열하게 하느라, 딱히 자신과 관련이 없는 과학 분야를 공부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나 이제는 영혼의 존재를 거의 믿지 않게 된 현대인임에도 삶의 한계를 초월할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좇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합리적이지 않은 정보처리를 하며, 미래를 예측하고 타인을 모방하며 또다시 그러한 자신의 정신활동을 비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뇌는 삶의 의미라는 거대한 허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하며, 사회적인 동물에 생존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이러한 삶의 의미가 사회적인 기여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의미를 뇌의 예측 기능 측면에서 바라보면, 삶의 의미가 개인의 생존에 기여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동물의 생존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능은 바로 다가올 위험과 보상에 관한 예측이다. 다가올 위험을 예측하지 못한 동물은 무방비하게 위험에 노출되어 생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반대로 다가올 보상을 예측하지 못한 동물은 거친 환경 속 보상을 얻을 귀중한 기회를 놓쳐 생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단발적인 예측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까다로운 환경 속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해 삶을 지속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예측 방식 자체를 해당 환경에 맞게 조금씩 수정해나가야 한다. 즉 해당 환경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정보를 상수로 추가해 나가며, 예측 공식을 해당 환경에 알맞게 구체화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예측과 실제 벌어진 일을 비교하고 그 차이를 해석하며, 다음 예측에 반영할 정보를 만들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학습이라고 한다.
즉 학습이 일어나며 예측은 실제 결과와 비교되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정보는 다음 예측과 비교에 반영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특정 대상을 향한 장기적인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파블로프의 개는 종소리를 듣고 먹이 나오는 일이 반복되자, 종소리만 들어도 먹이를 예측하며 침을 흘린다. 시험에 몇 번이나 떨어진 누군가는 자신의 지능이 낮다는 결론과 함께 다른 분야의 시험을 보는 것까지 망설이게 된다. 하는 일마다 잘되는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나도 쉽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다. 이처럼 예측은 나 자신, 환경 혹은 특정 대상에 관한 정보를 만들게 되고 그것은 다음 예측에 반영된다. 그리고 만약 동일한 정보가 예측에 반영되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해당 대상을 향한 장기적인 믿음 혹은 예측 편향이 형성된다.
이러한 장기적인 믿음 중 하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조건이다. 즉 무언가를 좇으면 결국 잘 될 것이라는 믿음 혹은 무언가를 피하면 결국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예측하고 행동하며 실제 결과와 예측을 비교하고 학습하는 일의 반복은 ‘세상이란 결국 어떠한 곳’이라는 특정한 믿음을 형성한다. 이러한 세계관 혹은 세상에 관한 장기적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장기적인 예측과 행동의 기준을 형성할 수 있다. 행복, 성공, 지식이라는 보상을 예측하고 좇으며 얻었던 좋은 결과가 일정 이상 쌓이게 된다면, 이 세상 혹은 환경에서는 행복이나 성공, 지식을 좇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자 조건, 세계관이 형성된다. 그러한 믿음은 다음 예측에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다음 예측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쉽게 말해 예측이 반복되는 동안 그 경험이 점점 예측 방식에 반영되어 예측 방식이 환경에 맞춰 최적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길잡이이자 동기 그리고 세계관 중 하나가 삶의 의미이다. 예측과 학습을 통해 형성된 삶의 의미는 다른 장기적인 믿음처럼 우리가 장기적으로 추구할 바를 알려주며 또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당장 해야 할 바 역시 알려준다. 우리는 의식 밖에서 벌어지는 예측과 학습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면, 진리에 닿으면, 불안을 피하면, 삶의 의미를 찾으면 삶이 대단히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렇게 삶을 개선할 추상적이고 거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소소하고 단기적인 계획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의미라는 최상의 목표와 그것이 줄 보상에 관한 예측은 곧 삶의 길잡이가 되어 내일 해가 뜨고 난 뒤에 할 일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삶의 의미는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예측 밖의 실패가 주는 충격을 줄여준다. 우리 뇌는 예측과 학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손에 넣게 된다면, 가장 거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정보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거대한 보상이 실패가 주는 쓰라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소한 실패 따위는 가볍게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처럼 예측과 학습을 통해 형성된 장기적인 믿음은 다음 예측과 실제 결과 비교 과정에도 관여하며, 예측 실패나 성공을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준다. 