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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병철 Jul 16. 2016

42.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비가 온다. 생각이 많다.

.....
한 10년 전, 시무실이 강남역에 있었다.  


고차장 바쁜가? 보자.


창업부터 지켜봤던 사장님이다. 회사가 역삼역 근처로 왔다. 걸어갔다. 사옥 옆을 돌아 상가를 쭉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조금 더 가면 주택가. 골목길을 요리조리 계속 가면 역삼역에서 세브란스병원 가는 큰길과 만난다. 건너편 저축은행 옆길, 조그만 사거리, 14분 걸렸다. 앞에 고급진 맛집, 뒤에 함바집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 2층, 문간방이 사장실. 보통, 사장실은 안쪽에 있다. 오가며 직원들을 살핀다. 이 사장님은 오히려, 직원들 눈치 보기가 싫다고, 제일 바깥으로 뺏다. 방 앞엔 충실한 강상무 님이 계셨다.


맥주 한잔 못하는 사장님. 담배는 골초였다. 공기청정기 한 대로는 역부족. 매캐한 냄새가 쌓였다. 비 오는 날은 더 했다.


특별한 용건, 현안. 그런 게 없었다. 나름 고급인력 불러다 놓고 그냥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임상무 님, 배사부가 많이 등장했다. 사장님 창업전 직장 상사들을 그렇게 불렀다. 꿀 같은 업계 험담, 구하기 힘든 CTO, 말 안 듣는 직원 넋두리, 하소연을 들었다. 업자들과 친 타당 얼마짜리 골프 이야기, 줄버디 자랑도 들었다. 충고도 해주셨다. 고차장은 생각이 너무 많아. 문 앞까지 왔으면, 그냥 문을 열라고. 팔을 올려서 밀면 돼. 단순해. 죽지 않아. (인마) 일단 하는 게 중요해. 사장님 스타일이었다. 생각했으면 행동했고, 행동하면 생각을 안 했다.


사장님들은 외롭다. 좀 공감해 줄 사람을 찾기 어렵다. 집에서, 회사에서, 거래처에서, 늘 좀 가려야 한다. 직원과는 업무 이야기도 아닌데, 편안치가 않다. 맘 내려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오죽하면 경쟁사 사장이 제일 친하다고 하겠나. 사실 경쟁만 내려놓으면 그만큼 공감해 줄 사람도 없다.


바쁜데 쓸 데 없는 시간이었나. 아니, 그런 시간이 개인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중요했다. 심리학자 앨빈 로스는 최후통첩 실험에서 대화의 효과를 보여줬다.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로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신뢰를 높인다. 내용은 상관없다. "과연 믿을 수 있을까"가 핵심인 심사역에게, 그런 시간은 당연히 소중하다.


업체와 약속된 공식적인 미팅. 주주간담회, 이사회, 주주총회. 준비, 잘해야 하고, 결과도 좋아야 한다. 한두 업체도 아닌데 "효율적"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만남 자체가 의미 있다. 정례적인 목적사항은 진행도 일사천리다. 한데 "기타" 이야기가 문제다. 좀 애매한 이야기, 먼저 꺼내 줬으면, 차라리 들 컸으면 하는 때도 있다. 거시기해서 차마 물어보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그럴 때, 지나가다 들렸다고 굳이 핑계를 대는, 그렇게 나눈 커피 한잔이 문제를 푼다. 가까이 있으면 좋은 점이다.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
사장님은 성공과 추억을 뒤로하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비가 오면, 사장님 생각도 난다. 그때 충고도 다시 새긴다. 


제때 내린 평범한 결정이, 너무 늦게 내린 완벽한 결정보다 낫다.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 보다 때로는 ‘언제’ 결정을 내리냐가 더 중요하다. 스타트업은 시간이 더 소중하기에.


투자담당자로서 언제던, 늦지 않게, 이왕 좀 더 의미 있게 결정하기 위해, 가방을 메고 테헤란로를 다닌다. 그렇게 우연히 자주 들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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