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시작

by 이육공

한참 나타나지 못했는데, 대학원 (명분상의) 종강 때문이었다. 8월까지 합하면 한 이삼 주 정도의 여유는 생기지 않을까 싶다. 뭐 하나를 꾸준히 미리 해놓질 않아서 발등에 불이 튀다 못해 발등 튀김이 되었는데, 15시간 동안 총 25장의 페이퍼를 적어 제출해 내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정말 당분간 글자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글감이 생각나고 시간이 뜨니 글쓰기에 대함 부채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25장의 페이퍼를 쳐내고 세미나에 가기 위해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새치가 늘었다. 그냥 하나, 둘 는 게 아니라 한 30개 정도 생겼다. 이제 나는 구전 설화에서 하루아침에 백발이 된다는 말을 믿는다. 몇 주 전 대학원 선생님께서 ‘얼마나 고생했으면 머리가 셌어‘라고 하셨는데 한 두 개 난 걸 말하시는 줄 알고 ’에이 저 원래 새치 있었어요‘하고 순진하게 답했다. ‘아니.. 전보다 많은데..’하고 중얼거리시는 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종강하고 이제야 거울을 제대로 들여다보니 진짜로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겨우 삼십 대에 이럴 일인가?


새치는 유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딱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에 흰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삼 남매가 엄마의 머리에 달라붙어 흰머리를 뽑아주던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건 유전이 아니고 대학원 때문에 그렇단다. 자기는 그 나이대에 이혼하느라 심력을 소진해서 머리가 세었다나? 믿기지 않아 동생의 머리카락을 뒤지니 정말 놀랍게도 흰머리가 하나도 없다. 동생은 ‘언니도 계속 쇼츠봐. 생각하지 마. 그럼 흰머리 안 생겨’라는 말이나 한다.


천천히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온전한 백발이 되고 싶었는데, 그 나이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학기가 지날수록 머리를 더 써야 할 테니 새치가 늘어날 일만 남았다. 뭐랄까 충격까지는 아닌데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고사리 손으로 엄마의 흰머리를 정리하던 아이가 그 시절 엄마의 나이가 되어 머리가 세고 있다니. 내가 삶을 언제 이만큼이나 여행했지? 핸드폰에 열중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내릴 역을 지나친 기분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오면서 그다지 성실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았고, 돈이 많지도 그렇다고 명예를 얻지도 못했다. 얻은 거라곤 엄청난 학자금? 그래도 인간관계만큼은 잘해나가는 중이다(친구 한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성실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질 못한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우리 집에 cctv라도 달아두면 그 말이 안 나올 텐데. 세미나 뒤풀이에서 교수님이 날 정말 의아하게 쳐다보며 “성실한 사람은 불성실해야지라고 말하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니라고 고사해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그런가? 하긴 내 말버릇이 ‘대충 살자‘, ’대충 살고싶다‘이긴 하다. 교수님의 논리 대로라면 난 대충 살지 못하는 인간이다.


모르겠다. 어쩌면 새치는 내가 치열히 살고 있다는 물리적 증거일까? 새치와 삶 사이에 명확한 인과는 없지만, 얼추 끼워 맞추면 상관관계정도는 있을 듯하다. 일단은 좀, 한 이주 정도 고양이랑 침대 위에서 그 어떤 할 일 없이 쉬고 싶다. 뭘 해야 하는데 쉬고 있다는 죄책감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말이다.


어제는 모처럼 신생아마냥 먹고 자고 놀기만 하며 보냈다. 이제 다시 주말에 있을 콜로키움 사회 준비와 다음 주의 연구 보조를 준비해야 한다. 내 천성은 게으른 한량인데 나의 부채감이 늘 자처하여 일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걸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호하다. 6시 약속에 올 친구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일단 성실하다고 해야겠다. 그다지 생산적인 글은 아니지만, 어쨌든 교수님 말씀은 보통 틀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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