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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공 Jul 19. 2024

두 조각

1


  몇 년 만에 보는 지조차 모를 친구를 만났다.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무더운 날이었다. 카페 에어컨이 너무 강해 따뜻한 음료를 고르자 직원분이 '혹시 추우신가요?'라고 묻는다. 너무 춥다고 답하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정말 죄송합니다. 카운터 안쪽으로는 바람이 오지 않아 너무 더워서요. 이쪽이 조금 시원해지면 바로 냉방을 줄일게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 가슴이 조금 욱신거려 그냥 야외석에 앉을 테니 마음껏 에어컨을 쐬라고 말씀드렸다. 뙤약볕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바람이 더욱 기꺼웠다. 지구 만물은 기후 위기와 인간의 이기심으로 죽어가고 있다는데, 그리하여 인류 또한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그 타격은 기후 약자들이 가장 빨리 느낀다든데 솔직히 한 5년 이후의 미래와 안 보이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어린 아르바이트생의 땀방울이 더 신경 쓰인다. 내가 참 그렇다. 대의보다는 눈앞의 사안이, 지구 반대편의 모르는 사람보다는 내 눈앞의 고생이 더 무겁다. 이런 이기적인 다정으로 세상 무얼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내 말에 조금이나마 웃어주었다.


  친구는 야외석에 앉아 책을 잠깐 읽다, 길가에서 뜨개질 하는 할머님에게 수세미를 세 개나 구매해 왔다. 딸기, 가지, 당근이었나? 색색의 실과 아기자기한 모양이 귀여웠다. 내게도 하나 준다고 하였지만, 집에 천연 수세미가 있어 거절하였다. 친구도 나와 비슷했을까? 아크릴 실의 미세 플라스틱 문제보다, 무더운 여름, 제설용품보관함을 그늘 삼아 수세미를 뜨는 할머니가 더 눈에 밟혀 본인의 다정함을 들켜버리기로 했나 보다.


  나는 인간이 이기적인 건지 이타적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기왕이라면 모두의 방법론과 방향성이 다를 뿐, 저마다의 다정을 베푼다고 믿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나와 결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몇 년의 공백이 무색한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아마 지금껏 그래왔듯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다 가끔씩 만나게 되리라.


2


  뮤지컬 <유진과 유진>을 보았다. 어릴 적 넋 놓은 듯 오열하며 본 책이 두 권 있는데, 하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고, 남은 하나가 <유진과 유진>이었다. 고백하건대 괴로워서 두 번 읽지는 못하였다. 함께 보러 간 이가 코미디극보단 <유진과 유진>이 나을 것 같다고 하여 용기 내보았다. 근래에 이렇게 운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많이 울었다. 관객들의 울음소리에 울기도 하였다. 극이 끝나고도 사실은 목놓아 울고 싶었다.


  시절 속에 묻힌 나는 제제이기도 했고, 유진이기도 했다. 수많은 유진이들만이 유진이를 이해한다. 나 또한 유진이기에 그 이해 속에 존재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경이도 있을 거다. 그게 사무치면서도 위안이 되고, 외로우면서도 든든하다. 앞으로는 제제도, 유진이도, 유경이도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어딘가에는 또 다른 자신이 분명 존재하기에 서로 포옹하며 살아감을 알았으면 좋겠다.


  다정은 자신의 확장일 것이다. 나를 확장하는 만큼 세계 또한 넓어진다. 그렇게 다정한 세계가 도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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