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내놔

by 비콘

추적추적 비 내리는 한밤중, 헝클어진 머리의 여인이 번들거리는 손도끼를 들고 공동묘지에 왔습니다. 가마니에 덮여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둘러보다 큰 숨을 쉰 다음 어느 가마니를 들춰봅니다. 음산한 빗줄기 속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치고 여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날카로운 손도끼를 내리칩니다. 그렇게 시신의 한쪽 다리를 잘라내서 품에 안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뒤에서 들리는 소름끼치는 절규.

“내 다리 내놔!”


많은 분들이 아실법한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중 한 장면입니다. 여인은 시신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라낸 다리를 집에 가져와 병든 남편을 위해 푹 고아서 먹입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병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나중에 가마솥을 열어보니 사람다리가 아니라 커다란 산삼다리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전설이지요.


어릴 적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놔’ 편을 보면서 어찌나 오싹하던지요! 사람다리를 고아먹었다는 불편함은 알고 보니 산삼이었고,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하늘이 도와주셨다는 엔딩이어서 해소되었습니다. 한편 억울하게 한쪽 다리를 뺏긴 시신은 어쩌나 싶기도 했더랬습니다. 임진왜란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이웃끼리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었다는 야사를 떠올리면 어쩐지 시신이 아니라 진짜 사람다리를 먹어야 낫는다는 속설도 있었던 건 아닌지 억측까지 합니다. 마치 사람의 생간을 먹어야 특정 질환이 낫는다는 괴상하고 터무니없는 속설이 있었던 것처럼요.


당뇨 합병증은 한밤중에 시신다리 잘라내야 하는 절박함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습니다. 다리를 뺏는 쪽이 아니라 뺏기는 쪽이 되니까요.


제 경우 2형 당뇨 진단 후 관리초기에 불안과 의심병이 동시에 생기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어깨가 불편하면 ‘혹시 이것도 합병증 아닐까?’

피부에 알 수 없는 반점이 생기면 ‘혹시 이것도?’

눈이 조금만 뻑뻑하면 ‘벌써 눈에도 합병증이?’

어느날 갑자기 엄지발톱 색깔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니, 설마 이건?!’


다행히 모두 일시적인 단순증세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뇨로 인해 다리를 절단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사례를 처음 본 건 오래전 병원에서였습니다. 우연히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오른쪽 무릎아래가 절단된 채 휠체어에 타고 계셨고 장기입원 중이셨습니다. 교통사고였답니다.

“사고가 무척 컸나 봅니다. 불편해서 어떡해요.”

“아니, 이 다리는 당뇨때문에 자른 거예요.”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저와 달리 그분은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시며 듬성한 잇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웃으시더군요. 애연가인지 몸에서 나는 니코틴냄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네텃밭으로 친해진 이웃할머니가 계십니다. 이른 아침마다 아담한 텃밭을 혼자서 가꾸십니다. 텃밭에 어떤 작물을 심어야 좋다, 오랜만에 밭일을 했더니 어깨가 아파서 어제는 정형외과에 다녀왔다, 아래층 전세가 비싸서 아직도 안 나간다, 마침 방풍잎 부침개를 했는데 우리 집에 와서 먹어볼래 등등 할머니의 수다는 점점 폭이 커집니다.


“그래도 정정하시네요. 할아버지는 밭일하는 거 뭐라 안 하세요?”

“우리 영감 작년에 죽었어. 영감이 당뇨도 오래 앓았어.”

예기치 못한 할머니가족의 당밍아웃이었습니다.

“어이구, 할아버지가 고생 많으셨네요. 당뇨는 오래되셨대요?”

“몇 십 년 됐지. 근데도 술을 못 끊더라고. 나중에 한쪽 다리도 잘랐어. 합병증 때문에.”

“!!”


아아. 왜 이다지도 연세 드신 분 중에 결국 다리 잃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지요.

합병증중 하나인 실명(失明)도 큰일이지만 자신의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삶의 질을 떨어뜨릴지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온 날, 집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자신의 슬리퍼 두 짝이 그날따라 눈에 들어옵니다. 어쩐지 애틋하고 고맙습니다. 새삼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가지런히 고쳐놓습니다. 매번 싸구려 슬리퍼만 신었는데 한 번쯤 발이 더 좋아할 만한 기능성 신발을 사볼까 싶어집니다.


매일의 노력은 결국 다리를 지키고, 눈을 지키고, 심장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유의 유당이 혈당을 올린다는 걸 알고 좋아하던 카페라떼마저 줄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카페인마저 혈당관리에 좋지 않다는 걸 안 뒤로 디카페인이나 루이보스, 히비스커스 같은 카페인 없는 차로 선택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시신마저 내 다리 내놓으라고 쫓아올 정도로 자신의 몸은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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