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병철 Feb 01. 2020

시안(西安)여행 2015


   다닌 포럼 동기들과 중국 시안 나들이. 내가 막내 격이고 공공  분들이 많아 공감이 쉽지 않지만 뜨문뜨문 이어온  년의 시간으로 친해졌다. 자비로  기백의 동기회비에서 많이 지원받는 거라 본전 생각에 더욱 ㅋㅋ. 여행의 컨셒은 무작정이었다. 중국어 공부도  달간 손놓았고 오늘 아침에 대충 옷가지  넣고.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짜인 일정과 기분에 몸을 맡겼다..  보겠다는 생각도 먹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요즘 희망을 보이시는  깊은 자형에게 드릴수 있는 진시황의 숨겨놓은 불로장생 약만 훔칠  있기를 바랬다.


시안의 회족들. 2미터를 파면 600 유물이 나오고 3미터를 파면 800   나와 지하철 공사가 지연된다는 세계 5 고도에 실크로드를 따라온 이슬람 상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푸름스레한 눈동자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안되지만 그들은 모자로 정체성을 표시하고 있다. 원래 글로벌 사회구나 싶다. 고다은! 같이 오자 니가 좋아하는 회오리감자 사줄게 


20대 후반의 양귀비와 60대 후반의 당현종이 사랑을 나눴다는 화청지에는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나오고 있다. 양귀비는 160센티에 70킬로, 하지만 발걸음은 사뿐사뿐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초등생 자녀를 데리러  부모님들 인파와 이로인해  막힌 도로


드디어 내 눈으로


대륙의 기술.

진시황의 영혼 열차는 정교하게 2,000여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병마용 지휘관의 청동검은 지금도 종이 20장을 자른다는데 크롬 도금이 되어있다고 하고 병사들이 입은 갑옷의 색채는 선명했다가 그대로 노출되면 며칠 후 완전히 퇴색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날카로운 눈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신발 문양까지 섬세하게 흙으로 구웠다.


발굴 현장의 지붕을 지어주고 같이 분석한 독일도 도료의 비밀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고. 크롬 도금은 현대사회에서 독일에 의해 적용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 전 진(China)의 기술, 종이 화약 나침반뿐 아니라 잠재된 대륙의 기술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실수가 아니다.


대륙의 스케일.


시안(장안) 성벽은 13km의 동서로 조금 더 긴 직사각형.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반. 평지에 세워진 성이라 밖에서는 절대 안을 볼 수 없고. 성곽은 마차 2-3대가 동시에 다닐 수 있게 넓다. 꾸불꾸불하고 두세 명이 다닐 수 있는 성곽으로 내부가 완전히 노출되는 남한산성을 보고 '너희가 이런 성을 믿고 싸우려 하느냐'는 중국 장수의 시각이 이해된다.



흉노족에 대항할 동맹국을 찾아 서역으로 가다 적국에 잡혀 10년을 감옥에 지내다 탈출하여 기어이 대월지의 왕을 만난 장건. 동맹은 실패했지만 서쪽 지역 정보는 한무제을 감동시켰고 이번엔 대규모 사절단으로 다시 가서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10년의 세월은 강산을 바꾸었지만 뜻을 바꾸지는 못했다.



진시황릉은 작은 야산 형태로 지하 70미터에, 그위로는 지하수가 흐르고 대량의 수은으로 보호하고 있어 향후 상당기간 발굴이 어렵다고 한다. 일본이 기술 제공하며 공동 발굴을 이야기할 때, 주은래가 '우리는 못해도 후손들은 할 수 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들었다.

 

이같은 장기적인 안목과 뜻은, 그것을 배울 역사가 없다면 어려울 것이다. 이웃나라의 노벨상을 부러워만 하는 빨리빨리에게, 중국의 이런 만만디는 무섭고 부럽다.



시안 주변에만 32개의 (석탄) 화력발전소가 이처럼 연기, 수증기, 먼지, 공해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다. (매일 아침 차가 물을 뿌리며 청소한다. 강수량 600mm인 곳에서)



최근까지 인구 800만의 시안은 두 명 때문에 먹고살았다. 바로 2천 년 전의 "진시황"과 천 년 전의 "양귀비"이다.


병마용에는 하루 5만 명이 몰려와 3만 원의 입장권을 사서 관람하고 있다. 국경절에는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렸고, 들어가려면 줄 서는 데만 수시간, 제대로 관람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부럽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겐 그런 유산이 왜 없을까 많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워크홀릭 군주로 인정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는 어마어마한 희생이 있었으니까. 초나라 군사 30~40만 명을 생매장하는 등 70만 명 이상을 죽였고, 본인의 무덤을 준비하는 데만 당시 인구의 1/5을 동원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남긴 문화자원의 이득은 대체로 그때 죽음을 피한 자들 또는 지배자들의 후손이 누리고 있다. 희생 따로 수혜 따로. 역사는 기본적으로 불공평한가.


(( 나도 좋은 조상이 되려면 일단 희생되지는 말아야 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 산책 in 유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