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글의 서두가 변명이라니 치졸하긴 하다. 하지만 사실인걸? 나도 몰랐는데,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글에는 총량이 있다. 학술적 글쓰기에 매진하느라 일상적 글쓰기를 등한시했다. 스스로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건넨다. 어차피 나는 나를 봐줄 수밖에 없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하고 앞으로는 글을 자주 써야지 다짐할 뿐이다.
<6:43>
내 고양이, 둥절이에게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매일 아침 6시 43분에 빗질을 받는 일이다. 빗질을 다 받으면 공을 던지며 놀아줘야 한다. 당연히 빗질과 공 던지기는 내 몫이다. 둥절이가 정확히 43분을 매번 맞추진 않지만, 많은 경우 핸드폰 화면에 6:43이 떠있었다. 덕분에 매일같이 피곤한 나날을 지속 중이다. 요즘 둥절이는 내 껌딱지가 되어 좀처럼 옆을 떠나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도 쫓아와서 침대로 가라며 욕을 한다. (문자 그대로 욕이다. 미우에에에우어에엥 하고 우는데 이게 정말 욕처럼 들린다.) 내가 하도 침대에 누워있어서 그런 건지, 이 친구가 침대에서 궁디팡팡 받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이제 6:43이라는 숫자를 보면 둥절이를 떠올린다. 나보다 빠른 시계 위에 놓인 둥절이가 내 곁을 먼저 떠나가도 나는 늘 6:43 위에서 둥절이를 떠올릴 테다. 이렇게 죽어서도 잊기 힘든 것들이 늘어간다. 사랑은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부여하고, 삶은 점점 더 많은 사랑을 짐 지고 가는 일인가 보다.
<편지>
학생들이 주었던 편지를 하나씩 꺼내본다. 경사모 회장을 자칭했던 친구, 나를 최고의 선생님이라고 말해준 친구, 나를 정말 사랑해서 평생 연락할 거라 했던 친구,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년이 바뀌고 나서는 연락은커녕 학교에서 쉽게 마주칠 수도 없었다. 원래 아이들은 빨리 자란다. 빠르게 잊고 빠르게 사랑한다. 그래서 그때의 희로애락은 더 진하고 크고 자극적이다. 편지에 녹아든 마음이 진심임을 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라나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과 사랑을 전해주리라.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회자정리>
나를 상처 주는 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이 내게 상처 입히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는 바람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만큼 성숙해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직 덜 영근 이들, 그들의 미성숙이 나를 찌를 때 연민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지키느라 타인을 찌르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언젠가 조금 더 성숙해졌을 때, 그때는 내게 미안함을 느꼈으면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직 부족해서 사과 정도는 받고 싶으니까. 회자정리는 물리적이지만 거자필반은 추상적이다.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방법은, 그들의 삶에서 나를 추억하거나, 떠올리거나, 나로써 후회하거나, 뭐 그런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나 또한 그렇게 지나간 인연을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난다.
<마무리>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와도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제 글을 읽어주신 다정함에 감사드립니다. 그 온기로 며칠을 지내볼게요. 앞으로는 더 자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