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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작 Feb 15. 2022

우크라이나 2/4 - 나라인 듯 나라 아니었던


E01. 우크라이나 빵 공장, 러시아 분쟁 사태의 근원을 찾아

E02. 나라인 듯 나라 아니었던 우크라이나

E03. 가난할 수 없었는데 가난하게 된 우크라이나

E04. 20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는 예견된 수순이었나


우크라이나라는 나라가 있었나?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생겨난 나라인지부터 보겠다.


우크라이나는 슬라브족의 나라다. 고대 시대, 서유럽쪽에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살았다면 동쪽에는 슬라브족이 살았다. 지금까지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슬라브족의 나라다.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슬라브족 외에도 고트족, 훈족 같은 다양한 민족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만큼 땅이 비옥했기 때문이다.


슬라브 계통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라다운 나라를 가진 적이 없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제대로 된 최초의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나라 형태를 갖춘 건 9세기 키예프 공국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공국?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다. 쉽게 말하면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 왕이 다스리는 정식국가로 보기는 애매하고, 독립적으로 사는 걸 보아 나라로는 봐야할 것 같은, 이런 애매한 곳이 공국이다.


그럼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 아니었나? 당시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지역을 두루 다스리는 나라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전신이라기 보다는 러시아의 전신으로 보는 게 적당한 것 같다.


아무튼 키예프 공국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은 세력이 큰 공국들이 돌아가면서 지배했다.


처음에는 키예프 공국이 지배했다가 13세기 세상을 리셋시킨 몽골 제국이 잠깐 지배했고, 그 후에는 세력을 확장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지배했다.


아,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빵 공장은 언제 나오나?

기억하지도 못할 공국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번 이야기의 핵심인 빵 공장 이야기를 하겠다.


우크라이나 빵 공장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이후 17세기 무렵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면서부터 나타난다.


우크라이나 빵 공장은 당시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우클스키’라는 사람이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빵 공장과 공장주인은 가상의 설정이다.)


우클스키는 빵 공장을 운영하며 우크라이나인들을 배 불리 먹이고 싶었으나 비옥한 토지에서 재배한 밀은 대부분 폴란드에 바쳐졌다.


그럼 빵 공장 직원들은 뭘 먹고 살았나? 공장 직원들에게는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기적의 작물, 감자가 지급되었다. 많이 먹으면 배도 부르고 열량도 높은데, 어쩐지 아무리 먹어도 힘이 나지 않는,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기적의 작물, 감자.


지금 생각하면 감자나 밀이나 그게 그거긴 한데, 우클스키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이고 싶다는 일념으로 폴란드 몰래 빵 공장을 확장했다.



농장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졌고 우클스키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명한 대부호가 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우클스키는 막대한 부를 축적해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체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폴란드와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우클스키는 몇몇 우크라이나 영주들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가 같은 슬라브계 민족이고 종교도 동일하게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라면 폴란드를 몰아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러시아는 흔쾌히 우클스키와 우크라이나 영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러시아는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폴란드와 전쟁을 벌여고 결국 승리했다.


우크라이나 영주들은 러시아 황제를 만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이제 우리도 독립해서 나라를 만들게요.” 했는데, 러시아는 “잉? 뭔 소리? 이제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인데?” 이런 답변을 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 땅이었다가 러시아 땅으로 변한 것에 불과했다.


우클스키는 폴란드가 떠난 빵 공장을 바라보며 그래도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겠지, 기대를 했다. 그러나 러시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력을 확장 중이던 러시아를 위해 우크라이나인들이 총알받이로 참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19세기 무렵에는 민족을 말살하려는 의도인지 우크라이나 언어가 금지되기도 했었다.


우클스키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자식들에게 빵 공장을 물려줬다. 자식들은 전전긍긍하며 형식적으로만 빵 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1921년 러시아 혁명을 완수한 소련 공산당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빵 공장은 완전히 국유화가 되었다.


소련이 된 러시아

이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닌 소련의 땅이 되었다.


소련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를 미워할지언정 혐오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소련이 지배하면서부터 러시아를 증오할만한 몇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가장 큰 사건은 스탈린의 개혁이었다. 스탈린은 부농을 해체하고 농산물을 수출하여 공업을 발전시키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우크라이나 부농은 스탈린의 타깃이 되었다. 부농들만 딱 집어서 해체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텐데, 스탈린은 일반 국민의 농산물까지 싹 다 빼앗아 갔다.



스탈린의 개혁으로 1932년에서 1933년 1년 사이에 1천만명 정도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어 죽었다. 우크라이나 지역 인구의 1/4이었다. 이걸 홀로도모르라고 한다. 번역하면 홀로코스트 비슷하게 ‘대기근 학살’ 정도의 의미다.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적대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이 홀로도모르를 언급하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주변 사람 4명 중 1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수탈이 심한 상황에서 우리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대한민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국에서 항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강대국에 비해 힘이 약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우리 영토, 우리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인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반만년 동안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이루어 나라를 이루었던 우리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 소련의 수탈 속에서도 강대국과 싸우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의 억압을 피해 도망하려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주도 허락하지 않았다. 노예처럼 농사짓기를 강요했다. 실제로 1933년 한해에만 소련 경찰이 체포하고 처벌한 우크라이나 이탈자가 22만명에 달했다.


잠시 시점을 이동해 보자.

대기근 이후 4년 정도가 흘렀다. 이번에는 시점을 우리나라 위쪽에 있는 연해주로 이동해 보겠다.


대기근 이후 4년이 지난 1937년, 연해주에는 소꼽놀이를 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김고려라는 꼬마 아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빵 공장과 관련된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련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꼬마였던 김고려와 그의 가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물 열차에 실었다.


몇 날 며칠을 달린 기차는 한참 만에 검은 흙이 가득한 땅에서 멈추었다. 우클스키의 빵 공장이 있던 농장이었다. 김고려는 스탈린이 실시했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동아시아에서 멀리 우크라이나까지 이동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때 우크라이나로 이동한 고려인은 만여 명에 달했다.


김고려와 그의 가족은 소련 공산당의 지시로 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고려는 뭐든 시키면 잘하는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였다. 김고려는 압도적인 성실함과 처세술로 수십 년간 공산당에 봉사하여 고려인 최초로 국유화된 빵 공장의 관리자가 되었고, 나아가 비공식적으로 빵 공장의 소유자가 되었다.


1986년 노인이 된 김고려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소식에 감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또 갑자기 들이닥친 소련 군인들에 의해 수십 킬로 떨어진 도시로 강제 이주되었다. 김고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강제 이주됐는데, 그 이유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문이었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 북쪽 지역에 있었다. 김고려의 빵 공장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폭발력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피폭된 방사선량은 2차 세계대전 일본의 것보다 200배에 달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소련은 인근 주민을 긴급하게 대피시켰고, 피폭 영향권 밖이었지만 김고려와 마을 사람들도 강제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결국 빵공장은 다시 문을 닫았다.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원전 사고를 은폐하려고 언론을 통제하고 서방 국가의 해명 요구도 묵살했다.


이런 소련의 태도에 체르노빌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뿐만 아니라 김고려도 깊은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편도 보자. 이제 두 편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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