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올해 고3이다. 여느 아이들처럼 대입 준비에 정신없다. 욕심만큼 안 되는 성적. 아쉽지만 이만한 것도 대견하다. 어려웠던 시기를 참고 잘 버텨준 게 고맙다. 논술도 준비해야 한다는 데, 처음 한글을 배울 때가 생각난다.
따라 해 봐. 엄마, 수박, 강아지. 이렇게 통문자로 외우는 건 창제 원리와 다르다. 한글은 한글답게 가리켜야 한다는 분이 있었다. 어린이용 멀티미디어 CD롬 유통으로 번 돈을 몽땅 털어 넣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개발했다. 공부하면, 무청이 점차 열무로 자랐다. 첫째가 그걸로 거의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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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심 위에 상정했다. 썰렁했다. 교육사업 쉽지 않아. 콘텐츠가 검증되었나. 방문판매.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이제 개발을 끝냈는데, 대답할 게 뚜렷이 없었다. 첫째를 데리고 왔어야 하나. 인바이트 한 다른 창투사는 승인 났다. 인내심을 총동원해 조용히 빠지기로 했다. 보란 듯이 대박 나기를 바랐다. 잘 안됐다. 파산했다. 나에게 그 건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포장되고 위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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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찾아간 날. 사장실 문 앞 작은 책상에 누군가 있었다. 검고 굵은 테, 두꺼운 안경알. 허름한 잠바. 크지 않은 체구. 좀 단단해 보였다. 사장님이셨다. 사장실은 회의실이고, 앞에서 책상 하나 달랑 쓰고 계셨다. 좀 다르구나.
겨울을 유달리 싫어하셨다. 사장님은 386으로 학생운동을 가열하게 하셨다. 시국사범, 그 덕에 어쩔 수 없이 창업했다. 시신경에 문제가 있었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유전이라 했다. 뭐 그런 것 따윈 그분에게 핑계도 아니었다. 당연히 잘 나갔다. CD롬을 100억 도 넘게 팔았다. 식구도 100명(?) 까지. 정통부 장관상 2번 받았다. 재미있게 사업하셨다. 난 진심 성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그 한글교육 사업으로 12년 경영을 접었다. 졸다 망했다.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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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히 페북에서 만났다. 지인들과 필담을 나누셨다. 군대 이야기도 지겨운데, 그분들은 징역살이를 쏟아냈다. 사장님 입담, 아니 글빨은 여전했다. 유쾌했다. 급기야 책으로. 내청 춘의 감옥. 추운 곳이었다. 사장님은 거기서도 웃으셨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상황. 그곳에서도 삶의 재미를 찾으셨다. 수용소의 빅터 프랭클 급 멘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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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책. “파산”. 망한 걸 자랑이라고 하나. 좋은 실패사례였다. 망한 속사정, 알지 못했던 배경도 있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버티다 버티다 배째라 한다. 싹 챙겨 야반도주하는 몰염치도 있다. 사장님은 다른 길을 택했다. 파산을 계획했다. 보통 물품대를 늦게 주다가, 급여를 미루고, 마지막에 금융부채를 못 갚는다. 미련 못 버리다가, 주위에 온통 피해다. 사장님은 반대로 했다. 일단 조용히. 소문나면 채권회수가 힘들다. 계획한 현금이 줄어든다. 사업을 같이 해온 거래처에 입금했다. 줄도산은 막았다. 자산을 현금화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직원들에게 팔 수 있는 현물로라도 급여를 줬다. 남은 부채는 혼자 짊어졌다. 신불자가 되었다. 은행 신용 포기하고, 주위 사람들의 신용을 지켰다. 투자자와도 신뢰를 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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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용은 회복했는데, 시력장애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한글을 사랑하시고, 여전히 운동권에 계신다. 꺼지지 않는 한글 지킴이 운동. 잘 만나지는 못했지만 늘 그분을 응원하고 있다. 힘든 시기에도 웃음을 찾던 그 멘틀을 부러워하며.
요즘이 벤처들에겐 어려운 시기다. 겨울이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잘게 씹어가며, 웃으며 나아가는 사장님들, 예기치 않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한 사장님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