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래 남는 건 성과가 아니라 관계
9. 오래 남는 건 성과가 아니라 관계
“매주 금요일마다 거래처와 만나서 한 일과 진행 상황을 보고하세요.”
증권회사 시절, 이 말은 나를 늘 긴장하게 했다. 매주 실적을 보고하고 수치로 증명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당연함 속에서 나는 늘 불안했다. 보고할 만한 성과가 없으면 죄인처럼 위축되어야 했고, 회의 시간 내내 눈치를 살펴야 했다. 누군가의 시선, 무거운 침묵, 그리고 숫자가 주는 압박은 내 일상의 공기였다.
그때의 나는 성과가 곧 내 존재의 전부라고 믿었다. 숫자가 오르면 내 가치도 올라가는 것 같았고, 숫자가 떨어지면 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회의실에서 오간 말들은 대부분 전략, 성과, 지표였다. 숫자는 언제나 정확했고 냉정했다. 그 냉정한 숫자를 붙들며 더 나은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성과표의 숫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남아 있는 건 동료들과 나눈 짧은 대화들이다. “오늘 고생 많았다”는 가벼운 말, 피곤한 회의가 끝난 뒤 함께 나눈 짧은 농담, 힘들 때 건네준 따뜻한 위로. 그 순간들은 사소해 보였지만, 성과보다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결국 숫자는 잊히고 관계만이 남는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후 나는 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서관에는 증권회사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있었다. 매 학기 인성과 성품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해 근로학생으로 함께 일하는데, 이들이 대출과 반납의 기본 업무를 맡는다. 젊고 밝은 얼굴들이 도서관을 채우며,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 일상을 새롭게 만들었다.
어느 날, 체육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이 근무 도중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취업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했다. 순간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 막막한 마음으로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대학생 때 취업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신입사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한 업무 능력이 아니야. 오히려 그 일을 임하는 태도, 자세, 그리고 열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저 경험에서 나온 소회를 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학생은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건네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 순간, 짧은 대화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과의 일도 잊히지 않는다. 한 명예교수님이 연구를 위해 타 대학 자료를 요청하신 적이 있었다. 요청 건수가 많아 업무가 적잖이 늘어났지만,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도왔다. 그런데 며칠 뒤 교수님이 직접 도서관을 찾아와 커피와 간식을 건네주셨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연구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작은 도움을 잊지 않고 정성으로 보답해주신 그 마음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학생이 건넨 감사의 말, 교수님이 보여주신 따뜻한 배려. 그 순간들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성과표 속 숫자는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잃지만, 관계 속에서 주고받은 진심은 마음 깊숙한 곳에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인생에서 진짜 오래 가는 것은 내가 남긴 실적이 아니라, 내가 맺은 관계라는 것을.숫자는 기록 속에 남아 금세 잊히지만, 관계는 사람 안에 기억으로 살아남는다. 그것이 나를 지탱해 주었고, 또 앞으로도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다음 글: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다〉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