특히 실패의 충격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갑자기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예측과 학습을 통해 생성된, 다음 예측과 예측 평가에 반영할 정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우리는 장기적인 목표이자 삶의 이정표를 잃게 될 수 있고, 실패의 충격을 줄여주던 방패를 잃게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삶의 의미의 부재와 그로 인한 무기력함은 이처럼 삶의 의미가 예측과 학습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삶의 의미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재로부터 오는 어려움을 무방비하게 겪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비합리적이지만, 이 여러 기능을 하는 삶의 의미를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실해야 할 바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에 관해 의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어른, 이웃과 멀어지며 기꺼이 모방할만한 삶의 의미를 마주하지 못했다. 또 홀로 삶의 의미, 목표를 찾는 일 또한 빈번히 실패했다. 그 결과 삶이 특정 조건을 통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에 의심이 생겼고 동시에 추구하던 목표를 의심하게 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그 의심을 과학적으로 검토해 봤다. 인간에 관한 과학을 통해 삶의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좇을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라는 논리를 반박할 근거를 확인했다. 우리 뇌는 합리적인 것과 거리가 있으며, 특히 합리성과 거리가 있는 뇌가 가진 다양한 정보처리 경향은 삶의 의미라는 비합리적인 상상을 만들어 내는 일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다. 결국 우리는 삶의 한계를 극복할, 우리가 마땅히 좇아야 할 바인 삶의 의미라는 개념이 뇌가 생존을 위해 하는 다양한 일이 겹치며 만들어진 상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이 세상 어딘가에 삶 혹은 삶의 경험을 극적으로 바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영혼과 영혼 세계를 믿던 옛사람들의 믿음을 반박했다. 즉 삶이 극적으로 개선되는 일과 그러한 일을 위한 어떤 조건 혹은 의미, 성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보다 강력한 근거를 마주하고 논리를 형성하게 되며 우리는 더 이상 뇌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방향을 따라 삶의 의미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의심이 깊어지는 순간부터 삶의 조건을 지워야만 하는 길에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삶의 조건을 지우되 그 조건이 해오던 일을 해줄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는 좇을 의미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울 목표가 필요하다. 다만 우리는 이전처럼 삶을 극적으로 개선할 무언가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는 삶을 극적으로 바꿀 엄청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할 바에 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전의 목표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일까? 그 빈자리를 채울, 현실적인 목표는 대부분 만족스럽지 않다. 따라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어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다 나은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삶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여전히, 삶에 관한 특정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나도 모르게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를 지지하고 있다. 영혼과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 삶을 극적으로 바꿔줄 무언가 등에서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다면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것이 침투한 모든 곳으로부터 그것의 흔적을 지우고 진정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뭉치기 위해 영혼과 관련된 경험과 사상을 나눴다. 즉 영혼, 마음, 정신 등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경계선의 역할을 하며, 우리가 기꺼이 뭉쳐야 할 동족임을 주장할 근거가 되었다. 영혼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관련된 다양한 사상 또한 그러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일정 이상의 규모를 지닌 사회는 영혼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영혼이 경험하는 감정(동기)과 동조를 토대로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남이 즐거우면 나도 즐거운 마법 같은 뇌의 동조 활동은 나름의 개성을 갖고 모인 이들이 공동 목표를 의식하며 단체를 위한 질서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잘 짜인 공동 목표이자 사상은 각 구성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집단으로 정의하게끔 도왔다. 그 결과 그 집단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다른 느슨한 집단을 흡수하고 성장했다. 사상은 집단과 함께 존속하며, 그 집단의 후예인 우리는 여전히 그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추측에 의하면, 단순히 인간을 영혼을 가진 자로 정의한 집단은 일정 이상의 규모에서 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추구할 바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인간에 관한 정의, 내집단에 관한 정의를 만든 집단이 더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영혼을 지닌 자로서 영혼이 마땅히 좇아야 할 신을 추구하는 자, 진리를 추구하는 자, 행복을 추구하는 자 등으로 정의한 집단이 더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 영향을 받은 우리 역시 우리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좇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좇을 바는 보통 영혼과 관련이 있기에 신체적인 삶,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삶과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동물과 달리 생존 따위에 깊게 연연하지 않은 고차원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감히 주어진 생명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선을 긋고, 집단과 더 똑똑한 집단 사이에 선을 그었다. 