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사진첩 즐겨 찾는 항목 정리기
갤럭시와 달리 아이폰은 사진 정리가 쉽지 않다. 무엇이든 정리를 귀찮아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진에 하트를 달아둔다. 그럼 그 사진들이 ‘즐겨 찾는 항목’ 폴더에 들어간다. 참 딱딱한 울림이다. 그 안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건 내가 봐도 귀여운 나와 반려동물의 베스트 컷,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즐거웠던 여행과 콘서트들,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 선물 받은 웃긴 케이크나 잡동사니 같은 추억들, 자주 봐야 하는 정보 따위이다. 사소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단어가 있는 듯해도 넘어가자. 요 며칠 지독한 감기를 앓아 꼴이 말이 아니다. 아마 정신도 맹탕이라 그런 거다.
오래전에 임시 보호를 했던 고양이 말랑이가 보고 싶어서 사진첩을 열었다. 지금은 새로운 가족과 로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내게는 말랑이가 더 익숙하니까, 내 글 안에서라도 여전히 말랑이인 걸로 하자. 말랑이는 이름처럼 말랑말랑한 아이였다. 얼굴도 눈도 동그란 삼색 고양이. (대부분의 삼색냥이는 여아이다. X염색체로만 털 색이 섞여 발현되기 때문이라 하는데, 자세한 건 이과한테 물어보는 걸로.) 한쪽 귀가 생각보다 많이 잘려서 괜히 걱정되던 말랑이. 말랑이는 사람을 정말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좋아했다. 새벽마다 엉덩이를 하도 얼굴에 부벼대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둥절이랑 같이 찍은 사진보다 반년남짓 함께 한 말랑이와 같이 찍은 사진이 더 많다. 내가 과제를 하고 있을 때면 능청스럽게 노트북 위로 올라와 마음껏 나의 과제를 망칠 만큼 사람을 잘 따르던 말랑이는 이제 나를 완전히 잊고 새 가족에게 한껏 애교를 부리며 살고 있을 거다. 말랑이의 애정이 지나간 자리에, 말랑말랑한 사진과 추억이 옅게 남았다.
계속 사진을 넘기다 보니 한 땐 정말 친밀했지만 이제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사람들과의 추억도 지나간다. 그래도 하트를 지우진 않는다. 분명 즐거운 한 때였다. 돈도 없고 내세울만한 직업도 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으나 넘치는 체력과 웃음으로 매일을 함께하던 시간이 스와이프와 함께 스쳐간다. 정말인지 저 때엔 밤새는 게 거뜬했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 시절인연이라 하든가?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내가 가장 활발했던 시절이 담겨있었다.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하며 떠난 이가 매번 남기던 절절한 사랑고백도 남아있었다. 으, 이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금방 하트를 지워버렸다. 볼품없는 존재를 특별하다 여기며 사랑했던 과거가 아직 부끄럽기 때문이다. 모든 너희는 내가 사랑했을 때나 특별하지, 원래는 참 보잘 데 없는데. 가끔씩 내가 부여한 특별함에 취해 나를 초라히 여기며 막 대하다 떠나가는 존재가 있다. 이들에겐 즐겨 찾을 가치가 없다.
교생시절 한 달간 묵었던 숙소 사진도 지나간다. 엄청 좁은 원룸이었는데, 어차피 침대정도의 공간만 이용하는 내겐 최적의 장소였다. 창문 바로 옆에 침대가 놓여있어 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색을 보여주는 방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하얀빛과 푸른빛을 사랑했다. 그 외의 풍경은 건물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종종 동생과 친구들을 불러 해가 지는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을 곁들였다. 바로 옆 건물에는 백색소음이라는 이름의 책바가 있었다. 가지구이가 기깔나서 약간 과음을 한 다음 날이면 벚꽃 잎을 맞으며 출근을 했다. 교생도 출근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교생실습의 기억이 떠난 자리에는 해와 꽃과 와인향이 가득한 보금자리의 상이 남았다.
정말 시답잖은 농담들도 많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동생과 삼촌이 누나네를 누네띠네 누네네띠 네네유띠라고하며 둘만 행복한 장난을 치는 캡처라든지, 어딘지 모를 가게의 벽에 붙어있던 포스트잇들, 8비트 선글라스를 쓴 철학자 포스터, 아이패드로 지낸 허상의 제사, 지도교수가 대학원생 갈구는 건 2500년이 넘은 유구한 전통이니 질질 짜지 말라는 만화의 한 컷, 조선사 교수님이 만든 이순신 뮤직비디오, 다소 험한 말의 밈들, 남양주에서 과외가 끝난 뒤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폭우가 내리던 날의 풍경,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마신 서울의밤 병, 웃긴 행동을 하는 친구들의 사진. 뭘 더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잔뜩 쌓였다. 무려 1703개의 시간이 켜켜이 묶여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약에 취해 잠깐 잠들었다가 핸드폰이 징징 울려 “또 어떤 애정이 나를 부르나”하고 화면을 보니 학자금 대출금이 빠져나가는 알림이었다. 학업이 지나간 자리에는 대출금이 잔뜩 남았다. 방해금지 모드를 설정한 다음 품 안의 둥절이를 끌어안고 다시 잠들었다.
약기운이 가시고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쓴다. 상념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록이 남는다.
추신, 즐겨 찾는 항목에 가장 많은 건 다복이의 사진이나, 그에 대한 애정이 떠나가고 지나간 적 없어 여기에 적지 않는다. 다복이는 그냥 육신만 떠나간 영원한 애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