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수용
부족함, 내게 주어진 생명의 화폐.
어린이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에게 수족구로 의심되는 병변이 발견되었으니 병원에 다녀와달라는 연락이었다. 최근 나를 너무 돌보지 못해 아이들을 보내놓고 잠시 한숨이라도 돌리고 싶었던 날이다.
스파링은 1라운드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라운드를 알렸다. 벌써 두려웠다. 연휴도 아닌데 아픈 두 아이를 홀로 끌어안고 지낼 수 있을까.
다시 전장으로 소환된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잠시라는 시간이 무색하도록 순식간에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마음은 다시 알맞은 이름표를 찾았다. 그러나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정리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름표를 붙이고도 어찌할 수 없다는 이 상황적 무력감이, 나에게 제시된 새로운 단계를 또렷이 보여줄 뿐이었다.
수 십 년을 단단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내가 노력해서 만든 단단함은 어쩌면 얼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녹아내릴 수는 없었다. 아니, 아플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나는 이미 실온에 나와있는 얼음이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결국 내가 누구였는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겁이 많다. 그렇지만 내게는 두려움을 피하는 방법이 있었다.
'촘촘하게 준비하기.'
이것이 그동안 내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이것으로 오랫동안 내게 눈속임을 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방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아이는 내 예측과 통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다시 겁쟁이로 귀향하게 되었다.
아이라는 존재는 정말 연약하다. 아주 작은 환경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연약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허술한 나라도 가림막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마치 풍선껌 같았다. 크게 불 수록 얇아지고, 결국에는 입술 위에 막처럼 달라붙으며 터지고 마는, 위태로운 풍선껌. 그렇게라도 감싸줄 수 있는 보호막이 되어야만 했다.
풍선껌은 연약함을 감싸는 법을 알려준 생존 본능이었다. 위태로웠지만, 내겐 그것뿐이었다. 껌처럼 딱 붙어 보호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었다. 내가 강한 사람이었더라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었겠지만, 가진 자원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우선은 아이를 들쳐 안고 병원부터 달려갔다. 다행히도 아이는 수족구가 아니었다. 머릿속 분주했던 시간 덕에 이 결과는 허무할 지경이었지만, 정말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의 치열한 플랜전쟁 속 약해빠진 나의 새로운 생존 전략법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로도 든든했다.
신비롭게도 삶은 연약함을 통해, 나를 다시 보게 하고 다시 살게 한다.
나답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를 세상으로 몰아세웠던 때,
그곳에 나를 전시해 두고 사람들의 평가에 나를 내맡겼던 일,
그렇게 벌게진 나를 보고도 돌봐주지 않은 것.
연약함을 단단한 척 포장해 두고 눈길조차 피해버렸던 시간들이 하나 둘 모여와 내 앞에 앉았다. 객석에 앉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기라도 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앉아 눈을 흘긴다.
아이라는 약하디 약한 존재를 통해 내 가장 아래, 마음의 저 구석진 곳까지 누군가 들여다보고 찔러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불편한 순간은 꺼림칙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는 처음부터 연약했고,
강해지려 애썼지만 결국 연약했으며,
끝내 그 사실을
아이의 연약함을 통해 마주 앉혀놓은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온 집안이 푸석해진다. 예민해지고 웃음이 사라진다. 우리는 이 시간을 서로의 연약함을 바라보며 견뎌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이테를 한 칸 더 그리며, 그렇게 우리로 한 폭 성장한다. 그러니 나를 더 건강히 돌보는 것은, 더 건강한 우리가 되기 위한 나의 숙제일 것이다.
극복하려 애썼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한 나의 연약함을 생각한다. 강한 척하며 세상의 허허벌판, 거기다 내려둔 것도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내 패배를 인정한다. 또 연약함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으로 나는 쌍둥이 아이와 나를 함께 키우기로 했다.
문제는 연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을 대하는 내 삶의 태도, 즉 근본을 감추려 들며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누군가는 내게 사랑을 부어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나는 그 사랑으로 조금 더 튼튼해질 수 있다는 것. 이 아름다운 화음을 위해, 나의 부족함도 기꺼이 내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사랑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내딛는다.
연약함은 내게 주어진 생명의 화폐였다. 우리의 부족함은 이렇게 기꺼이 화폐가 되어줄 것이다.
비록 내 삶은 짤랑임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소리가 듣기 좋다. 나는 아이들에게 완벽함보다 부족한 채로 사는 충만함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