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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청춘의 기억을 더듬으며

20살 때 여선배

by 톰슨가젤

20살이 돼서 난 작은 대학에 다니며 대학생이 된 적이 있다.

과티를 맞춰 입고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난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미 기억이 없다

그 시절은 술을 냉면그릇에 주던 시절이었다 아마 내 음주인생 중 가장 많은 술을 마신 해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슬픈 일이 있었고 삶은 공허했고 나를 지탱해 줄 것은 오직 술과 몇 권의 책밖에 없었다


작은 자취방에서 인터넷도 없고 티브이도 없고 냉장고도 없다 오직 고독과 바둑 판한 개와 옷 몇 벌과 책 몇 권

그게 나의 짐 전부였다 학교에 가긴 했지만 수업은 몇 번 안 들어갔다 동아리에 들었는데

동아리 회원은 선배 두 명이 전부였다 신입은 한두 명이 들어왔지만 이내 냉랭한 동아리 분위기에

금방 탈퇴해 버렸다


나와 남자선배 여자선배 이렇게 세명 남자선배 한 명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내용은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지금 읽어도 너무 심오하고 어려운 내용이니까 말이다

여자 선배는 다른 남자선배를 형이라고 부르고 나에게는 야라고 껄렁껄렁하게 불렀다 옷은 항상 청자켓에

청바지 보이시한 캐릭터인데 목소리를 최대한 남자건달흉내 비슷하게 낸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동아리방에 모여 알 수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하고 농활이라든가 빈활이라든가 그런 내용을 이야기하다가 술을 마셨다

남자선배 한 명은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항상 작은 눈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여자선배는 술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 술을 이미 거나하게 마셨다 나도 물론 동공이 풀려가고 있었다

술이 떨어져 가고 나는 술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술을 사러 학교 밖에 가려면 한참 가야 한다 한참 걸어가

술들을 데리고 달빛을 맞으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동아리방 앞 비탈진 잔디밭에 여 선배가 앉아서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를 보더니 대뜸" 야 너 일루 와봐" 나는 "네 선배님 "하고 술병을

달그락 거리며 선배 앞으로 갔다 우리 둘은 술이 많이 되어서 눈이 둘 다 게슴츠레했다 선배는 담뱃갑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바닥에 탁탁 치더니 담배 한 대를 뽑아 주며 "야 한대 펴"라며 담배를 건네어주었다 난

담배를 받아 물곤 선배가 켜주는 라이터 불에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가까이 갔다 라이터 불에 담뱃불이 붙고 내가 숨을 들여 마시니 담뱃불이 반딧불처럼 순간 주황색으로 반짝인다


선배는 나를 지긋이 보더니 " 야 너 여자친구 있냐?"라고 묻는다 나는 "없습니다 선배님"이라고 대답했다

비탈진 잔디밭에 선배는 대뜸 눕더니 "야 달빛이 좋다 누워서 달 좀 봐봐"라며 말한다 나도 몽롱한 기운에 누워서 하늘을 보니 달이 밝았다 우리는 서로 누워서 정면의 달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았다 인간의 얼굴과 얼굴사이에도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는 줄은 뉴턴은 몰랐을 것이다


잠시 후 선배와 나의 입술은 마주 포개어졌다 그렇게 십여 초가 흐른 후 서로 깜짝 놀라 입술을 떼고는 어색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다시 동아리방에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선배와 나는 밥을 한두 번 먹은 적은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사이만 조금 어색해졌다

나는 이미 술에 의해 생활력이 모두 파괴되어 학교도 동아리도 그만두게 되었다


은주선배 남양주에서 인천까지 통학을 하던 그 여선배가 생각난다 잘 살기 힘든 사람인데 잘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잘살고 있었으면, 20대 중반쯤 그 눈이 작은 남자선배를 연수동 어디선가 마주친 적 있는데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서로의 마음속에 생각지도 않은 앙금 같은 것이 그렇게 남아 있었나 보다. 그 남자 선배는 아마 밥은 굶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동아리는 내가 마지막회원으로 그 이후에 회원유치에 실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들었다


나는 언제나 소멸되어 가는 것에 이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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