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를 잃은 것들

by 이육공

지하도의 타일과 계단 사이 거칠게 칠해진 시멘트 위에 나뭇잎을 꼭 닮은 나방이 붙어있다. 천적에게서 몸을 숨기기 위해 저런 모습을 취했을 것이다. 나무가 거의 없는 대학가 주변의 지하도에서 나방은 제자리를 잃었다. 회색과 초록이 대비, 나방의 날개는 무늬까지 나뭇잎을 닮았다. 이곳이 숲이었다면 분명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갔으리라. 스스로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변해버려, 나방은 그만 제자리를 잃고 말았다.


유독 벅찬 여름이다. 지금 느끼는 여름이 앞으로의 여름 중 가장 버틸만한 시절이라는 게 야속하기만 하다. 움직이기만 해도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사람들의 표정에 여유가 없다. 날씨 탓에 여유가 없어졌다면 계절이 바뀔 때 제자리를 찾을 마음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제자리를 잃을 것처럼 굴어왔다. 어디에서도 사랑받지 못해 서러운 아이처럼, 애를 써서라도 모든 것을 미워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군용 로봇의 상당수가 비효율로 인해 회수된 사실을 아는가? 상당히 기괴하게 생긴, 누가 봐도 기계에 불과한 로봇임에도 많은 군인들이 자신의 반려 기계를 구하기 위해 오열하며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감정 없는 고철 덩어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사상자가 한 둘이 아니다. 수많은 가전제품 중 로봇청소기의 폐기율이 가장 적다고 한다. 청소기에 이름을 붙이고, 정도 붙였나 보다. 생성형 AI가 실수로 리셋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인간은 무엇이라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고독하여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세상이 사랑할 대상을 일그러뜨리고 본능을 꺾어버리고 타인을 버리게 하고 종국에는 나의 자리까지 잃게 만들지는 않았나? 그냥 한 번 크게 숨 쉬고 웃어버리면 될 일을, 크게 문제 될 것 없으니 한 번만 친절히 다가가면 될 일을 짜증스럽게 지나치진 않았나? 무엇이든 사랑해 버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랑을 포기할 때, 그때 인간은 제자리를 잃고 인간다움을 상실하는데도 말이다.


내가 회색의 시멘트인지, 청록의 나방인지 애매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둘 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음을 찾아 내게 날아든 누군가에게 메마른 시멘트처럼 굴기도 했다. 천적을 피하려 숲을 찾아 날아다니다가 끝내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은 나방이 되기도 했다. 요즘은 중력이 너무 가볍다고 느낀다. 한 뼘정도 허공에 붕 떠서 하늘에도 땅에도 속하지 않는 그런 일상이다. 특별히 우울하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많은 나날들을 진창에 빠져 땅 밑으로 꺼지는 것처럼 살아온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어쩌면 다정할 기력이 부족한가 보다. 어딘가에서 다정을 채워오면 다시금 다정을 나눠줄 수 있겠지. 마음을 좀 충전할 때가 왔다.


세상이 각박하여 제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여 모두에게서 조금씩 평화를 얻길 바란다. 그리하면 세상 자체가 진정한 의미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나부터 시작할 것이나 아직 붕 떠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여 당분간은 다정한 책을 읽어야겠다. 수많은 번뇌의 고통 속에서도 결국은 사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수많은 문인들의 몸부림과 어쩔 수 없는 그 서글픈 다정함을 읽어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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