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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여행을 떠나다

6. 엔텔로프캐년 & 그랜드캐년

by 행복고래

5월 7일 (수)


전날 저녁부터 날이 흐리더니 밤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늘은 그랜드캐년을 보는 날이라서 날씨가 안 좋으면 일정이 엉망이 될 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걱정만큼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고 오전에만 약간 이슬비가 내리는 정도였다. 페이지의 숙소 Super 8은 조식도 꽤 괜찮게 나오고 시리얼이나 쨈, 버터 등이 다양하게 나와서 맛있게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조식을 먹을 때까지는 비가 와서 만약 일정대로 홀슈스 밴드 관광일정이 오늘 아침이었다면 제대로 된 풍경을 못 볼 뻔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첫 여행지는 엔텔로프캐년이었다. 애리조나 주 인디언 투어로 진행되는 코스였는데 특이하게 가이드는 동행할 수 없고 오직 인디언들의 안내만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최근 10년간 인스타그램 같은 SNS 인기로 인해 갑자기 알려지기 시작한 엔텔로프 캐년은 사진작가라면 한 번쯤 와봐야 하는 코스가 되었고, 일반인들도 인스타 사진 한 장 건지기 위해 사진에 목숨을 거는 곳인데 비가 오면 갑자기 협곡에 물이 차서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과거에 비가 많이 오진 않다가 갑자기 둑이 터지듯 협곡에 물이 차서 관광객이 수몰된 적이 있다고 하니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천만다행으로 비가 이슬비 정도로 와서 우산을 살짝 쓰거나 모자를 쓰는 정도로도 관광이 가능했다. 인디언들의 통솔을 받으며 승합차로 이동했는데 가이드가 인디언들의 약간의 횡포(?)나 불친절에 겁을 줘서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히 우리가 만난 인디언 가이드는 친절해서 재밌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포장 길이었고 좁은 승합차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부대끼다 보니 축축한 공기가 여간 답답할 수 없었다.


엔텔로프캐년에 도착해서 신비한 붉은 오렌지 빛 협곡 사이로 탐험이 시작되었다. 바닥은 모래가 깔려있고 빙하가 훑고 지나간 흔적인지 사람이 깎아 만들 수 없는 신비하고 유려한 곡선들을 가득 채운 절벽이 양 옆에 세워져 있었다. 하늘이 한 줌 정도로 둘러쳐 있었는데 빛이 들어오면서 오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신 감탄하면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바빴고, 사진을 찍다가 뒷일행들이 지나가지 못하면 인디언들이 북을 치며 앞으로 이동하라고 소리 질렀다. 민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는 한국 사람들 답게 제때제때 이동했지만 사진 욕심에 이동 속도는 조금씩 늦어졌다.


사진을 찍었을 때는 황홀한 풍경이 온전히 잘 사진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막상 숙소로 와서 사진을 봤을 땐 유명 사진작가에는 한참 못 미쳐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 말로는 유명 작가도 몇천 장 찍어서 한 장 건지는 거라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그 오묘한 협곡의 곡선들을 시선 한가득 훑고 지나가면 묘한 나른함과 쾌감이 들어서 계속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었다.


인디언 가이드에게 인당 3달러씩 팁을 꼭 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준비해 갔는데 인디언 가이드가 직접적으로 달라는 이야기를 안 하고 언제 줘야 할지 타이밍을 제대로 못 잡아서 - 비도 살짝 내리고 차로 이동해야 하고 약간 어수선해서 - 우리 팀은 팁을 못주고 처음 출발지에 돌아왔는데 다른 팀들은 다 줬다고 했다. 약간 미안한 마음에 인디언 인솔자 중에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사진도 잘 찍어주고 친절한 가이드였는데 팁을 못 받아서 서운해하진 않았을는지 약간 미안했다. 팁이 잘 되었길 바랐다.


