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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뿔 Aug 13. 2022

말은 주고 받는 것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을 글자라는 부호로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 글이다. 

글쓰기를 어떻게 하나 하는 길은 이렇게 세상이 다 아는 훤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

말은 생각(의식)에서 나왔다. 

생각은 삶에서 나왔고, 삶은 바로 살아 있는 목숨이다.

.....

글은 어디까지나 말을 살려야 하고, 살아있는 말을 쓰는 것이 글의 이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글, 쓰고 있는 글은 어떤가? 

말을 쓰는 글이 되어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글은 거의 모두 중국글과 일본글과 서양글을 그대로 옮겨와서 그것들을 마구 뒤섞어서 써놓은 글이다.

........

참 괴상하게도 우리는 말을 글에서 살려서 쓰지 못하고, 엉뚱한 글에서 글말을 배워 글을 쓰는 것이다.

그 결과 글이 말을 끌어가고, 이 글말이 사람을 끌어가고, 삶까지 끌어가는 거꾸로 된 역사를 살고 있다.

.........


(삶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글이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도표로 보여줍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나야 할 '글'이 가장 먼저 생겨나 말과 생각과 삶을 부리는 

이 거꾸로 된 현상은 단지 말과 글뿐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에서 '병든 흐름'으로 되어 있다. 

모든 문화는 말이 뿌리가 되어있는데 그 말이 글에 짓밟히고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글을 독차지하는 관리들과 지식인들과 돈 가진 이들이 움직이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글을 모르면 사회에 나가 활동할 수가 없고, 여행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람노릇을 제대로 못한다.


            



우리 문장 쓰기

작가이오덕출판한길사발매199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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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랜 세월을 한자를 새기는 방식으로 글을 표현해왔습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새김방식은 계속 유지되면서 살아있는 말과 글이 어긋나있었는데

일제 식민지기간동안 일본식 어법이 배어들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낯선 개념과 외래어가 우리말에 섞여들어와서 우리말은 더욱더 어긋나고 비틀려서 

살아있는 우리말이 숨쉬는 글을 찾아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요즘은 쉬운 한글로 풀어쓰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전문용어와 약어를 남용하는 언어습관과 우리말을 쓰는 방법이 아닌 어조사의 사용법이나 시제사용법등에서 보듯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허다합니다.

우리말에서 글말과 입말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든 문장에서 어미가 ..다로 끝나면 글말입니다.

순수한 대화에서는 '다'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자체도 글말에 영향을 받아서 변형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싶은데 막상 쓰려고 하면 쓸 것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삶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삶인데 새삼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해도 내 삶에서 생각이 나오지 않고 내가 읽은 글에서 누군가의 말에서 영화에서 텔레비젼에서 들은 말에서 내 생각이 나오니 내 것이라고 따로 표현할 것이 없는 겁니다.


글이 잘못되어 말을 더럽히고, 말이 병들어 우리들 생각도 따라 병들고, 그래서 삶이 우리도 모르게 변질하고 뿌리뽑혀간다면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맞서서 해야 할 일은 환하다. 거꾸로 된 삶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글을 바로잡는 일이다. 

글을 남의 나라 말과 말법에 따라 쓸 것이 아니라, 우리 말을 우리 말법대로 써서 말을 살리는 것이다. 

말을 살리는 글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 같은 밖에서 들어온 말을 안 쓰고, 쉬운 말과 순수한 우리 말을 찾아 쓰면 된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쓰면 된다.


하지만 쉽게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말은 주고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대화에 익숙한 우리는 이미 살아있는 말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

모든 말은 주고받는 데서 생겨나고 발달되었다.

우리 말도 어디까지나 주고받는 말이다.

논밭에서 일하면서 하는 말이 주고받는 말이고, 길을 가면서 하는 말도 그렇다.

방안에서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도 듣는 사람들의 질문이나 보충설명이 가끔 끼게 되고, 또 이야기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가면서 이야기한다. 말이란 그 본바탕이 주고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오늘날은 말이 어떻게 되어있는가?

서로 이야기하는 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너무 줄어들었다.

어떻게 되어가는 판인지 한쪽에서만 말한다.

모든 방송이 그렇고, 교회의 설교가 그렇다.

아이들은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배우지 못하고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서 배운다.

말을 배우는 과정부터가 '비인간화'되어있다.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지껄이기만 하고, 한쪽에서는 쉴 새도 없이 듣기만 하고, 이래 가지고야 살아 있는 말을 배울 수가 없다.

....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잃었다는 것은 삶을 잃었다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도,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기 때부터 삶을 잃어버렸다.

삶이 없으니 말을 주고 받을 수가 없다. 삶을 빼앗긴 모든 사람은 그저 주는 말만 듣고, 이야기만 듣고 노래만 듣고 기계같이 움직인다.

언제나 그렇게 하다보니 그렇게 듣기만 하는 이야기나 노래가 마치 자기표현인 것처럼 착각하게도 된다.


'말은 주고받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갑자기 가슴에 콱 틀어박힙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말에서 너무도 낯설은 말투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대화가 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는 건가요?

단답형으로 날씨이야기나 시간을 물어보는 것이 아닌, 상대의 의견을 묻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면서도 내 자신의 입장을 놓치지 않고 

나의 의견을 개진하지만 상대의 말에 의해 나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인정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경험을 한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생활이 내공이 되어야 한다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린 기억이 납니다만 

생활에서 깨우침을 얻고 생활에서 내공이 불어나는 삶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생활에서 생각이 나오고 그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그 말에서 글이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나의 경우에서는 글에서 생각이 나오고 말이 나오고 글이 나옵니다.

물론 생활이 아예 반영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글에서 얻은 것을 경험에 비추어 보면서 생각을 얻는 과정을 거칩니다.


어쩌다 한번은 삶이 반영된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글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독백으로 그치고 그것이 진정 내 삶을 바꾸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내 삶에서 일방적으로 말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는 자각은 나의 자아에 갇혀서 세계와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자각과 궤를 같이 합니다.

내 삶을 글에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책을 읽고 머리로 생각한 것을 글로 옮기기만 하는 것.

이는 어쩌면 낙타가 책을 나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또 아무리 진심을 다해 삶을 담아낸 글을 쓰고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으면 

허공에다 대고 독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주고 받으려면 상대가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말을 하고 살아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개인의 글읽기와 쓰기 문제가 아니라 

함께할 때, 보다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일꺼라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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