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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Dec 29. 2022

연말이었다

멜 깁슨, 헬렌 헌트 - 왓 위민 원트 (what women want)

좀 늦은 감이 있지만 SNS를 통해 유명해진 마법의 문장이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써놓고 끝에 이 말만 붙이면 그럴싸해 보인다는 그 문장, '여름이었다'. 

일본 문학에서나 봤을법한 이 문장에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는 건 짧은 텍스트 한 줄로도 각각의 추억 속 이미지를 쉽게 끄집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뜨거운 기억을 남기고 가나 봅니다.


어제 오랜만에 소규모 회식에 참여했습니다. 가볍게 술을 마시며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서로 위로해줄 생각으로 참석한 자리는 아쉽게도 그 끝이 제 바람과는 달랐습니다. 평소 격이 없게 지내던 남녀 선후배 A와 B가 격한 언쟁을 벌여 갑작스레 자리를 파하게 됐는데, 다툼의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저에겐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몇 년간 담당 업무와 육아에 치여 내년에는 비교적 수월한 부서 및 업무를 담당하고 싶은 여후배 A와, 결국 자신이 편하고자 선택한 업무에 왜 생색을 내느냐며 모두 힘든데 너무 이기적이라는 입장의 남선배 B.


잊고 지냈지만 연말에는 참 많이들 투닥거립니다. 한해의 피곤함이 극에 달할 때 즈음의 예민함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는 문제의 핵심은 A와 B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음 날 서로를 피해 다니며 애써 민망함을 감추는 그들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었습니다.  깁슨, 헬렌 헌트 주연의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입니다.     

        



닉 마샬(멜 깁슨)은 광고기획자로 화려한 돌싱입니다. 닉 전처의 표현을 빌자면 '남자들의 남자'로서 마초적이며 여성들에게 던지는 추파를 술자리의 자랑스러운 훈장 정도로 여기는 남자입니다. 물론 파란 눈과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은 그의 매력에 쉽게 빠지기도 하지만,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의 조건은 다 갖춰 호감과 비호감 사이를 아슬하게 줄타기합니다. 가벼운 여성 편력, 자신 주변의 여성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 가정에 관심이 없는 모습이 그의 사생활을 잘 설명합니다.


회사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던가요. 특유의 '남자들의 남자'같은 모습을 살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기다리던 어느 날, 닉은 상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듣습니다. 미안하지만 여성들의 구매율을 높이기 위해 팀장을 외부인사, 그것도 경쟁자였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로 영입을 했다는 진급 누락의 통보를 말입니다.


실망할 틈도 없이 새로운 팀장 달시의 여성 제품을 연구해오라는 미션을 받은 닉은 연구 제품을 사용하던 중 사고로 감전이 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단순한 감전사고가 아니었습니다. 후유증으로 신기하게도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 영화는 유년시절부터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 탓으로 마초로 자란 닉이 여자들의 속마음을 알게 되며 더 좋은 사람으로 변모해나가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잘 지은 제목 그대로 What women want, '여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가 그 질문이죠. 이를 의식하고 관찰하면 여성들이 닉에게 반하게 되는 포인트가 쉬이 보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엿듣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성들은 감동과 호감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 영화에서 닉은 다양한 여성들을 마주하는데 상황을 단순화해보자면 경청과 태도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엽니다.


남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생각에 짓눌립니다. 이와는 반대로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게 되죠. 원시부족사회부터 애들이 배고파 울면 나가서 사냥을 해오고, 타부족의 침입에는 목숨을 걸고 부족을 지킬 줄 알아야 인정받는 용사라는 기억은 대를 거쳐 DNA에 각인되었습니다. 현재라고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상황만 가볍게 바꿔보면 아내의 요청으로 막힌 변기와 하수구를 뚫을 때, 흔한 형광등 하나라도 능숙하게 갈아 끼우고 난 뒤 남자의 어깨를 보면 머리 위 천장까지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사냥터로부터 멀어진 남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인정에 대한 욕구를 발달시켜 왔습니다. 바로 해결능력입니다. 보통의 남자들은 어쩌다 여성의 고민이라도 듣게 되면 자신의 해결능력을 뽐내기 위해 합리조언을 남발하지만 잘못된 접근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여성이 처음 이후 다시는 조언을 구하지 않는 경험을 하셨다면 아쉽게도 위의 사례에 해당되는 겁니다. 쉽게 놓치고 있지만 사실 여성들의 질문은 답을 모르고 묻는 경우가 드뭅니다. 단순하설명하기 위해 맥락적 경청이란 말을 빌어 오래된 연인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오빠, 나 요즘 너무 살찐 것 같지 않아?"

"응, 요즘 보니까 삼시 세끼를 너무 공격적으로 접근하더라~ 먹는 거 줄이고 운동해서 살 좀 빼자~" 

"네 녀석의 간덩이가 얼마나 커졌는지 배를 열어봐야 알 수 있겠구나~"


이 짧은 대화에서도 남녀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문지에 죽어라 정답만을 적어주고 싶은 남자와, 질문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는 여자. 굳이 저 대화에서 나와야 했을 대답을 쓸 필요는 없겠지만 여성이 한 질문에는 원하는 바가 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맥락을 이해 못 한 남자는 경청보다는 당면문제지의 해결에만 목적을 두었으니 등짝을 맞지 않았으면 다행인 겁니다.


다시 돌아와 A와 B는 그간 쌓였던 감정과 기질의 차이도 있었겠으나,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며 존중할 줄 알았다면 연말 모임은 분노와 폭언으로 마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최소한 따뜻한 기억을 남길 수는 있었겠죠. 영화의 주인공 닉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변합니다. 우리는 진정 이 단순한 진리를 실행할 수 없는 걸까요?


요즘같이 이견의 여지가 큰 남녀의 이야기를 쉽게 단정 짓는 것도 무리가 있겠으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떨어져 살 수 없다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며,  노력의 결과는 늘 좋았다고 말입니다. 중언부언할 필요 없이 그날의 씁쓸했던 단상을 정리하려는데 뭔가 그럴듯한 마무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저도 마법의 문장을 써보겠습니다.     


대학생 시절 여자 후배에게 들은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었다. 여자들은 고양이와 같아서 안아주는 것을 싫어하지만 안 안아주는 것은 더욱 싫다는 말.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잘 알겠다가 이런 말일까. 참 다양하고 복잡한 여성특성을 이렇게 비유하니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다. 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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