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김밥

by 비콘

20대 한창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을 때 ‘디톡스’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을 배출하고 깨끗한 심신으로 다시 태어나자라는 거창한 욕심에 활활 타올랐고 중대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내일부터 3일간 레몬물과 채소수프만 먹는거다.


문제는 내일부터라는 겁니다. 오늘 아침부터 오늘 저녁까지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3일간 속세의 음식을 참아야 하는지라 시작전날 최후의 만찬으로 뭘 먹을까 궁리했습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메뉴는 소울푸드 김밥. 이왕이면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채소위주의 재료들과 김을 삽니다. 전기밥솥 가득 100% 현미밥을 고슬고슬 짓습니다. 시금치, 단무지, 도톰한 계란지단, 당근 볶음, 맛살, 어묵 등등 대입시험보다도 더 정성을 들여서 재료를 완비합니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김밥을 말기시작합니다. 100% 현미니까 흰쌀보다 건강식이고 채소를 듬뿍 넣으니 다이어트에도 도움되겠지라며 흥겹게 김밥을 만듭니다. 이윽고 쟁반 가득 쌓인 김밥을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보기좋게 썰어 접시에 하나둘씩 쟁여 올립니다. 남들 눈에는 그다지 식욕이 동하지 않는 현미김밥일지라도 저한텐 김밥이라는 사실만으로 뿌듯하고 군침이 돕니다.


디톡스 전날 유유자적 현미김밥으로 삼시 세 끼를 때우며 ‘내일부터는 진짜 다이어트시작이다. 눈 딱 감고 3일만 속세의 해로운 음식을 끊어보는거야, 난 할 수 있다!’ 라며 새삼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시작된 3일간의 디톡스는 3일천하는커녕 1일차 반나절만에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전날 하루종일 먹었건만 아직도 김밥이 눈앞에 아른거리지 뭡니까. 다이어트 전날 먹고싶은 음식을 실컷 먹는다라는 생각은 실전에 아무 도움 안 되는 부질없는 식탐일뿐이었습니다.


당뇨진단 후 참으로 먹고 싶었지만 참았던 음식도 김밥이었습니다.

모든 곡물은 혈당을 올립니다. 100% 현미 역시 먹은 후 혈당수치를 보니 만만치 않더군요. 그럼에도 의사들이 정제된 쌀보다 현미, 늘보리, 귀리 등 비정제 탄수화물을 추천하는 이유는 영양가가 많기 때문이랍니다. 흰쌀보다 혈당스파이크를 좀 더 완만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결국 곡물류는 비정제 곡류로, 양 역시 과식금지가 혈당관리 성공의 핵심입니다.


뭘 넣고 말든 맛난 김밥. 집집마다 김치맛이 다르듯 김밥 역시 손맛에 따라 미묘하게 다릅니다. 김밥의 유래가 일본의 후토마키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김밥은 한국만의 조리법과 맛이 후토마키와 확실히 다르니까요.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선 신라시대부터 김을 먹기 시작했다고 삼국유사에 나와있더군요. 일본에서 종이형태의 김이 식용되기 시작한 건 1717년쯤이라고 합니다.

김 양식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1424년에 집필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인대 경남 하동군 지역의 전래에 의하면 약 260년 전 어느 할머니가 섬진강 하구에서 조개류를 채취하던 중 뭔가 달라붙은 나무토막을 발견하고 그걸 뜯어먹어보았답니다. 뜻밖에 그 맛이 매우 좋았고 이후 대나무를 수중에 세워 인공적으로 김을 착생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즐겨먹고 세계적으로도 인기있어진 김스낵이나 K-김밥의 시작은 이름모를 어느 할머니의 바람직한 식탐이었습니다.


일본인 지인이 하루 세끼 라멘만 먹고살래도 좋다고 할 만큼 본인은 라멘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제 경우 하루종일은 당연, 한 달 내내 먹어도 좋을만큼 김밥을 즐깁니다. 그토록 맛있고 좋아하는 김밥이 혈당을 폭발시킨다는 사실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대부분 김밥에 사용하는 정제 탄수화물 쌀밥이 주범입니다. 또한 달달한 단무지나 햄, 첨가물 많이 든 부재료도 몸에 좋을 건 없습니다. 도시락을 준비 못했을 때 한 끼 때우기에 딱 좋은 김밥. 이젠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꼬순 참기름내 나는 김밥엔 추억도 많았고 평생 함께 하고픈 상대인데 혈당폭발의 원인이라뇨. 다시 한번 뭘 먹고살아야 하나 낙담했습니다.


하루는 배고픈데 시간은 부족해서 간단 요기차 단골김밥집에 들렀습니다. 이 가게 역시 흰쌀밥을 이용하는지라 조심스럽더군요. 그래도 단골찬스를 써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주인분께 요구합니다.

“최대한 밥을 얇게 깔고 대신 시금치를 더 넣어주세요.”


혹시나 까다로운 손님으로 보일까 봐 “다이어트하거든요.”라고 얼른 덧붙입니다. 주인은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요즘 밥을 조금 넣어달라는 손님들 계세요.”

다행히 진상으로 보이진 않겠군이라며 안심했습니다.


얼마 후 이 가게에 또 들렀습니다. 당시 피검사 수치는 갈수록 좋아져가고 있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정으로 이 기회에 흰쌀밥을 아예 끊어볼까 싶어서 새롭게 주문합니다.

“밥을 아예 다 빼고 만들어주세요. 대신 채소를 골고루 좀 더 넣어주세요.”


이번엔 주인얼굴에 난처함이 가득하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밥을 다 빼면 김이 잘 달라붙으려나? 잘 썰릴 것 같지도 않은데.”

순간 변명하듯 다급히 둘러댔습니다.

“아~ 병원에서 탄수화물을 줄이라고 해서요. 당분간.”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의 주인은 차마 단골의 부탁을 거절못하고 어찌어찌 밥 없는 김밥을 말아줍니다. 얼마 후 삐뚤빼뚤 썰린 정체불명의 김말이 한 줄이 담긴 접시를 받았습니다. 보자마자 무리한 부탁을 했구나라는 걸 알았습니다. 동글동글하지도 않고 호떡처럼 퍼진 모양새, 김밥이라기보다 속재료가 까만 김에 싸인 김말이에 가깝습니다. 황급히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가게문을 나서면서 이제 김밥은 진짜 멀리해야 할 음식이 되어버렸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건강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져서인지 반가운 김밥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키토김밥이라는 이름하에 다이어트용도 된다니 이렇게 반가울수가요. 어떤 김밥은 계란과 양배추, 오이같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현미든 흰쌀이든 밥이 생략된 김밥은 어딘가 허전하지만,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해 가는 김밥의 변신은 반갑기만 합니다.


사실 김밥이야말로 오랫동안 평가절하된 음식이었죠. 재료 하나하나 손질하고 조리해서 돌돌 말아야 하는 수고가 만만치 않은데 가격은 턱없이 쌌던 안타까운 음식이었습니다. 키토김밥이 가성비는 좋지 않더라도 일일이 계란지단을 만드는 품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먹습니다.


아무튼 시대흐름에 맞는 모양새로 등장해서 주목받다니 역시 김밥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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