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5차전, 9회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이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기고 홈런을 맞았다. 주저앉은 김병현. "힘내라 BK" 내내 기억되는 장면이다. 그 홈런을 때린 스캇 브루셔스. 지금은 시애틀 매너리스의 코치다. 그는 무대가 어디던 아직 현역 생활을 하고 있는 BK를 부러워한다. 예전만 못하지만, 그가 후배들과 부대낄 수 있는 건, 자기관리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반짝 보다 꾸준함이 더 주목받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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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모신 팀장님 중 한 분은 환갑이 지나신 지금도 활발히 투자하신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투자활동으로 여럿 회사에서 크게 성공했다. 심사역들의 롤모델로, 존재감이 더 높다. 같은 동네로 이사 온 후 가끔 저녁을 함께 한다. 그런 날, 오후에라도 번개 치면, 지인 10여 명이 모였다. 모나지 않은 성격, 위압을 줄 수 없는 인상, 어딘가 허술하게 보이는 친근함. 그렇게 업계 후배들과 편하게 소통하셨다.
투자 생활을 오래 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산업 변화에 대한 인사이트. 꾸준한 딜 소싱.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박투자. 리스크 관리, 본인 만의 투자원칙.
그리고, 건전한 정신. 한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시장의 신뢰를 저버린 사례가 많다. 내일의 기준은 오늘보다 높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때는 관행이었다고 변명해도, 지금은 무감각한 도덕성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에, 그분이 지금도 현역이실 수 있는 건, 나는 그분의 메모를 꼽는다.
참 열심히 메모하셨다. 아는 척 없이, 거드름 없이, 허세도 없이, 바로 배움의 자세로 낮추셨다. 한 칸에 두 줄씩 깨알같이. 꾹꾹 눌러쓴 글씨는 노트를 두껍게 만들었다. 빽빽한 글자들은 노트를 묵직하게 했다. 다음 미팅 때, 레퍼런스 체크할 때,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때, 정확하고 구체적인 질문은 신뢰성 높은 답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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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역은 많은 미팅을 한다. 동시에 여러 업종의, 다른 업체에 대해 고민한다. 머리 속 콘텐츠가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심사역은 집중해야 하고, 옳은 판단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뇌는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뇌 측두엽의 해마에 임시로 저장된 기억은, 상기시키지 않으면 장기 저장소에 축적되지 않는다. 2주 정도 내버려 두면, 뇌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잊어버린다. 반복 확인이 중요하다.
기억은 조작된다. 불확실하다. 뇌는 생각하고 싶은 데로 기억한다. 이걸 증명하는 실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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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가 중요하다. 메모는 기억의 점들을 만들고, 그것을 연결하며 맥락을 이해한다. 과거의 메모는 현재의 점들과 이어진다.
메모는 심사역을 지켜준다. 기록하는 사람 앞에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다. 또박또박 받아 적는 사람한테는 과장하기도 어렵다. 최소한, 두 번 속지는 않게 한다. 튼튼한 외양간이다.
메모는 서로 간에 불필요한 오해, 애매모호함을 줄인다. 사실 "모르는 것" 보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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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자. 당당히 기록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둔필승총"이라고 했다. 사소한 메모가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 쑥스러워 말고, 연필을 꺼내 적자.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