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등변 삼각형과 불균형의 미학
회복은 일상으로부터 걸어온다.
연약함을 마주하고 나니 그 아래 심연이 보였다.
나는, 낭떠러지에 산다.
아내 마음을 철저히도 몰라주는 남편과 살던, 그런 어머니 손에 나는 자랐다. 생활고도 극심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부였을 뿐임을 안다. 엄마는 감정이 한계치에 차오르면 차라리 다 같이 죽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어릴 적에는 그 말이 지독히도 무서웠다. 소중한 존재가, 바람처럼 잡히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두려움의 씨앗은 내 안에 움텄고 그 기억이, 나를 위태로운 곳에 살도록 조금씩 밀어냈다. 나는 상처를 안고도, 결국 좋은 몫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 산다는 것은 매일이 극기훈련이었다. 행복은 늘 차선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더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행복은 자연스레 문턱이 점점 낮아졌다. 내겐 안전이 행복이었으므로, 누군가의 찡그린 얼굴을 보지 않고 조용히 하루가 마무리되면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는 아이와 행복의 관계는, 자력이 강한 자석의 같은 극을 맞붙였을 때의 밀어내는 힘과도 같다. 무의식에 칩처럼 내장되어 버린 고통의 시간은, 자라나면서도 꽤나 견고한 틀이 되어 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내게 닻을 내려두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관계를 떠나보내는 것이 내게는 장례나 진배없었다. 소중한 이름이라도 일기장에 담아두려 하면, 두려운 마음은 갖은 수를 다 써서 나를 비굴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사랑의 불균형은 고스란히 내게도 스며들어, 나라는 사람까지 불균형하게 했다.
내 삶은 축이 기울어진 나사 같았다. 휘어진 중심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구멍을 만들며 겉돌기만 했다.
상실이 두려운 만큼 안정을 쫓았다. 그러나 안정을 추구할수록 행복은 연기처럼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행복이란 내 삶과는 점점 더 무관한 것이 되어갔다. 나는 더 이상 부품을 구할 수 없는, 망가진 자동차 같았다.
어떻게 해도 내게는 열리지 않는 문으로 남들은 잘도 드나들었다. 나는 열린 문을 찾고 싶었다. 간절했다. 이곳에 갇혀 지낸 세월이, 너무 길었다. 빛도, 나갈 길도 없는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내게 비상구를 찾는 일은 어쩌면 죽을 결심과 견주어 볼 만한 사안이었다.
까딱하면 산소 부족으로 나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그 순간, 정말 운 좋게도 자신의 삶을 책임감 있게 살아낸 좋은 어른들을 만났다. 우연히 그들 삶을 들여다보며 흥미로운 새 책을 읽듯, 간접적으로나마 새로운 삶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태도였다.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딘지 늘 단순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정성스러웠다.
흉내내기조차 어려웠다면 시작도 전에 포기했을 테지만, 단순한 그것은 내게 비겨볼 만한 인상을 남겼다. 이 간단한 행위가 나에게도 굳게 닫힌 문의 빈틈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내게 비상구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모두 부등변 삼각형이다. 어떤 변은 길고, 또 어떤 변은 짧다. 우리는 각자의 길고 짧은 면들을 품어 각기 다른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모습인 채로 내가 속한 어딘가에 잘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애를 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누군가는 길이의 다름을 결함이 아닌 독자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를 소생시킬 수 있을만한 큰 힘을 갖는다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내가 잘 사는 것으로 어찌 타인을 구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구조가 그렇다. 하나의 숨 쉬는 생명체다. 이 유기체 안에서 각 기능들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때, 비로소 자가면역체계가 제 때에 발동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미 유전자에까지 깊이 새겨져 버린 불안의 씨앗을 도려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와 같은 삶을 살아낼 누군가를 위하여, 나는 기를 쓰고 전해야만 했다. 나 또한 사랑에 빚 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간힘을 다해 사수해 내는 우리의 일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모두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디, 계속 정진하기를.
불편한 구석을 안고도 매일을 애써 살아낸다는 것이 사회로써는 이미 산소호흡기 이상의 치료가 된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다른 길이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아름다운 각도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부족함을 더 이상 염려치 않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부등변 삼각형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