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가야 한다. 세입자가 구해지긴 했는데 잘 될지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삿날은 근무날이라 그 전날 짐을 빼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충 짐 한두 개만 남겨두고 보증금을 반환받고 마무리하는 그런 모양새다. 그래서 생각이 난 게 세면대 배수구가 너무 오래돼서 보기 흉하다. 배수관을 주문하고 며칠 박스채로 그냥 두었다가 그건 아마도 웃기는 이야기지만 난 항상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한다. 마음이 움직여야 되니까 말이다. 어떨 때는 택배박스가 몇 달씩 개봉 안 한 채로 있은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배수관을 교체해 두어야 그래도 들어오는 사람이 마음이 조금은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주문한 것이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잠을 잘 자다가 , 오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 박스를 개봉하고 낡은 배수관을 들어내니 오물과 찌꺼기를 신문에 잘 스며들게 하고 , 대충 정리를 하고 배수관을 조립해 맞게 조립해 보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설명서는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난 이런 설명서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과 직관적인 아니 뭐 머리가 나쁜 거겠지. 세면대를 보니 팝업이 장치 부분이 매립이 된 거 같다. 기존 팝업은 이미 홀로 덩그러니 널브러진 지 오래이기는 하고 이래저래 해보다 안돼서 그냥 당근 나눔 하고 또 새로 잘 찾아봐야 하나 하다가 조금 머리를 굴려보니 되었다 그런데 팝업은 일체형이라 들어가지 않는다. 배수관은 연결했지만 팝업이 문제라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 팝업만 살짝 빼보니 그냥 빠지네 그걸 세면대에 넣으니 그냥 딱 맞다 사실 여기까지 설명했지만 아무도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설명도 뭐 그 설명서와 비슷한 거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되고 보니 팝업의 짧은 관이 하나 남았다. 그건 세면대에는 일체형이 이미 매립되었기 때문인 거 같다. 갑자기 어릴 때가 생각났다. 프라모델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조악한 조립장난감을 사서 그 알파벳기호와 숫자로 순번이 매겨진 조립품들을 떼어내 조립하다 보면 꼭 한두 개가 남았다. 난 항상 그런 식이다 무언가 완벽하지가 않다.
어찌 됐건 해야 할 일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하다 욕실에 온수를 뿌려 청소를 조금 하고 나오니 이제 슬슬 땅거미가 지려한다. 다행이다 난 밤이 좋다. 한 동안 술을 안 마시고 아주 맑고 고요한 정신을 유지한 적이 있었다. 그 길로 쭉 가고 싶었지만 , 그게 마음대로 되나 날이 저무니 배도 조금 출출하고 편의점에서 느린 마을 막걸리를 두 병 사 와봤다 이건 3000원쯤 하는 거 같다 조금 비싸서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 마셔보니 하하 이런 이건 요구르트 맛이다 부드럽고 쓴맛이 없다. 장수나 소성주에서 느끼는 그 비릿한 쓴맛 인생과도 같은 그 비릿한 맛이 없다. 술이 3천 원이란 게 비싸 보이지만 비싼 게 아니지 않나 싶다 술집에서는 그냥 소주 막걸리도 4-5천 원씩 하니까 말이다. 이 술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테마로 날짜의 숙성기간별로 맛이 조금 달라진다니 남은 한 병은 조금 며칠 두었다 마셔봐야 할 거 같지만.. 글쎄 외로움이 그걸 순순히 기다려줄지는 의문이다.
이 글을 쓰려는 의도는 사실 무언가 의도치 않게 남겨짐에 대하여였다 그 팝업장치 부속물 쇳덩어리 쇠도 아닌 플라스틱이겠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저렇게 무언가 인생이란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거 아닐까 하는 , 그러다 덩그러니 남는 어울리지 않는 일관성 없는 존재에 대한 의문 호기심 그런 게 생긴 것이다. 결국 나의 인생도 저 팝업 장치처럼 무언가 덩그러니 남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의 레몬진 하이볼 한잔을 더 했더니 술과 고독 센치함이 묘한 어울림을 이루어 낸다 남은 막걸리 한병도 여름 가을 겨울은 다음에 시도해야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