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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공 Jun 17. 2024

M에게 쓰는 편지

약속을 지키기 위한 헌정

  내게는 친구가 정말 많아. 오죽하면 아는 동생이 질투 나니까 더 이상 절친 그만 만들고 연애나 하라고 할 정도로. 어쩌다가 친구가 그렇게 불어났는지는 모르겠어. 개중에는 지인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나를 친구로 여길지 모르지만, 어쨌든 상대적 거리감에 따라서 말이야, 친구라고 부르기엔 조금 먼 느낌이지. 지인이라 해서 싫다든가, 꺼려진다든가, 아끼지 않는다든가 하는 건 아냐. 그 어떤 지인이라도 사는 게 힘들다 하면 아마 난 밤잠을 줄여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 거야. 때로는 그게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어느 날부턴가 지나치게 타인의 앓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어. 사실 잘하기도 해. 누군가를 보듬고 위로하고, 조언을 건네는 일 말이야. 어딘가 약해진 사람을 볼 때, 그냥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떻게 대하면 되겠다, 어떤 마음이겠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이 떠오르거든. 어쩌면 그들의 약함에서 과거의 나를 투영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미 경험한 것이기에 방법론을 설파할 수 있는 것이지.


요즘 내 동생은 나를 인격자라고 불러. 그렇게 인격자도 아닌데, 그냥 남들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고,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포개놓아 남은 자리에 관용을 두었을 뿐이야. 물론 이게 기껍지는 않아.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개복치거든. 때로는 너무너무 귀찮고, 그냥 다 듣기 싫기도 해. 그래도 그 순간 나의 귀찮음보다 그 사람의 절실함이 더 무겁게 느껴져서 참는 거지. 어쩌면 이게 내가 365일 모카번의 상태로 살아가는 이유일 거야. 만성 피로와, 만성 위염과, 만성 어쩌고들에 허덕이는 이유이기도 할 테지. 만인의 교사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 습관을 버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이제는 '나를 돌보는 법'까지 추가로 배워보려 해.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성인군자 같잖아. 전혀 아니야. 남의 험담도 곧잘 하고 입도 가볍고 돌려 말하는 걸 못해서 그냥 노빠꾸로 싸움을 걸기도 해. 스트레스로 충동구매도 자주 하고, 갑자기 믿지도 않는 사주를 보기도 한다니까? 어느 모임을 가든 도파민을 담당하며 광대 노릇을 자처하는 게 나야. 참 재밌어. 어떤 이는 나를 한 없이 가벼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떤 이는 나를 엄청나게 성숙한 인간으로 여긴다는 게. 사실 나는 둘 사이를 하루에 오천 번씩 왔다 갔다 해. 그니까 아까 오전 10시에는 엄청난 양아치 철부지였는데, 지금은 쫌 성숙한 인간인 뭐 그런 거?


