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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벌어졌는데 어떡할까?

생각의 방향 고쳐보기

by 푸른푸룬


“즈으-으-윽”

‘???’


사계절 밤낮을 함께했던 보라색 솜이불의 옆구리가 뜯어져 버렸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이불이 몸 어딘가에 껴서 반대쪽이 당겨져 버린 것인지, 최후의 비명과 함께 운명을 다했다. 비록 고급 이불은 아니었어도 여름에는 얇아서 덮기 좋았고, 겨울에도 은근히 따듯해서 사계절 내내 덮은 이불이었다. 물론 봄가을도 말할 것도 없이 포근했던 이불, 몇 년째 잠자리를 함께해온 이 이불. 순간의 실수 아닌 실수로 거의 애착 이불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불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터진 그 이불 옆구리로 속에 있던 하얀 솜이 살짝 보였다. 어떻게 잘 덮어서 수습을 해보려 해도, 작은 힘에도 찢긴 부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련을 버리고 놓아주기로 하고 새 이불을 주문했다.


찢어진 이불.jpg 처참히 찢겨버린 이불, 이제 놓아줄 때가 됐다.



사흘 정도 지나니 새 하늘색 이불이 도착했다. 할인해서 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이불로 덮어보자고 가격대가 조금 있는 것으로 골랐다. 매일 쓰기도 하고, 잠은 잘 자야 하니 내 몸에 투자하는 것으로 생각해 구매했다. 상자를 뜯고, 감싸진 비닐 팩을 뜯는다. 코로 직진해 들어오는 새것의 냄새. 좋은 냄새라고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새것, 특히 옷이나 수건 같이 몸에 직접 닿는 것들은 처음에 한 번 빨아 쓰는 게 좋은 것 같다.


이불을 그대로 들어 바로 세탁기 앞으로 간다. 세탁기에 넣으니 이불이 통돌이 세탁기 위로 삐져나와 버린다. 이불이 코팅이 잘 된 건가? 복원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둘 다인가? 꾹꾹 눌러 넣어도, 혀를 내밀어 메롱하고 놀리는 듯 계속해서 튀어 오른다. 그렇게 한 열 번 정도 눌렀을까, 계속 튀어 오르는 걸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나온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억지로 세탁기 뚜껑을 닫아 눌렀다. 투명한 뚜껑이라 안을 볼 수 있게 되어있는데, 뚜껑을 닫고 나니 그 천장에 이불이 슬라임처럼 붙어있다. 이불 윗부분만 살짝 세탁이 덜 되어도 뭐 크게 영향은 없지 않을까? 딱히 방법이 없기도 해서 세탁기를 이불 모드로 바꾼 뒤에 시작 버튼을 눌렀다.


‘후, 겨우 돌리네. 돌아가는 동안 잠깐 눈이나 붙일까?’


침대에 엎어져서 구매한 이불 정보를 다시 봤다. 이게 원단이 이래서 좋구나, 진드기가 통과를 못 하는구나! 정도를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은 아니였는지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띠리 리 리 띠디♪♬ 띠로’


탈수까지 다 되었다는 세탁기 알람 소리에 깨어, 후다닥 일어나 세탁기 앞으로 가서 뚜껑을 연다. 세탁되어서인지 이제 튀어 오르지 않는다. 그걸 보고 악당을 처치한 듯한 뿌듯함에 이불을 꺼내는데, 물을 머금어서 두 배는 무거워진 거 같다. 새 이불이니 조심스럽게 꺼낸 뒤, 정성스럽게 거실로 가져가 건조대 위로 올렸다. 그렇게 건조대 위에 널어두니 마치 이불이 건조대를 집어삼키는 형세다. 그렇게 안쪽까지 잘 마르도록 이틀 정도를 널어두었다.


이틀 뒤, 부들부들한 새 이불을 쓸 기분에 룰루랄라 건조대로 가서 이불을 일단 그냥 본다. 그런 다음 이불 겉면에 손을 한번 쓸어보니 비단처럼 부드럽다. 비단을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여기저기 쓸어 만져본다. 보들보들. 이제 나는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보들 거리며 누울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며 이불을 쓸어내리던 중에 갑자기 손끝이 따갑다.


‘???’


왜 이렇게 거칠거칠하지? 분명 이불의 한쪽 부분이 거칠었다. 이상했지만 침착히 생각했다. 상표 태그가 붙어있는 곳인가? 들여다보니 그건 아니다. 이 부분만 박음질이 다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더 자세히 보았다. 표면이 약간 울퉁불퉁하게 되어있다. 이게 이런 모양의 무늬인가?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하늘색 이불 중간중간에 흰색의 무언가가 보인다. 솜이다. 20cm 정도 길이로 중간중간 하얀 털 같은 내용물까지 보인다.


overlay-328226_1920.jpg 상상했던 비단 같은 부드러운 느낌


그 광경을 본 순간 5초 정도는 흔히 말하는 ‘뇌 정지’ 가 오며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리곤 다시 정신을 차려본다. 원래 디자인이 이런가? 솜이 튀어나온 걸 보아선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럼 왜 이러지, 불량품인가? 그 순간, 세탁기 돌리기 직전 뚜껑을 힘차게 닫았던 행동이 머릿속에 전류가 흐르듯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랬다. 세탁기 통돌이가 돌아갈 때 이불이 뚜껑에 붙어 같이 고속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탈수에서는 내용물의 수분을 짜내기 위해서 통돌이는 열심히 고속으로 돈다. 보고 있으면 어지러울 정도로 아주 아주 빠르게 돈다. 1초에 10바퀴는 돌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 이불은 뚜껑에 붙어서 같이 돌아갔을 것이고, 아무래도 그때 마찰로 녹았거나 뜯어진 것이 분명하다. 대충 상황 파악이 완료되니 너무 화가 났다.


“새 이불인데! 오늘 밤에 덮고 잘 이불인데! 왜, 왜!!! 아, 왜!!!”


그렇지만 내가 한 잘못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고,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싫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해본다.


“스~~~읍, 하~~~아”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화낸다고 이불이 원래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이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누가 보았으면 혼자 화를 내다 갑자기 웃고 있으니 눈앞에 조커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새 이불을 사면 빨래방에 가거나 세탁소에 맡겨야겠다! 이번에 이불을 찢어먹어서, 다음엔 안 찢겠지. 찢는 경험 하나 했다! 찢었다 아주!’


너무 현실적일까 생각도 해보지만 화내 봤자 하나도 득이 될 게 없는 것이 팩트다. 그날 밤 이불의 거칠거칠한 부분을 피해 덮으면서, 멍청하지만 재밌는 경험 했다고 나를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bed-1013957_1920.jpg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인생에서 이런 일들이 어디 한둘일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리고 타임머신이 없는 이상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물.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것은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의 최선을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이 그렇듯이 말로는 쉽지만, 행동이 어렵다. 그래도 이런 작은 일상에서부터 하나하나 해보면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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