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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Jan 24. 2023

문동은이라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더 글로리

오랜만에 밤을 새워 드라마를 정주행 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더 글로리는 긴 시간 동안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인 저에게 그 사실을 잊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가 넘칩니다. 복수, 학교폭력, 김은숙 작가, 개성 넘치는 악역. 고백하건대 송혜교가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멜로의 여왕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고정된 틀에 가둬놓고 멀리했지만, 티저에서 스쳐갔던 푸석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충동적으로 이거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음식으로 표현한다면 짬뽕, 짜장면, 탕수육이 한 그릇에 담겨있는 15,000원짜리 세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집에서 제공하는 달고 짜고 매운맛을 다 볼 수 있는 만수르 정식 같은 드라마. 허기짐에 욕심을 부려 배불리 먹고 나니 더부룩한 뱃속 때문에 하루종일 이 음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부담스러움조차 이 드라마와 닮아 있습니다.  




글을 쓰기 전 잠시 35년 전 출간된 이문열의 단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생각했습니다. 글로 처음 접했던 학교폭력에 대한 소설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때 받았던 강렬했던 첫인상은 시간이 흘러도 종종 비슷한 사건을 바라보는 저의 기준점이 되곤 합니다.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주인공 한병태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지방의 소도시로 전학을 간 후 학교의 급장(반장) 엄석대와 대치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서울의 한 명문 국민학교에서 민주적인 교육을 받은 병태는 그곳의 불합리한 문화에 충격을 받고 적응은커녕 반감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도전자에 대한 급장 엄석대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고 은밀했습니다. 작은 권력을 십분 활용해 유독 병태에게만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고 주변의 묵인을 유도하여 한병태를 천천히 굴복시킵니다. 제목마저 유명한 이 소설의 주요 감상포인트는 엄석대가 만든 왕국으로 들어간 한병태의 변화에 있습니다. 거대악과 맞선 무력한 개인은 결국은 이길 수 없었던 상대에게 굴복하게 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굴종의 대가로 권력의 맛까지 깨달으며 침묵의 동조자가 되어갑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가 느끼는 패배감있습니다.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물론 한병태와는 처해진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학교폭력의 문법도 달라졌죠. 7080 세대에게 익숙하다면 익숙한 금품갈취, 구타 등의 학교폭력이 시간이 흘러 보다 노골적이고 대담해졌습니다. 선생님들 몰래 약자를 때리고 괴롭히는 건 이제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나 봅니다. 더 글로리는 초반부터 잔인하고 끔찍한 괴롭힘에 집중합니다. 슬프게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니 교사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눈을 돌리고 싶은 폭력씬의 연속은 동은의 복수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선택이겠지만, 경찰과 학교마저 우습게 여기는 상류층 자제들의 집단 괴롭힘은 시청자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듭니다.


엄석대의 왕국은 어떻게 무너졌을까요. 몇 차례 시도해 본 병태의 고발은 선생님들의 무관심과 의심으로 그를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친구들을 포섭하려 노력해 봐도 오히려 구석에 몰리는 것은 병태였습니다. 저항할수록 늘어나는 교묘한 괴롭힘과 불이익에 지친 그는 엄석대의 바람처럼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아마도 엄석대는 늘 이렇게 아이답지 않은 교활함으로 자신의 왕국을 지켜왔을 겁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외세의 개입 전까지는 말이죠. 어느 날 서울에서 새로 부임한 젊은 남교사 김 선생은 그의 모든 것을 발가 벗기고 무너뜨립니다. 


괴롭힘에 지친 동은은 박연진(임지연)의 집요한 괴롭힘에서 벗어날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 한 죽음의 문턱에서 불현듯 살아야 할 이유를 떠올립니다. 바로 연진이 그녀의 꿈이 된 거죠. 나를 괴롭히던 무리들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복수의 다짐 하나만으로 동은은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을 처절하게 보냅니다. 더 글로리 1부는 그녀가 준비했던 계획이 완료되자 연진과 그의 무리들을 만나 복수를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마치게 됩니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어둠의 백설공주가 되어 칼춤에 능한 망나니 같은 왕자와 사연 많은 난쟁이들과 함께 잔혹동화를 써내려 갑니다.


굳이 화제의 드라마와 오래된 단편 소설을 비교해 본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으나 더 글로리 the glory라는 제목이 갖는 함의가 회를 거듭할수록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동은은 그들이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눈물로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합니다.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 "그걸 다섯 글자로 하면 뭐다? 사˙회˙적˙약˙자."

연진의 그 예쁜 얼굴과 입에서 나오는 순수할 정도로 해맑은 악의에 모든 설명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은의 구원뿐입니다. 김은숙은 이문열과는 달라 보입니다. 이문열은 거대악과 싸우던 무력한 개인의 구원을 외부에서 찾았습니다. 이문열이라는 거인이 담았던 시대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줬지만, 강산이 네 번 정도는 변할 동안 시대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킬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바는 명확해졌습니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반란이 이 참혹한 드라마의 숨겨진 원동력이겠죠.


악인들이 그들의 죄를 교회에서 스스로 구원받았듯(오마주처럼 보이는데 영화 밀양을 떠올리신 분들도 많았을 겁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동은은 스스로 영광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영광이 그 공을 하느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라면, 동은의 복수 역시 반드시 지상에서 이뤄져야 하늘에 그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극의 처음에 등장하는 나팔꽃에 대한 조금 간지러운 김은숙식 설명은 이를 위한 것이었겠죠. 아직 2부 를 보기 전이지만 그 끝은 악마의 나팔꽃처럼 신이 보기엔 건방진 결말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리 가야 하지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에 미리 씁쓸한 맛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마지막은 강릉에서 우연히 마주친 엄석대가 경찰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본 후, 가족이 잠든 한밤중에 술을 마시며 회상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외로웠고 비겁할 수밖에 없었던 병태와는 달리 동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보입니다. 따라서 그 결말이 매우 궁금해집니다.



  




* 임지연이란 배우의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 ost -Kelley Mcrae의 until the end를 들으며 밤에 운전을 해봤는데 복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과몰입을 유발하는 노래네요.


* 담임교사는 좀 더 빨리, 그리고 오래 괴롭히다 보내버렸으면 어땠을까요?


* 추 선생 같은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캐릭터를 만든 제작진과 배우에게 찬사를.                      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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