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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Apr 20. 2023

노인을 위한 마을은 있다

영화 오토라는 남자

나는 오늘 죽으려 한다. 내 삶의 전부였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까지 난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있다.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는 나는 모질었던 삶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꾸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화를 참기 어렵다. 생각해 보니 마당의 잔디를 밟아놓는 녀석들과 불법주차를 일삼는 머저리 녀석들은 반드시 잡아내 혼쭐을 내줘야 속이 후련할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새로 이사 온 부부가 훼방까지 놓는다. 보아하니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 남편과 대책 없이 넉살만 좋은 아내가 이웃으로 온 것 같은데, 월세 산다는 얘길 들으니 요즘 젊은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걱정이다. 원칙도 지킬 줄 모르고 멍청이들만 넘치는 세상에 정상인이 남아 있기는 한 건가? 한심한 녀석들이 자꾸 눈에 거슬리지만 어찌 됐건 오늘 나는 죽으려 한다.


톰 행크스의 새로운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원작으로 한 '오토라는 남자'입니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극장에서 막을 내릴 때가 다 돼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 톰 행크스라는 배우를 매우 좋아하는 저지만 노인이 된 그의 모습은 아직도 좀 어색합니다. 청춘의 상징이었던 배우가 어느덧 고령의 노인 모습이 잘 어울리게 되었다니요. 극장에 걸려있는 포스터엔 괴팍한 모습의 노인이 부각되어 있고 딱딱한 어감의 제목은 흥미를 끌기엔 영 부족해 보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했음에도 국내에서의 흥행이 부진한 이유가 혹시 제가 영화를 보기 전 받은 인상과 같은 이유 때문일까요?






제가 서두에 오토로 분하여 어설픈 유서를 써본 것처럼, 이 영화는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한 괴팍한 노인이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코믹극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흘러갑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토는 자신이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에 명예퇴직을 신청했습니다. 실은 나이가 든 그가 자연스레 퇴직을 하도록 회사에서 유도한 일이었죠. 그의 마지막 근무를 축하해 주려 파티를 준비한 동료들 앞에서 오토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르쳤던 사람을 자신의 상사로 두는데 어떻게 퇴직을 안 할 수 있겠냐는 말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지만 동료들은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이 익숙해 보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동네를 순찰하며 쓰레기 분리수거, 입구 차단막 관리, 주차단속 등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참견을 하고 관리까지 합니다. 사실상 마을의 보안관인 그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예외 없이 불호령을 듣게 되니 사람들은 그를 꺼릴 법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친근하게 대합니다. 그 이유가 매우 궁금하지만 우리는 오토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지켜봐야만 합니다.




오토는 사랑하는 아내에 이어 일자리마저 잃게 되자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강박에 가까운 성격대로 자살마저 치밀하게 준비한 그에게 불쑥 현관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예상 밖의 방해에 잔뜩 짜증이 난 오토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는 그들은 최근 앞집으로 이사 온 부부입니다. 가만 보니 어딘가 헐렁해 보이는 남편은 주차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낙천적이기만 하고 임신부인 아내는 수다스럽고 핵인싸 기질이 넘칩니다. 오토는 불쑥 찾아온 이 이웃 때문에 여러 번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됩니다. 화를 내고 무시해 봐도 이 넉살 좋은 부부는 그의 삶에 너무나도 깊게 들어오려 합니다. 시나브로 정이 들 것만 같은데 과연 오토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영화는 소재의 무거움에 비해 관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톰 행크스의 괴짜노인 연기와 유쾌한 이웃들의 모습이 소소한 재미와 함께 귀엽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고령화 시대의 문제점이 여실히 담겨있어 마냥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노인일자리 문제부터 독거노인과 노년부양비, 간병인의 필요성, 실버타운 등 고령화 시대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우리는 오토라는 노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오토는 젊은 시절부터 이웃들과 함께 일궈온 마을이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빠르게 변해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사람이 다쳐도 도움은커녕 sns 동영상 찍기에 바쁜 젊은이들과 지키라고 있는 규칙을 마음대로 어겨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태가 못마땅하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고집스레 원칙을 강조하는 오토는 고립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도 모든 것이 서툴렀던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동차 밖에 몰랐던 순진한 오토는(원작의 이름을 바꾼 이유가 이 때문인 듯합니다)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여성 소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눈치채셨듯 후에 소냐는 그의 아내가 됩니다. 영화 중간중간에 보이는 회상 씬에서는 너무나도 풋풋한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의 오토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리워하는지 알게 되는 우리의 가슴은 이내 먹먹해집니다. 참기 힘든 뭉클함은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죠.


오토와 소냐는 결혼 후 한 마을에 정착을 하게 되며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궁금했던 모든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 우리는 오토라는 남자를 이해하고 연민하게 됩니다.    



저도 예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인사하는 일이 참 어려웠습니다. 처음 이사를 온 후 기쁜 마음에 위아래층에 떡을 돌렸지만 얼굴을 대면한 이웃은 단 한집이었습니다. 갑자기 현실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친절함이 배려가 아닌 부담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 가벼운 인사조차 필요 이상의 행동이라 여기게 된 저는 눈인사도 잘 안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뚝뚝한 중년의 남성, 휴대폰만 쳐다보는 여성, 거울만 쳐다보는 학생들. 저도 서서히 그들 중 하나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저에게 아이가 생기자 거짓말처럼 이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아기의 개월 수를 물으며 육아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기도 하는 겁니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이들이 만들어준 마법일까요? 실은 이웃들이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계기가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관심과 따듯한 인사 정도는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정다운 이웃들. 가치마저 빠르게 변하는 세상만큼 다양한 이유로 개인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요즘 시대의 미덕이 되었지만, 그렇게 무관심의 벽을 치고 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영화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실 인간소외현상은 흔한 소재입니다. 또한 영화 한 편 봤다고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 위에 언급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도 않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잊힌 가치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영화는 위에 언급된 문제들을 해결했을까요? 영화에는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만 저는 해답으로 가는 과정에 주목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관람한 지 사흘이 지난 후 글을 쓰며 떠올려 보아도 좋은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톰 행크스의 연기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오기에 반가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어도 그들은 위한 마을은 있는, 영화 오토라는 남자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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