똑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집단을 부흥시키는 사이에 그어진 선은 더욱 짙어지고 깊어지며 우리를 특정한 관성 안으로 빠뜨렸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고고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구질구질하게 살아간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부모님의 생물학적인 상호작용, 즉 타인의 의지로 내가 태어난 것이니 내 삶은 어떤 가치가 없다.’ 그러나 함정에 깊게 빠진 우리가 나누는 이와 같은 현명하지 않은 말은 대부분이 사실과 다루다. 모든 동물의 뇌나 장기에게 살아가는 일은 곧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 또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두 생식 세포는 나와 부모님의 연결고리이며 때문에 탄생의 의지나 인과를 부모님에 둘 지 우리가 가장 작았던 순간에 둘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굳이 둘의 만남의 순간(부모와 구별되는 DNA 조합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부모님과 나의 의지가 분리되는 순간으로 둔다면, 조합이 만들어지는 환경을 부모님이 제공했어도 분열하고 살아가고 싶다는 그 강렬한 바람 자체는 자신만의 DNA를 지닌, 결합한 세포 나온 것이다. 우리는 가장 작았던 그 순간 분명 유전자 지도를 따라 더 커지고 싶었고 그 지도가 모두 발현된 상태에서 생존과 번영을 누리고 싶었다.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는 이와 같은 우리 모습을 통해 최소한 우리가 생존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에 유연하게 대비하기 위해 가끔 관성을 벗어난 생존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뇌는 자신이 선호하는 사회적인 정보를 아주 듬뿍 흡수하며 생존에 이득이 되는, 집단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를 만들었고 동시에 생존 그 이상의 것이 있다거나 생존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주장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를 손에 넣지 않은, 성취 없는 삶을 등한시한다. 뇌에서 벌어지는 예측과 학습은 이러한 주장과 만나 삶의 조건을 형성하며, 손에 넣어야 할 의미, 이뤄야 할 성취의 종류를 더 명확히 만든다. 삶의 의미이자 조건은 이러한 원리로 너무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 같게 느껴진다. 또 예측과 학습의 반복을 통해 정말로 이 여정 끝에 삶의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은 점점 선명해진다. 그러나 관성을 한참이나 벗어난 주장이나 예측과 학습을 통해 형성된 삶의 조건이 알려주는 바와 달리 최소한 삶은 어떠한 성취 없이도 그 자체에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반대로 이 모든 일의 목표가 생존이기 때문이다. 생존 그 자체를 우습게 보고, 지금의 생존에 만족하지 않으며 그보다 나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일은 모순적으로 생존과 번영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 자신의 예측, 의사결정, 행동을 분석하며 환경을 파악하고 삶에 조건을 만드는 일은 환경에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영혼과 영혼이 추구할 바를 믿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며 집단의 규칙으로서 따르는 이유는 더 강력한 집단에 속해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삶을 경시하도록 하는 삶의 의미의 구성 요소는 각각이 생존에 여러 기여를 한다. 따라서 정말로 생존만으로는 어떤 가치가 없다는 논리는 어떤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존을 목표로 채택하고 있는 전략 중 하나가 생존 그 자체를 경시하고 만족하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혜택을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가진 생명의 소중함을 잊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은 동기가 되고 목표가 되며,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할 이유가 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성가신 전략을 선택해야 할 만큼 생존은 단순히 머물고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집단 그 자체가 되어 더 큰 반경의 환경을 지배하기 때문에 쉽게 잊는 일이지만, 생존은 원래 쉽지 않다. 아니 여전히 쉽지 않다. 우리는 또 하나의 변수가 되어 상호 간에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 변화를 반영한 환경, 사회에 적응하고자 다시 우리는 늘 부지런히 생존전략을 새롭게 짜야만 한다. 특히 현대인은 발전한 기술 때문에 타인의 삶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가치를 부정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감정이나 동조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며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삶의 가치와 생존의 어려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다시 진정으로 다음 단계에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이루는 여러 요소가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삶은 지속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크나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형성되어야만, 의미를 손에 넣어야 삶에 가치가 생긴다는 논리를 폐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관한 경험과 사상, 예측과 학습은 부족한 삶과 완전한 삶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의미를 성취하거나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유도하며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단순히 타인을 모방해, 길잡이를 따라 살지 못하는 현대인은 의심을 갖고 직접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을 찾다가 그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길을 찾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어떤 원리와 이유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줬었는지 파악하고 직접 나만의 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유지시키는 어려운 일을 위해서 지금까지 고민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