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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계속 쓸수 있는 건전지

by 톰슨가젤

휴가가 언제 다 이렇게 지나버렸지 분명 5일이 갔는데 기억이 없다 마치 어제 같다. 아니 어쩌면 지난 세월도 마치 어제 같다. 과연 내가 살아온 게 맞는 걸까? 다행히 날씨가 흐리다 날씨가 흐린 건 다니기는 불편해도 난 일단 어두침침한 게 좋다 그나저나 5일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 데도 간 곳도 없고 하니 그 흔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도 말을 한 적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긴 노선의 전철을 타고 , 사람들을 구경하다 책이나 읽으며 전철 여행을 하고 싶지만, 그것도 무언가가 내키지 않는다. 하릴없이 동네나 한 바퀴 돌다가 커피전문점에 가서 책이나 조금 읽어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집을 나서본다. 우산이 없어 차에 가서 작은 우산을 꺼내고 시동을 걸어보니 차는 아직도 심장이 안 좋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우산을 펼까 말까 고민한다. 우산을 펴고는 제일 가까운 커피전문점으로 향해본다 바깥쪽 유리창에 20대 남자가 유리창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외로움이 조금 느껴지지만 무언가 난 그 결과는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조금 더 산책을 하기로 한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무인커피전문점인데 여기는 지날 때마다 아주머니가 아주 커다란 성경책을 펴놓고( 3천 페이지 민법책과 같은 두께이다) 노트에 열심히 무언가 쓰면서 공부한다. 성경공부 오늘은 보니 명절이라 그런지 그 아주머니는 없다. 그녀에게서 약간은 광기 혹은 계속 쓸 수 있는 건전지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데 그 무인편의점 주인이 테이블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가 있었다면 유리창을 마주 보고 있지 못하게 돌려놓았다. 아무튼 그녀는 없다.


동네를 한 바퀴쯤 돌아서 다른 커피전문점에 가본다 느낌이 좋다 마음에 든다 사실은 아까 그 청년이 있던 곳과 같은 체인점이다. 위치만 다를 뿐 난 들어가기 전 우산을 잘 털어서 수분을 날려주고 주머니에 넣는다, 키오스크에 서서 간단히 커피를 주문하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본다 안쪽 구석에 아늑하게 숨을 곳이 있다.. 물론 주변에는 3명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노트북을 들고 포진해 있다. 주문한 커피가 아주 빠르게 나왔다 커피를 들고 주변을 조금 정리하고 , 책을 펴본다 적당한 활자크기의 적당한 분량의 책 물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다. 책에 빠져들 때쯤 술에 취한 50대 중년들이 들어온다. 목소리가 크다. 아 나도 몇 달후면 50대인데 술 취한 50대는 저렇구나 아 싫어.. 그냥 싫다. 양평에서 와서 술을 잔뜩 마신모양이다 일행은 빨리 대리운전을 하든 어떻게 하든 빨리 가야 하지 않겠냐 한다. 난 더 이상 책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명절날 책을 들고 여기에 온 나도 약간은 이방인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커피숖을 나오니 길은 비와 달빛에 물들어 축축하다 또 동네를 방황한다. 이제 누구를 구경하지 걷다 보니 아까 그 무인커피전문점을 또 지나가게 되었다. 유리창 제일 앞자리에 중간사이즈의 성경책과 노트와 물품들이 놓여 있다 사람은 없다. 그녀가 분명하다. 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안도한다. 그녀가 믿고 의지하는 그 신성한 종교가 새삼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가다 보니 아까 그 청년이 있던 그 커피전문점은 모두 나가고 그 청년만 덩그러니 남아서 노트북을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다.

나는 동네 편의점으로 와서 어제는 비싼 막걸리를 마셨으니 오늘은 조금 겸손한 마음으로 2천 원의 쌀막걸리 두병을 사본다. 편의점에는 10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먹고 있고 그 옆에는 할머니가 근심스럽게 구경하고 있다. 사서 집에서 먹지 왜 저기서 굳이 먹을까 할머니는 또 왜 그냥 구경만 할까 참 의문이지만 사연이란 건 참 다양하니까 말이다. 막걸리와 먹을거리를 조금 사고 봉투도 하나 달라고 해서 담아 나오며 한마디 했다

"감사합니다" 다들 계속 쓸수 있는 건전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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