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원한 평행선 너머에서 보내는 그리움
취미가 독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진부하고 재미없는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가 삶이라고 말한다면? 그만큼 재미없이 살았다는 말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책은 신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임에 틀림이 없고, 책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성찰을 엿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커다란 행운이다. 그렇게 만났던 사람 중의 한 사람, 에밀 졸라를 이번에 새롭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 중인 세잔과 르누아르 전람회에 가기 위해 관련 책을 여러 권 읽다가 세잔이 에밀 졸라와 아주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했던 에밀 졸라는 파리에서 전학 온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체구도 왜소하고 병약한 편이었던 졸라와 달리 당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고 덩치가 크고 힘이 셌던 세잔이, 어느 날 운동장에서 친구들에게 맞고 있던 졸라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졸라는 이후 세잔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사과를 선물했고 세잔은 이 사과로 세상을 바꾸게 된다.
프랑스가 가장 ‘번성했던 시절’ 사회문화적 번영이 최고조로 올랐던 벨 에포크 시대의 중심에 드레퓌스사건과 에밀졸라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군부가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과 권위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꺼이 위험 속에 자신을 던졌다. 그는 혁명의 나라 조국 프랑스가 국가와 권력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정의를 짓밟은 사람들의 이름과 죄목을 한 사람 한 사람 조목조목 고발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내야 했다. 집을 폭발시키겠다는 위협과 폭력에 자신과 가족의 생명이 죽음 앞에 내던져지는 고통과 공포를 감수해야 했으며,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해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나는 고발한다' 라는 책으로 유럽 지식인들의 무디어진 양심을 깨웠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뒤바꾸는 대전환점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원인 모를 가스에 질식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 그를 통해 전해지던 진실과 용기, 그때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그는 나에게 또 하나의 별이 되었다.
반면 세잔은 위대한 천재 화가였지만 그가 추구했던 그림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같은 인상파 화가였던 르누아르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명성, 그리고 돈을 거머 쥔 것과 달리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빛의 파장이 만들어 낸 순간의 아름다움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상상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자연의 내면, 티끌 하나 없는 지상의 순전 무구함을 찾기에 골몰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혹자는 그를 철학하는 화가였다고도 말한다.
‘변화하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의 본질의 실체’를 발견했지만 구현해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영원성의 실체와 실제로 그린 그림이 수없이 어긋나고 또 어긋나기를 반복하는 현실은 그를 더욱 괴팍하고 예민하며 날카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폴 세잔 '강가의 시골 저택' 출처 : Pixabay
그런 그에게 언제나 날카로운 비판으로, 때로는 위대한 천재성을 가진 화가로 인정해 주던 가장 친한 친구 에밀 졸라가 있었다. 법관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 때문에 괴로워하는 세잔을 파리로 불러와 화가의 길을 걷게 했던 에밀 졸라, 아버지로부터 받는 후원금이 너무 적어서고통받을 때마다 에밀 졸라는 기꺼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고, 공식 화단에서 조롱받고 비난받을 때도, 그의 편에 서서
“그 친구는 한결같은 사람으로 완고하고 강인하다. 어떤 것에도 무릎 꿇지 않고 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는다.”
라며 친구의 그림을 옹호하고 비평을 통해 그를 지원했다.
((나는 오직 실재함과 충만함을 통해 유일한 것 또는 그와 같은 것에 귀 기울인다)) - 세잔
당시 에밀 졸라는 작가로서 대성공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명실공히 명사가 된 반면 세잔은 풍경에 포함된 여러 요소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극도의 좌절과 불안, 소외감 때문에 자신이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캔버스를 찢는 것은 물론, 화가들과 만남자리에서도 수틀릴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에밀 졸라는 당시 ((작품))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는데 그 ((작품))에 묘사된 랑티에라는 인물은, 평소에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해 캔버스를 찢거나 화를 내곤 했던 세잔을 빗대어 누가 봐도 세잔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묘사했다. 또 그의 예술적 번민과 사투를 무능력한 병적인 집착으로 치부했으며, 이르기를 ‘위대한 화가가 될 자질은 있지만 이뤄내지 못한 낙오자, 마침내 절망과 광기에 사로잡혀, 완성하지 못한 그림 앞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는 이야기를 출판하고 대성공을 거둔다. 이 책의 결말을 본 세잔은 결별을 선언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이다ㆍ내 의문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의 이별이 단지 졸라의 소설 ((작품))때문에 세잔의 감정이 상했던 것이었을까?
