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2
포스텍 국제관에서 2022 산경인의 밤 본 행사가 끝났다. 교수님과 졸업생 뒤풀이는 5층에서.
다음날 체인지업 그라운드 주차장 공사가 있다. 거기로 가서 차를 국제관으로 옮기고 뒤풀이에 갔다.
늦게 갔으니 선택권 없이 빈자리로.. 당연히 원로 교수님 테이블에 자리가 있었다.
30년 세월을 너머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인연.
그때나 캐릭터는 별반 달라지시지 않았다.
여전히 한 분이 토크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계신다.
20 년 전 태풍 매미에 둘째를 잃으셨다.
자식을 잊지 못해 핸드폰을 그대로 유지하셔서
그 사연이 통신사 광고로 제작되었다.
말씀이 흘러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다. 그러시면서...
누가 그랬어.
한 삼 년 지났으니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
지금도 그 슬픔이 때때로 화로 치밀어 오르는 데..
그 말씀은 위로가 1도 되지 않았다고.
목숨 같은 자식을 그렇게 잃고 적응이란 게 될 수 없다.
가장 와닿는 말은 "그냥 안고 사세요"라고.
그래 안고 살아야지 생각하다고..
눈물이 돌았다. 저도 그래요 하려다 그냥 멈췄다.
20년 코로나 기세가 약간 주춤할 때 난 엄마를 잃었다.
오전에 읍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차에 부딪치셨다고
그리고 오후에 돌아가셨다.
누나, 나 , 동생은 허망했다. 작별 인사도 못하고 보내드림을 강제받았다.
이게 울 엄마의 운명이신가.
평생 자식 위해 헌신하시다, 힘든 몸을 우리에게 한번 의지하시지도 않고 가시는 구나.
전생에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받으셨기에
이렇게 제대로 한번 돌봄을 받을 기회도 없이..
엄마는 통장과 보상금까지 주시가 가셨다.
우리는 어떤 연유로 엄마의 삶을 이렇게 배려받을 자격이 있었나..
이게 엄마와 우리의 운명인가.
아쉬움, 고마움, 미안함, 죄송함, 덧없음.
10여 년 전 돌아가진 아버지는 암 선고 후 2년 반을 보내셨다.
마음을 쓰고, 되도록 뵙고, 말씀을 나눴어도
가버린 아버님을 쉬이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엄마를 잃은 우리는 좀 이상하다.
우린 잘 살 테니 잘 가시라고,
산소도 더 많이 찾지는 않기로 했다.
우리가 자린 그 집도 허물고 빈 땅으로 만들었다.
고향도 잘 안 간다.
한데,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의 가슴과 머리에 자리 잡아 계신다.
불쑥 눈물로 나오시고, 멍한 벽에 나타나신다.
준비 안된 이별의 적응은 어렵다.
잊을 때도 된 시기는 아직 없다.
그냥 한켠에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어디를 가도, 여기 같이 왔어야 하는데
무얼 먹어도, 한 번은 모셔 같이 드셨어야 하는데
힘들 땐,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답답할 땐, 부족했던 그때 울 엄마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잘해드리지 못한 벌을 늘 받고 있다.
잊혀드릴 순 없다. 노력으로 보내드릴 순 없다.
안고 살아야지. 오히려 더 좋다.
아름다운 우리 영희씨는 늘 같이 있다. 모시고 살아야지.
너무 걱정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