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거리

by 이육공

고양이 전문 수의사가 말하길, 고양이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랑은 지극히도 인간중심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란다. 참 이상하다. 둥절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그득하다. 둥절이는 나를 엄마고양이로 생각한다. 온몸을 부비고, 함께 붙어 자고, 얼굴을 가까이하고, 내가 발이나 배를 만져도 용인해 준다. 둥절이는 확실히 나를 신뢰한다. 신뢰라는 단어도 인간이 명명한 인간의 것이기에 틀렸을까? 동물이 인간이 느끼는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면, 고양이는 고양이의 방식대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나?

‘인간이 자의적으로 명명한 사랑’을 할 수 없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수의사의 말이 잘못된 것 같다. 동물도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애정을 주고받는다. 빗질을 받는 내내 둥절이가 너무도 절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의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 고양이의 큰 눈망울에 나는 어떤 상으로 맺힐지 매일같이 궁금하다.


동물과 구별할 것 없다. 인간들이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과 타인이 말하는 사랑의 글자, 발음, 획수가 일치하더라도 그 방식과 느낌과 정의는 천차만별이다. 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저들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 언어가 생겨났고, 많은 몰이해와 불안을 대화로 맞춰나갔다. 그럼에도 언어로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어 인간은 늘 고독하다. 가끔씩 너무 궁금하다. 저 치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어떤 마음으로 나와 세상을 수용하는지 말이다.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만 보고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독심술의 재능은 부족하다. 나의 공감은 대개 나의 경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경험 밖의 것을 꿰뚫는다면 음,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지. 나와 관계하는 모두는 각각 다른 시선의 거리를 갖고 있다. 이를 테면, 교실에서 나와 학생은 꽤 멀게 서로를 바라본다. 우리는 눈높이도 다르다. 최대한 많은 아이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사방팔방을 뛰어다녀도, 매 순간 모두와 거리를 좁힐 수는 없다. 친구들과 나는 작은 테이블의 폭보다 조금 더 가까운 시선으로 마주한다. 친밀할수록 몸이 기울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면 시선의 거리가 코앞으로 당겨지겠지만, 연인과 반려동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계에서 시선이 그렇게까지 가까울 일은 없다.


시선이 가깝더라도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리적으로 눈이 마주칠 뿐 시야에 내가 없는 느낌, 그러니까 뭔가 내가 아닌 건너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느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무어라 부를까? 삶의 결이 안 맞는 사람? 친해질 필요 없는 존재? 어색하고 어려운 사람? 눈을 맞출 시도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그게 사회화라는 것이니까. 아니면, 그게 노력의 시작일 수 있으니까.


많은 사람과 매일같이 시선을 맞추지만 그 눈에 담긴 애정이 나의 애정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참 귀엽다. 언어로도 채울 수 없는 감정의 간극과 이해의 틈을 어떻게 해서든 좁히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애정을 퍼붓는다. 늘 그랬듯 인간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열심히 사랑하고, 같은 방법으로 사랑받지 못할 때 슬퍼하는 초라하고도 어여쁜 존재가 인간이다.


그게 참 다행이다. 시선이 닿지 않더라도, 수많은 인간이 사랑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상처받더라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는 용기가, 상대를 위해 상대의 방식을 흉내 내려는 노력이 참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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