당시 에밀졸라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자는 자연주의 작가인 스탕달이나 발자크를 비판하며 ‘관찰만으로 드러나지 않은 유전적 요인과 사회적 환경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 증명하려 했다. 그가 출판한 ((루콩- 마카르 총서)) 20권은 자신의 자연주의 철학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던진 거대한 과학 보고서였다. 졸라는 당시 프랑스 제 2제정 시대의 부패, 빈곤, 노동환경등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묘사하기 위해 20권의 전체 구조를 미리 짜놓고,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써내려가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했다. (ENTJ적 탐구) 문제가 된 ((작품))은 총서 내에서 예술가의 기질과 유전을 다루는 파트였고 친구 세잔을 모델로 " 왜 어떤 에술가는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환경이나 기질 때문에 실패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 글이었다. 졸라는 이 소설을 통해 친구의 고통을 과학적 모티브로 삼아버린 것이다.
반면 세잔은 용의주도한 전략가형인 INTJ형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설계도를 찾으려 했던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바위산이나 초목의 본질에 감동하며 이를 포착하려 애썼다. 그는 대상이 단순히 흰색과 검은색뿐만이 아니라 파란색, 빨간색, 갈색 등 다양한 색채 실루엣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짧은 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긴 호흡의 관찰을 중시했다. 천재적인 화가이면서 좀처럼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외부의 따가운 비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세운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끈질기게 찾고 또 찾으려 했다. 한 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개월을 고뇌하며 초목이 변하지 않는 레스타크의 풍경을 붙잡고 자신만의 내면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예술적 고립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친구 졸라가 던진 보고서가 틀렸음을 단단한 붓질로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잔이 구축한 고향의 산은 어린 시절 졸라와 함께 뛰어놀던 곳이었고 수많은 추억이 깃든 산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졸라가 쓴 책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졸라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다’라는 글을 남겼다. 졸라 또한 세잔과 헤어진 이후에도 자신의 집에, 젊은 시절 세잔이 선물한 초상화와 풍경화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죽는 순간까지 그 그림들을 곁에 두었다고 한다. 비록 세잔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을지언정 세잔과의 기억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대한 두 거장의 우정은 단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세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법칙이었고 자신이 발견한 그 법칙이 너무나 확고하기에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라 할지라도 그 법칙을 부정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졸라의 원칙이 졸라와 함께 파괴당하는 것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며 깊디깊은 칩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졸라, 두 사람의 침묵은 암묵적인 존중과 배려였고, 우정이었고, 이해였고 그들만의 사랑법이었다.
졸라는 자신의 야심대로 드레퓌스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었고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유럽인을 각성하게 한 뒤, 일산화 탄소로 인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세잔 또한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칩거하면서 생트빅투아르산을 탐구하며 그 산에서 졸라와 약속했던 자연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아냈고 현대미술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졸라가 죽은 뒤, 4년 후 당뇨와 신경쇠약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그림을 그리다 쓰러졌고, 폐렴으로 삶을 마감했다. 1902년 졸라의 사망, 뒤이은 1906년 세잔의 죽음은 참으로 아프고 또 아팠다. 그들의 예술적 경계는 영원히 마주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고, 인간적 우정을 뛰어넘는 예술혼으로 영원히 남아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 너의 삶을 살아"
'나는 클로드 랑티에를 통해 자연에 맞서는 예술가의 투쟁, 즉 진정한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살과 생명을 불어넣는 그들의 피와 눈물의 노력, 언제나 진실을 위해 투쟁하며 언제나 패배하고 마는 천사와의 싸움을 그리고 싶었다.' - 에밀 졸라 -
'재능이란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 늘 새로운 감정을 품는 능력이다' - 폴 세잔 -
- 교차된 편지들, 앙리 미테랑, 소요서가 - 에서 재인용
- 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세잔과 졸라. 박기홍 ㆍ틈새의 시간 -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