  나는 참 로맨스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연애를 하기에 너무 많은 마음을 모두에게 두고 있거든. 내겐 생판 모르는 남이 연인보다 우선일 때도 많아. 가족과 친구는 동의어 거나 유의어에 속하고, 언제나 그들이 최우선이며, 차선으로는 인류 차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그 누구든 될 수 있거든.(물론 이 순위는 나를 제외한 순위야. 나는 0순위거든) 연인은 뭐랄까, 저것들과 동순위가 될 수는 있어도, 갑자기 1순위가 되진 못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를 할 때, 서로를 최우선하고 나머지는 배제하길 바라지만 그게 너무도 싫어. 그걸 원하는 순간부터 내겐 연애가 업무처럼 느껴져. 몰라 어렵게 말했지만, 어쨌든 내겐 소중한 게 너무 많아서 어떠한 연인도 그 모든 소중한 것을 이기진 못했어. 연인 사이에서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연락의 빈도였어. 아무리 친한 친구도, 가족도 모든 일과를 낱낱이 보고하며 서로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지는 않잖아? 그런데 연인 관계에서는 그걸 바라다니, 내겐 그게 정말 공문 기안 상신보다 어려운 일이었어. 더럽게 재미없고, 이해가지 않는 역할극 같아. 난 친구들이랑도 그렇게 길게 이야기 잘 안 하거든. 단톡에서 실없는 농담이나 따먹을지는 몰라도, 전화도 용건만 간단히 하는 파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여기까지 왔나. 나는 구보씨도 아닌데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나 봐. (혹시 이 농담 이해했어?) 원래는 네가, 내게 친구라기보다 그냥 아는 타인의 범주에 있었어. 그런데 그냥 내가 솔직하게 네 결혼식에 못 가는 이유를 설명했을 때, 그때 갑자기 너와 더 긴밀해지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는데, 그렇게나 잘하는 게 많은 네가 과일 하나 못 깎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슨 절친같이 느껴지는 거야. 나도 과일을 굉장히 못 깎거든. 가부장에 쩌든 우리 아빠조차 내게 과일만큼은 못 깎게 할 정도로 진짜 진짜 못해. 좋게 말하면 사과가 현대 미술이 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먹을 살이 없어지는 거지 뭐. 그리고 좀 민망한 말인데, 네가 내 글을 읽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되게 기쁘면서도 갑자기 네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지더라. 내게는 친구가 제일이기 때문에 어제 고작 그 몇 분간의 대화로 너는 내 인생에서 제대로 박힌 돌이 된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연인보다 친구를 더 제일로 친다는 거, 앞에 쓸데없이 길게 설명했잖아? 좀 극적인 효과가 났나 몰라. 아마 너랑 나는 7월에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한 일 년은 서로 대화 없이 살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으로 10분 정도 연락을 하고, 또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니까 굉장히 마음이 따뜻해졌어. 물론 자주 연락해도 돼. 생각의 결이 비슷한 사람과 생을 나누는 건 늘 즐거운 일이거든. 앞의 상상은 그간 우리의 사이에서 수집된 정보를 기반하여 도출한 결과물이라 약 1~99퍼센트 사이의 오차가 존재한다.


  그간 알고 지낸 10년의 시간보다, 어제의 10분이 너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는 게 참 아쉬우면서도 설렌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어릴 적 내가 너와 참 친해지고 싶었했단 걸 기억해 냈거든. 그때의 나는 나보다 멋져 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라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게 너였어. 지금 나는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는 듯해. 가성비 끝내준다. 메시지 한 번으로 지난 설렘도 경험할 수 있다니. 요즘 나는 누구와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해. 그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났고, 상호작용하고 있거든. 조금 재수 없겠지만, 나보다 멋있는 사람을 예전만큼 많이 만날 수도 없어. 왜냐면 내가 또래에 비해서 너무 멋있어졌거든. 근데 알지? 나의 멋있음 기준은 남들과 좀 많이 다르다는 거. 자본주의적 미학에 많이 어긋나는 기준이라는 거.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아렌트의 고뇌와 에코의 심드렁함과 뜬금없는 정통 개그물을 더 닮았다는 걸.


  공개된 공간에 이렇게 사적인 글을 써도 되냐고? 그럼 물론이지. 어차피 그러려고 만든 공간인걸. 왜냐면 이곳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너이거나, 네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거든. 나는 벌써 내 글에 좋아요를 자주 눌러주는 몇몇 분들의 닉네임을 다 외우고 있어. 가끔 마이쮸를 먹다가 그분들의 삶에도 달달한 조미료가 좀 쳐지길 하면서 종교도 없이 짧은 기도를 올리곤 해. 나 홀로 내적 친밀감을 갖고 있거든. 혹시 또 모르지. 이 편지의 M이 10명이 될지도, 100명이 될지도,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닐지도. 어쨌든 내게는 모두가 최소한 차선의 존재들이니까. 모두에게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어서 괜찮아.


  내 모든 글은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대자보 같은 글인 거야. 그래도 오늘만큼은, M, 너와 함께해서 좋다. 그럼 이만 줄일게.


애정을 듬뿍 담아

세상의 모든 M들에게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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