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돌아간 길이 가장 가까웠다

by 정연

12. 돌아간 길이 가장 가까웠다

12. 돌아간 길이 가장 가까웠다


처음 도서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내가 맡은 업무 중의 하나는 시설 관리였다. 운영 시간을 점검하고, 공지사항이 있으면 포스터를 제작해 붙였다.


“열람실 에어컨이 안 들어와요.”

“테이블 콘센트가 작동하지 않아요.”


민원은 전화로, 게시판으로, 그리고 상사를 통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상사는 종종 메신저로 짧은 지시를 보내왔다. 지금 바로 처리해 달라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렸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총무팀에서 했을 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의 첫 시작은 그렇게 사소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이었다.

며칠 뒤, 그 상가가 무심하게 말했다.


“시설 업무는 문헌정보학 전공자가 아닌 분들이 예전에도 맡으셨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깊게 찔렀다. 아, 비전공자라서 이런 일을 하는 건가? 문헌정보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보이지 않는 선 너머로 밀어내는 듯했다.


증권회사 차장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도서관 계약직 신분으로 돌아온 나는 스스로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처우는 열악했고, 정규직과 계약직의 차이는 업무마다 드러났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경계는 보이지 않게 그어져 있었다. 나는 그동안의 경험과 경력을 무기 삼아 이런 것쯤은 담담히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생각보다 깊은 차별과, 각자 누리려는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흔들렸다. 내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그러나 오래 고민할수록 오히려 선명해졌다.

나를 증명하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내가 걸어온 발자취라는 것을. 화려한 직책이 아니라,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가 내 삶을 만든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도서관에서 마주한 작은 경험들이 나의 발자취를 하나씩 새기고 있었다.


한 번은 한여름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날, 열람실 에어컨이 갑자기 멈췄다. 학생들이 손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더위에 지쳐 잠시 자리를 떠나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시험 기간이라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나는 관리팀에 여러 차례 연락하며 긴급 수리를 요청했다. 결국 늦은 오후, 에어컨이 다시 작동하자 학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들려온 “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성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에는 오래 남을 보람이었다.


또 한 번은 신입생들이 도서관을 처음 이용하던 날이었다. 서가 앞에서 망설이며 책을 찾지 못하던 학생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책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청구기호 읽는 법부터 서가에서 직접 책을 꺼내는 방법까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학생이 직접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얼굴에 번지던 안도의 미소가 잊히지 않았다. 돌아서며 건넨 “덕분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라는 짧은 인사는 내게 큰 울림이 되었다. 작은 도움이었지만, 누군가의 첫걸음을 함께한 순간이었다.


돌아간 길은 더디고 힘들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다. 성과와 속도의 언어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관계와 성실의 언어가 살아 있는 세계로 건너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뒤로 돌아간 길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길은 오히려 나를 가장 빨리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나를 증명하는 것은 화려한 직위가 아니다.

내가 어떤 발자취를 남겨왔는가, 그것이 나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발자취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언젠가 또 다른 길을 밝히는 빛이 된다.

돌아간 길은 결국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나다운 곳에 닿기 위한, 가장 단단한 길이었으니까.


“다음 글: 〈버티니 보이는 풍경〉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11화11. 무시당한 선택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