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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다'의 고민

오늘의 점심 메뉴

by 푸른푸룬


사무실에서 한참을 보고 있던 모니터에 눈이 아파질 때쯤, 슬슬 배도 고파온다.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보니 11시 반, 곧 점심시간이다. 역시! 정확한 내 배꼽시계에 한 번 감탄해본다.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사무실 주변을 자리들을 둘러보았다. 업무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엉덩이가 들썩들썩 이미 식당으로 갈 준비를 해 보이는 대리님이 보인다. 저 멀리, 옆 부서 부장님은 이미 겉옷을 입고 있으시다. 곧 모두가 기다리는 점심시간이다.


오전 업무는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 사실 조금 남았긴 하지만 일단 오른쪽 위 ‘X’ 버튼을 눌러 창을 닫고 오후에 하기로 생각했다. 지금 하더라도 어차피 집중도 잘 안 된다. 주변 분위기도 조금씩 시끌시끌해진다. 그때 들려오는 부장님의 선전포고 소리.


“자, 다들 밥 먹으러 가야지!”


lemur-1602313_1920.jpg 나팔 소리같이 귀에 꽂히는 '밥 먹으러 가자!'


그 소리에 다들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나 출격 준비를 한다. 사무실을 나와서 동료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내려간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 위층에서 내려오는 적군도 아군도 아닌 사람들과 마주친다. 계단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등을 방패 삼아 괜히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총총 내려가 본다. 과장님은 이미 저 앞에 멀찍이 내려가고 있다. 역시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다.


식당에 도착하니 입구에 오늘의 메뉴들이 화면으로 보인다. 규모가 조금 있는 식당이라서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다섯 가지 정도나 있다. 메뉴 사진을 보니 군침이 싹 돌면서, 배는 더 허기져 온다. 다 조금씩 맛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뷔페도 아니고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하나만 골라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아파도, 빨리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사람들이 속속 메뉴 선택을 끝내고, 식당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matrix-3109378_1920.jpg 식당에서 시작되는 빅데이터 분석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여러 메뉴를 앞에 둔 이 순간에, 나는 빅데이터 분석가가 된다. 메뉴의 맛과 외형, 냄새, 반찬의 구성과 조화, 영양 밸런스, 먹은 후의 만족도, 과거의 식사 이력, 주변의 메뉴 평판, 식당에서 이미 먹고 있는 사람들의 메뉴 선택 비율 등을 종합하여 최종 결정을 내린다. 마치 전쟁터의 지휘관이 심사숙고하여 명령을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내리듯이 말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음식 사진과 함께 그 아래에 칼로리도 적혀있는데, 눈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 칼로리가 낮건 높건,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휴식이자 힐링의 시간을 칼로리로 인해 방해받고 싶지 않다. 칼로리를 제외한 빅데이터 분석결과로 최종 메뉴를 선택한다. 식당에 퍼진 냄새 그리고 많은 사람이 먹고 있고, 그 이전에 먹었을 때도 맛있던 ‘돼지국밥’. 물론 어제 ‘혼술’했던 데이터도 분석에 포함됐다. 그렇게 최종 결정된 메뉴로 돌격한다.



soup-967088_1920.jpg 소리만 들어도 맛있는, 직장인의 소울푸드 '국밥'



부글부글 하얗게 끓어오르는 국밥을 받침대에 올려 들고는 적당한 전투 위치를 찾아본다. 구석 TV 앞에 빈자리가 서너 자리 있다. 냉큼 가서 빈 땅을 점령한다. 몇 달 전부터 ‘코로나’로 인해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대화는 금지이다. 식당에 마치 혼자 밥을 먹으러 온 것처럼, 말없이 밥 먹는 데에 집중해본다. 가끔은 대화하며 점심을 먹던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각자 말없이 ‘혼밥’하듯 점심을 먹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대화에 집중해서 먹다 보면 허겁지겁 먹으며 음식을 음미하기보단 단지 배를 채운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혼자 말없이 먹다 보면 음식에 집중할 수가 있다. 음미하다 보니 밥도 조금 더 천천히 먹게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먹는 즐거움도 더 느껴진다.


뜨거운 국물로 볼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깍두기도 집어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다. 시원하면서 칼칼한 그 맛에 침이라는 무기가 한 번 더 쏟아져 나와 국밥을 공략한다. 마지막으로 사발을 들이켜 국물을 끝까지 비워내니, 그 밑바닥이 보인다. 완전한 전투의 승리. 맛있다. 배가 부르다.


점심의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나서 전리품으로 얻은, 부풀어 오른 배를 손바닥을 펴 수박 두드리듯 두드려본다. 속이 가득 차 잘 익은 과일 소리가 난다. 만족한 표정으로 식당을 나와 근거지로 천천히 복귀한다. 이렇게 철저한 메뉴 분석을 통해 대부분의 점심을 승리로 쌓아간다. 가끔은 입에 맞지 않는 메뉴로 점심 전쟁에서 패배할 때도 있지만, 데이터 기반의 전략 덕분인지 승률은 꽤 높은 것 같다. 가끔은 내 높은 승률에 주변에서 메뉴 추천 문의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마찬가지 데이터 기반으로 추천을 해주면 상대방도 수긍을 하게 되고, 동시에 기분 좋은 승리를 나눠 갖는다.


watermelon-815072_1920.jpg 뱃속의 수박이 배부르게 잘 익었다


직장인의 점심은 이렇게 마치 전쟁처럼 중요한 부분이다. 이 전쟁의 승패에 따라 남은 오후 시간의 기분이 좋거나 나빠질 수 있다. 짧은 점심시간이지만 잠시나마 점심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업무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음식이 주는 행복을 느끼고 싶다. 이왕 먹을 거 맛있는 음식을 먹어 오전에 받았던 스트레스까지 잊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고 기다려지는 점심시간은, 단지 음식을 먹는 행위의 시간이 아니라, 오전 동안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치료의 시간인 것이다. 인생 최대는 아니어도 최‘’로 고민하게 되는 점심 메뉴 고르기는 이러한 치료를 위해 때로는 신중한 전략적 선택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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