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때부터 자잘한 상처에 붙여주던 반창고가 우리 집 아이들에겐 만병 통치약인가 보다. 어디만 살짝 부딪혀도 엄살을 떨며 반창고부터 찾는다. 게다가 아이용 반창고엔 뽀로로나 헬로 카봇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으니, 울 아이들은 몸을 꾸미는 화려한 액세서리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거실에 앉아 있으면 아이들이 서로 내 무릎을 차지하려 다툴 때가 있다. 아빠의 양반 다리가 편안한지 서로 앉으려 한다. 아쉽게도 아빠는 한 명이기에 결국 비좁게 무릎 양쪽에 앉게 된다. 이 조그만 생명들을 양팔 가득 채워 안을 때의 기쁨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다툼만큼은 아이 둘을 가진 아빠가 누릴 수 있는 호사이기에 모르는 척 말리진 않는다. 아이들이 무릎에 앉으면 서로 경쟁하듯 내 신체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만진다. 신기한 건 여태까지 여러 번 발견했던 아빠 몸의 흉터가 아이들에겐 아직도 호기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팔목에 있는 꿰맨 자국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했던 질문을 자주 한다.
"아빠, 이 상처는 아빠가 우리들 요리해 주다가 생긴 거야?"
"응. 아빠가 너희들 먹으라고 떡갈비 만들다가 다친 거야."
"아빠 많이 아프지? 민결이가 반창고 붙여줄게."
"아빠, 아빠, 물결이도 붙여줄게요."
중식도로 애들이 먹을 떡갈비를 다지다가 미끄러져 손목을 베인 적이 있었다. 상처 난 이유를 물어보는 아들에게 별생각 없이 대답해 줬는데, 녀석은 그 사실을 기억하곤 흉터를 볼 때마다 내 팔목을 걱정해 준다. 아빠 이제는 괜찮다고 누누이 말해줘도 아이는 내 팔에 반창고를 붙여준다. 아마도 걱정보다는 반창고를 붙여주는 행위 자체가 재밌어서 그럴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분명 아이들이 붙여주는 반창고엔 치유 효과가 있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반창고를 꾹꾹 누르며 이젠 괜찮을 거라 말하는 아이의 머릴 쓰다듬어 줬다. 고맙다는 말을 채 듣기도 전 뽀로로 뛰어가 동생과 노는 아이를 보다가 내 마음 어딘가에 새살이 돋는 게 느껴졌다. 가슴은 뜨끈해지고 간지럼이 올라왔다.
작은 모습의 내가 커다란 나를 걱정한다. 자식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 아닌가. 아이들의 손길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순수 앞에선 오랜 시간 담장을 쌓듯 상처를 둘러싼 마음의 벽이 쉽게 허물어진다. 육아가 과거의 결핍을 보상해 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다리는 아이들이란 것이다. 어린 나를 보듬듯 아이들을 돌보는데, 그런 나를 아이들이 먼저 안아준다. 익숙한하루의 빛에 왜 그런지눈이 시리다.
...(전략)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