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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Sep 02. 2022

시인을 찾아서

류시화 시집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선장님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어요?"

"왜 또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십니까?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전 있잖아요,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선장은 VJ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이어가며 멋들어지게 시를 읊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한 잔은 떠나간 너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이형기의 낙화와 조지훈의 사모가 뒤섞인 시를 암송하는 선장은 석양을 뒤로한 믹스커피 한잔을 건배합니다. 그 한잔이 위스키처럼 보이는 우수에 젖은 뱃사람. 이는 예전에 방송된 다큐 3일 중 문어잡이 선장의 에피소드에 나온 모습으로 유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인지 이 영상이 다시 한번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는 왠지 거리가 있어 보이던 한 선장의 낭만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늦었지만 뜨거운 반응을 보였으며, 최근에는 범죄도시의 장이수역으로 인기를 얻은 박지환 배우가 서브웨이 Cf로 선장 역을 패러디하며 그 열기에 동참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90년대 초반 학번의 선배들까지는 시를 한 두 개 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지(할 일이 없었는지) 이십 대 때는 잦은 술자리가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선배들은 별거 아닌 안주를 앞에 두고 후배들에게 예술과 사랑 그리고 인생을 논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가 하는 인생 얘기에 무슨 감동이 있었겠냐만은 경험의 궁색함을 애써 감추려 시라도 하나 읊을 때면 너도 나도 분위기에 취해 서로의 잔을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시를 읊는 선배와 듣는 우리 모두는 시인이었습니다.


전역을 하고 늦은 나이에 복학한 대학가의 분위기는 빠르게 변해 있었습니다. 파릇한 새내기들은 술자리의 지루한 이야기보다는 즐거운 게임을, 점심으로는 학교 식당보다 나가서 먹는 파스타를 선호했습니다. 빠른 변화에 적응을 못해 도태 직전인 늙은 야수들은 대학로의 구석을 찾아 겨우 명맥을 유지했지만 이마저도 제가 졸업을 할 때 즈음엔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익숙한 세대에게 시는 어떤 의미일까요. 읽는다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보면 트위터의 짧고 명료한 글들이 시보다는 친숙한 게 사실입니다. 시는 너무 어렵고 올드합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보아도 도통 순위에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가 봅니다. 하지만 선장의 모습에서 느낄 있었 시를 암송했을 때의 매력은 눈으로만 읽을 때와는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술에 취해도 암기를 할 정도로 내면에서 충분히 녹여진 시는 공감각을 일으켜 귀로 들리는 착각마저 줍니다. 운율의 마법인지 나름의 리듬도 생기죠. 이를 입 밖으로 토해냈을 때 분위기만 따라준다면 화자와 청자는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시와 시인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시인들의 시인 이성복, 방송으로 더 유명해진 류근, 가지 않은 길의 프로스트, 소동파의 적벽부......

브런치를 빌어 어려운 시로 허영도 부리고 싶지만 행여 그 빈곤이 들킬까 시도는 훗날로 미루고 취지에 맞는 시를 찾으려 책장에 박혀있던 시집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요즘 혼잣말이 늘어 "자고로 좋은 시란 외로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위로조차 주는 것, 그런 게 시인데 말야~ 고런 것이 어디에 있을까"라고 중얼대며 서있는 저를 보고 우리 집 둘째는 눈만 끔뻑입니다.

   

낙타의 생은 류시화의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란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시는 고독한 실존의 모습을 낙타로 비유하며 보는 이에게 기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돌아보니 내 지나간 삶도 낙타와 다르지 않았구나라며 삼연한 아픔을 눈앞에 그려 줍니다. 시집을 더 펼쳐보면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본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등 시인에게 오래 머물다 나왔 시들이 내면의 상처를 꽃으로 치환하는 정화의 힘마저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는 시를 멀리했기에 말하는 이도, 들어주는 이도 없는 대합실에서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팍팍한 삶에 시 한 편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는 시인만이 아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다른 지역에는 비가 온다던데 우리 동네는 하늘에 구름만 높게 걸려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뒤로하고 일을 위해 앉은 책상 위에는 며칠 전 집에서 가져온 시집이 보입니다. 책의 앞면과 뒷면이 내 기억과는 다르게 볼 때마다 뒤집혀 있는 걸 보니 많이도 펼쳐보았네요.



  

낙타의 생  -  류시화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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