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다

by 정연

10.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다

10.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다


증권사에 다니던 시절, 내 하루는 언제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끊임없이 울렸다. 거래처와의 통화, 내부 보고, 갑작스러운 요청들로 전화기를 내려놓을 틈조차 없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으면 곧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실 안에는 숫자와 지표가 가득했고, 실적을 재촉하는 목소리는 공기를 무겁게 했다. 나는 더 열심히 움직였고, 바쁘게 움직일수록 ‘일하는 나’는 또렷해졌다. 하지만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만큼 희미해졌다.


그때의 나는 남이 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것, 보고서를 정리하는 것, 지표를 올리는 것이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면은 점점 텅 비어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더 깊은 고요를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처음 마주한 것은 바로 그 낯선 고요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시끄러움에 익숙했던 귀가 오히려 불안해졌다. 하지만 곧 나는 알게 되었다. 그 고요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책을 정리할 때 들리는 바스락거림, 책장을 넘기는 소리, 의자가 바닥을 긁는 작은 마찰음…. 겉으로는 사소한 소리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내 마음의 소음을 덮어주었다. 나는 그제야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고요 속에서 나는 미뤄 두었던 질문들을 다시 만났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는가?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증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너무 바빠서 덮어 두었던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는 그 질문들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처음 맡은 일은 가장 기본적인 대출과 반납이었다. 학생들이 책을 빌려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반납된 책은 청구기호대로 서가에 꽂았다. 이어 교열 작업도 배웠다. 책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잘못 꽂힌 책은 찾아내어 정리했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도서관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곳이 아니었다. 대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질서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다양한 민원들이 매일같이 들어왔다.


“열람실 예약이 안 돼요.”

“무인 반납기가 고장 난 것 같아요.”

“반납을 했는데 연체가 떴어요.”

“학술 DB가 열리지 않아요.”


학생부터 교수님까지, 요청의 크기와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차츰 깨달았다. 이런 작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것이 곧 도서관 서비스의 본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은 결국 더 큰 기획과 서비스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그렇게 흘러간 도서관의 하루하루는 내게 또 다른 교훈을 주었다. 고요는 단순히 외부의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고요는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자리에서는 몰랐던 내 마음의 갈망과 두려움이, 조용한 자리에서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도서관의 고요가 나를 다시 나와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을. 증권사에서 외부의 기대와 요구에 매달리던 나를 벗어나, 도서관에서 나는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고요는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충만이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음 글: 〈3부. 길 위에서 배운 것들 - 11. 무시당한 선택의 힘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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