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간, 글을 쓰며 내린 글 쓰기라는 결론
글을 쓰는 일은 ‘나’를 더 뚜렷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타인을 나누는 기준 역시 더 선명해진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작고 고독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굉장히 이상한 존재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작은 요소들은 알아서 작동한다. 우리의 장기는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능하며, 더 작게는 세포를 구성하는 요소조차 알아서 자신이 맡은 바를 해낸다. 마치 스마트 카나 공장처럼 외부 존재가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자동화 요소 역시 알아서 생존을 이뤄낸다.
이러한 자동화 기계들은 추가적인 기능이 필요 없다. 예를 들면 스마트 카에는 그것을 운영할 운전자가 필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나’라는 기능이 추가되어 있다. 사람이라는 자동화 기계에는 굳이 그 자동 기능과 별개로 존재하며, 그 운영에 관여하는 듯한, 자아, 의식, 마음, 메타인지 등으로 불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 다시 스마트 카나 공장으로 비유하자면, 굳이 해당 기계에 그 기계를 ‘자신’이라고 인지하는 AI 기능을 추가시켜 놓은 꼴이다.
그런데 이렇게 굳이 추가된 그 기능이란 것이 조금 애매하다. ‘나’라는 기능은 딱히 자동으로 작동하는 신체 구성요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인지조차 못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엉성하고도 이상한 ‘나’라는 기능이 아주 드문 상황에서만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자동화 요소에 관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는 글쓰기가 그 드문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생각을 글로서 써 내려가는 과정은 ‘나’라는 존재의 경계선을 더 뚜렷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는 신경 세포 뭉치의 일부가 관성적으로 해오던 일과 상충될 수 있다. 신경 세포 뭉치의 일부는 무리 짓고 어울려 사는 것이 생존에 직결된다고 여기며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가 되도록 기여하는데, 그로 인해 우리는 다수의 의견 중 일부를 자신의 의견과 동일시하곤 한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류에 동조하는 것은 그러한 결정을 만드는 신경 세포 뭉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나’를 명확히 하는 일은 ‘나’를 담당하는 신경 세포 뭉치의 일부의 영향력을 더 키우는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동조를 주도하던 일부 신경 세포 뭉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그 결과 우리는 ‘나’를 타인과 더 선명히 구분하며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동조에 영향을 받던 내 의견이 더 이상 동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만의 의견으로 변하게 되면서 나의 의견은 이전과 같은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전의 내 의견은 사실 동조했던 다수의 타인의 의견이었기에 이미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었다. 그러니 동조를 저버리고 자신의 의견을 찾는 일은 어떻게 보면 주로 나만 인정하는, 비교적 고독한 의견을 만드는 일이 된다.
한편 신경 세포 뭉치의 일부는 이렇게 줄어든 지지를 보고 사회적인 위험에 처해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가 선명해질 때쯤, 외로움이나 불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 자주 그러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편 그래서 더더욱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줄어든 지지를 회복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나만이 동조하는 것을 더 이상 나만 동조하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더 적극적으로 글을 쓰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기로 했다.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나만의 삶을 살기 위해 글을 쓴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자신과 삶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자 결심한 것은 그동안 실패와 실망을 반복하며 더 이상 그 어떤 가치도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3년간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래서 내린 결론으로 하게 될 일은 재밌게도 결국 3년 전과 같다. 선명해지고 작아진 ‘나’를 차근차근 키워나가고자 결국, 또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