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돌처럼 날아와 박힌다면, 기쁨은 고양이 털처럼 여기저기 흩날려 한 데 모아야만 그 형태가 보인다. 그래서 오늘은 고양이 털공 만들 듯 기쁨을 뭉쳐왔다.
1. 길들임의 미학
일전에 둥절이가 너무도 영역 동물이라 나와 함께 자지 않는다는 글을 썼다. 정정한다. 요즘 나의 좁아터진 침대 대부분을 이 친구가 차지하는 중이다. 나는 둥절이의 등살에 밀려 벽에 붙어 잠들기 일쑤다. 내가 저보다 7배 더 큰데 웃기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나를 길들이고 내게 길들여지는 속도가 이 정도였던 거다. 첫째 고양이 다복이가 하루면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럼없이 굴었다면, 둥절이의 속도는 3년이었다. 내가 새우잠을 자는 곡선에 딱 맞게 몸을 말아 붙인 둥절이를 보며 격한 감동을 느낀다. 놀랍게도 영민한 나의 둥절이는 인간이 간접등을 하나 끄면 잘 준비를 하는 것이고, 전부 끄면 잠에 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여러 가지 합의를 이루어냈다. 데스크톱으로 작업이 가능한 건 동생이 집에 있을 때에만, 나와 둥절이뿐이라면 침대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대신, 노트북을 만질 때 둥절이는 조용히 웅크리고 방해하지 않는다. 발걸음 소리만 나도 호다닥 도망치던 고양이는, 이제 내가 저에게 얼굴을 가까이해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작은 입맞춤과 큰 들숨 두어 번으로 금방 얼굴을 비켜줄 것을 이 애는 안다. 생각난 김에 한 번 더 얼굴을 부벼야겠다. 0mm의 거리감, 동물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최대의 기쁨이자 절대적 애정이다.
2. 너는 내 이름을 알아
몽준이는 나보다 거대한 13살 강아지이다. 다복이가 살아있다면 몽준이와 동갑일 터이다. 몽준이는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온몸으로 계단을 뛰어 삐약거리며 반긴다. 얼마 전 안&정 하우스에(숙모와 삼촌이 사는 집인데, 병기하지 않으면 삼촌이 삐질지도 몰라 숙모집이라고 썼다가 급히 수정하였다.) 방문했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숙모가 집을 나서며 “유경이 데리러 가는 거야. 유경이. 네가 좋아하는 유경이”하면 귀신같이 알아듣고 기다림 태세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몽준이가 내 이름을 안다! 한 선생님이 내게 “반려동물에게 꼭 본인의 이름을 알려줘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천국에서 유경 씨를 찾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아주 진지하게 털어놓으신 적이 있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몽준이가 내 이름을 알고 나를 애정하여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사실이 온 마음을 적셨다. 애틋하고도 기쁘고도 미안한 기분. 너의 짧은 삶에 내가 널 찾아간 날이 몇 없음에도 나를 생의 큰 덩어리로 여긴다는 뭉클함. 그래, 내세가 있다면 나와 몽준이는 손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 그래도 네가 대학에 들어갈 나이까지 살았으면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기 강아지이기에 말이다.
3. 의외의 취향
무슨 브랜드인지도 모르겠는데, 엄마가 발이 정말 편하다며 모 브랜드의 짝퉁 신발을 하나 사주었다. (분명 엄마가 어디의 카피리고 말해주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실제로 발이 편했고 디자인도 괜찮았지만 묘하게 촌티가 나기에 요즘 유행한다는 슈즈참으로 신발을 꾸며보았다. “열두 살 같아.” 동생이 참견한다. 나는 원래도 나이에 안 맞는 차림새다. 사과머리를 하거나 고양이 귀 비니를 쓰거나 해열시트를 붙이고 돌아다니거나 하는 식이다. 출근을 할 때도,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도 아랑곳 않고 살았으니 말해 무얼 하나? 그래도 학술제에 가거나 발표를 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에는 격식을 차린다. 사실 신발을 꾸며놓고 좀 과한가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엄마가 신발을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왜 자기 것은 안 샀냐고 투정이다. 아무래도 슈즈참을 더 구비해야겠다. 엄마의 신발을 다 감당하려면 말이다. 피규어말고도(이전 글 참조) 엄마와 공유하는 의외의 취향이 생겼다.
4. 멋진 친구들
요즘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깊었는데, 그럼에도 오래간 굳건히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많다. 과장을 좀 보태어 내가 사람을 죽이고 와도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고를 치고 어떤 추태를 부려도 이유경을 사랑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참 멋진 일이다. 오늘의 기쁨 뭉치는 그런 의미에서 쓰였다. 며칠 전 나의 추태를 온몸으로 받아준 친구들도 친구들이지만, 요즘 나의 글에서 지침을 느낀다며 자꾸 안부를 물어봐주던 친구나, 내색하지 않아도 걱정하고 있던 친구들을 보며 ‘다들 알게 모르게 내 글을 보긴 하는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단 깨달음이 찾아왔다. 정제된 언어여도 감정의 찌꺼기는 묻어난다. 이곳에 그래비티처럼 글을 그려냈지만 어쨌든 일기는 일기이디. 취미든 업이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참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써내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중부정을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저 문장이 알맞다. 불안과 우울, 회의와 염증을 감당하며 그것들을 정제해 문자로 풀어내는 순간에도, 주변에는 넘치는 기쁨의 털뭉치들이 공존한다. 비극이 돌처럼 박힌다면, 너희는 공기처럼 늘 내 곁에 있을 뿐이다. 당연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듯, 나 또한 감각을 뒤흔드는 비극보다 당연히 너희를 더 사랑한다. 그러니, 늘 너희가 나를 일으키는 것이다.
슬픔과 분노와 회의와 염증을 적는 행위도, 누군가에게 ‘너와 비슷한 자가 있어, 그리고 그 애도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시작하였다. 슬픔이 공감으로 치환될 때, 위로와 안식을 선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