다음 여행지로 드디어 그랜드캐년으로 향했다. 비가 이제 어느 정도 그쳤지만 날씨가 악화되면 큰돈을 들여 예약한 경비행기 선택관광을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살짝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랜드캐년의 웅장한 모습을 비구름이 다 가리는 건 아닐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그랜드캐년을 이번에 못 보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다행히 비는 점점 잦아들었고 구름도 서서히 걷혀갔다. 애리조나 사막에서 이렇게 비걱정하는 것도 참 드문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럴까 말까 한다고 하니 참 하늘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이랄까. 그래도 버스 창밖으로 그랜드캐년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고 있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랜드캐년은 여러 뷰포인트가 있는데 우리는 데저트 뷰 포인트, 매더 포인트 두 군데를 들렀다. 둘 다 전망이 굉장히 좋았고 그랜드캐년의 여러 방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데저트 뷰 포인트나 매더 포인트나 굉활한 그랜드캐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웅장하고 남성스러운 협곡이 하늘 아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니 정말 신비로웠다. 저 멀리 협곡의 평평한 부분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매더 포인트가 가장 그랜드캐년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탁 트인 그랜드캐년을 가슴에 한가득 담고 왔다. 사진으로 다 못 담는다는 표현을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자연에 비해 나는 너무나 작은 존재이고, 아등바등 사는 게 하찮게 여겨졌다. 이걸 보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하면 웃긴 이야기일까. 그래도 대자연의 웅장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웃긴 이야기지만 매더 포인트는 한국 사람들의 발음이 잘못 전해지면서 마더 포인트라고 알려지면서 엄마 포인트는 언제 가냐는 관광객의 성화를 들어야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엄마라는 표현에 이상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사람들이 또 재미난 상상을 한 것이리라.


그렇게 그랜드캐년을 마음에 담아두고, 경비행기장으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조그만 공항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듯한 곳인 듯 한글이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구경했던 코스가 지도로 걸려 있었는데 우리가 버스로 이동했던 마더포인트를 비롯해서 그랜드캐년의 곳곳을 상공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늘에서 그랜드캐년을 바라보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하니 계속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경비행기는 우리 가족 일행만 타는 조그만 게 아니라 20명 정도 한꺼번에 탈 수 있는 비행기였다. 비행기 안은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었고 소음을 막을 수 있는 헤드폰이 좌석마다 있었다. 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알았지만 헤드폰으로 귀를 막지 않으면 비행기 소음이 너무 시끄러웠고 옆의 사람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혹시나 사고 날까 걱정했지만 그렇게 흔들림 없어 사뿐히 이륙했다. 한 10분간은 사막의 초목만 듬성듬성한 모습만 보다가 멀리서 그랜드캐년의 모습이 보였다. 콜로라도 강의 굽이 치는 강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매더 포인트에서 보이지 않았던 협곡 아래 콜로라도 강의 모습과 평평해 보이기만 했던 협곡 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협곡 위의 뭔가 굉장한 것이 숨겨진 있진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과거 인디언들은 생각보다 게을렀던 게 아닐까. 건축물 비슷한 것도 없었고, 유적이나 보물의 흔적도 없이 그냥 협곡 위에도 건조한 사막이었다. 나중에 설명을 들어보니 굳이 인디언들이 그 위에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아메리카 대륙은 크고 넓었고 축복받은 땅이었으니까.


40분간의 비행을 하면서 바위 하나, 초목 하나까지 기억에 담으려고 애썼다. 너무 멀리 보여서 휴대폰을 찍은 사진들은 너무 볼품이 없었던 탓이었다. 너무 짧게만 느껴졌던 비행을 마치고 예전에 스위스에서 경비행기를 못 타봐서 아쉬웠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 버킷리스트 하나였던 만큼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지만 선택관광 중에 가장 비싼 돈값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음에는 안탈 것 같다고 와이프에 말했다. 다음에 또 언제 올진 모르고 그냥 한소리라 서로 웃었다.


경비행기 관광을 마치고 LA로 가기 전에 중간 도착지인 네바다 주의 라플린으로 이동했다. 저녁에 이동하는 탓에 라플린 관광은 할 수 없지만 여기도 네바다의 특성상 카지노가 호텔 여기저기 있는 곳이었고, 라스베이거스의 복수전으로 여기서 한몫 잡아야 한다고 가이드가 약간 바람 아닌 바람을 넣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한 시간 정도 와이프와 블랙잭과 주사위 크랩을 해서 70달러 정도 벌어들이는 쾌거를 이뤘다. 와이프는 블랙잭이 생각보다 재밌다며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내일도 빡빡한 유니버설스튜디오 일정이 있어서 돈 벌었다는 기분만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좀 더 했으면 집중력을 잃어서 아마도 다 잃었을 것이다. 아니면 잭팟이라도 터져서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을 벌었으려나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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