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복잡할 때
‘후드드, 드드, 드드드득.’
주말 출근길,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봄비이다. 흐린 줄만 알았던 날씨는 문을 열고 그냥 나오니 봄비가 내리고 있다. 운치 있는 느낌과는 다르게 다시 들어가야 하는 귀찮음으로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뒤돌아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우산을 꺼내 온다.
좋아하는 하늘색과 좋아하는 파란색 사이쯤 되는 색깔의 우산. 우산살이라고 하는 그 뼈대가 조금 휘어서 잘 펴지질 않지만 아직은 쓸만하다. 그런 우산을 보고 있노라면 물욕이 없는 것인지, 절약이 몸에 배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산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우산이야 어릴 때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두고 나오거나, 버스에 두고 내리거나 해서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에 2만 원이나 주고 산 비싼 고급 접이식 우산도 잃어버리고 나서는 거의 일회용품 같은 마음으로 우산에 큰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런 덜렁거림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물건을 잃어버릴 기회가 줄어든 것인지 이번 우산은 생각보다 오래 쓰고 있다. 아무튼, 수시로 잃어버리던 그 물건을 들고나와 빗속으로 들어간다.
빗길 사이를 걸으면서 외투 주머니에 있던, 한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조막만 한 물체를 꺼낸다. 얼마 전부터 밖을 나갈 때 꼭 챙겨가는 필수품인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 한번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게 되니 유선 이어폰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유선 이어폰은 귀에 꽂을 때마다 하나의 ‘의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어폰 선들이 주인을 괴롭힐 생각으로 꽁꽁 자기들끼리 엉켜있다. 분명히 헝클어트리지 않았다. 그냥 주머니에 넣어두었을 뿐인데, 꺼내보면 얼기설기 꼬여있다. 그 꼬인 선들을 풀어주는 ‘의식’을 행해야 비로소 이어폰을 귀에 꽂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귀찮은 의식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동안 매일 꼬여있던 그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연결이 완료되면, 음악 앱을 켜서 첫 노래를 골라본다. 이런 비가 오는 날에는 비에 관련된 노래를 듣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일까? 날씨에 잘 맞는 느낌의 곡을 골라본다. 누구나 비 오면 듣고 싶거나 듣고 있을 플레이리스트 하나쯤 마음속에 있을 터. 그 마음속 플레이리스트 중 고민하고 고민해서 하나를 재생한다.
노래가 시작된 순간, 걷고 있던 인도와 주변 도로, 나무들과 가로등은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 그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OST 또는 BGM과 함께 주인공 모드로 몰입한다. 이 순간 나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 평소의 내가 어땠고, 무슨 사람이었는지 관계없이 주변 소음 없이 온전히 또 다른 세상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내 머릿속은 그렇지 않다. 원래 세계와 나는 분리되어, 나만의 공간에 심취해있다.
‘비가 오던 그날 밤, 사랑했던 너와 나 ♩’
마치 나의 이야기 같다.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으면 내 얘기다. 분리된 이 세계에서는 내 생각대로이다.
‘비가 내려 오늘도♬ 아픈 비가 와♪’
시와 노래 같은 작품은 본인 상황에 맞게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노래의 음과 가사에 몰입했는지 과거의 애인이 떠오른다. 가사의 ‘아픈 비’가 왜 아픈 비인지 알 것도 같다. 마음이 괜히 아프고, 나도 모르는 새 눈가가 촉촉해진다. 갑자기 뭐 하는 건가 싶어서 현실로 잠깐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다 순간 너무 주책인가 싶어 이어폰을 뽑았다.
‘후드득, 후드드득’
그러자 길가를 걷던 원래의 세상으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빗방울이 우산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부터 자동차의 지나가는 엔진 소리 그리고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까지 선명히 들려온다. 완전히 차단되어 들리지 않던 그 소리들이 들리자 정신이 든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이따가 어제 다 못 본 중요 메일을 확인해서 답장을 써야 하고, 바빠서 못하고 쌓여있던 부서 업무들도 처리해야 한다. 그전에 카페에 들러 커피도 한잔 사서 카페인 충전이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가 띵해진다. 왠지 갑자기 아픈 것만 같다. 서둘러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다른 노래를 골라 튼다.
‘비가 와, 비가 와, 비가 와, Yeah’
바깥세상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고, 길거리 고즈넉한 풍경들만 음악과 함께 보인다. 나는 다시 다른 세계로 가서 원래 세상의 것들을 잠시 잊어본다. 어쩌면 무의식적 방어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면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생각한다. 애써 스트레스를 차단하니 기분이 조금 괜찮아진다. 리듬에 맞추어 남들이 모를 정도로만 고개도 흔들어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잠깐이나마 나를 세상에서 분리해 마음대로의 나만의 공간에 두고는, 빗길을 찬찬히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