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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myungdan Sep 02. 2023

푸른 나무에 나는 가끔 작은 새로 날아간다(4)

시간을 만나다



그 여름의 열쇠



깨어 있는 거라곤 개미와 나 뿐이었다  

낮잠 시간의 고요는 적막하고 지루했다

처마밑 그림자가 아직 새끼손가락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팔뚝이며 목덜미는 따가웠고 흙길은 잔뜩 달아 있었다

동네 친구집을 찾아갔지만

젊은 엄마 같은 언니의 품을 둔 선희는

나와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언니들의 모임 장소인 참외 원두막에 따라 간다고 했다

단내 나는 노란 참외 생각을 하니 외로움이 소외감으로 점점 커갔

언니가 없으니 원두막에 놀러 갈 일은 평생 없겠다는 상실감에 다다르자 세상이 온통 텅 비는 느낌이었다

모진 햇빛의 채찍이 느껴졌다

손닿는 듬쑥한 풀들을 쥐어뜯으며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등은 우울하고 슬펐다

풀들도 땀을 흘리는지 풀냄새가 진동했고

생기 잃은 모습은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묘한 외로움을 경험하며 인간으로서의

굳은살을 만들어 가던 그 여름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니

마주치고 싶어도 마주칠 수 없는 그 소녀에게 어느새 쓸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괜찮아! 인생은 원래 그래"






정체되어 있던 관계를 터 준 건 중학교였다

초등학교 바로 옆 중학교였지만 설레임은 새로웠고 컸다

듣도 보도 못한 동네의 까까머리 단발머리들이 진학을 위해 면소재지의 중학교로

모인 것이다

긴장되는 희망도 환호할 쾌감도 없던

그동안의 시틋함에 종지부를 찍을 듯한

기대감이 막연히 차올랐다

호기심의 첫대화를 나눴던 미자의 진한

인삼비누 향도 새로움의 증거였다

드문드문 있는 기차를 기다려 통학하는 아이들, 이십 리 길을 걸어다니다 자취로 방향을 트는 친구의 고단함, 어쩌면 마지막 학창시절로 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친구의 어른스러움은 상급학교의 위상을 체감하게 했고 우리도 클 만큼 컸다는 풋내나는 겉멋이 불쑥불쑥 생기기도 했다

학년이 더하고 반이 바뀌며 다방면에서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초등학교 때 전학와 꽤 죽이 잘 맞는 동영이와, 시간을 쌓으며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재숙이, 미경이, 미옥이와 관계의 세를 불리며

서로에게 힘 받으며 커진 우물에서 우리의 기운은 내내 흐드러졌다

아동기를 벗어나며 사춘기 변화에 대한 혼란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서로에 대한 조망을 추억해 보면

농촌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학교라는 곳은 자연스레 서로를 부추기며 웃음으로 떠들어대고 웃음으로 씻어버리는

늘 샘솟는 물이었다

연분홍 호기심에 휩싸여 퐁퐁 솟던

물줄기에 입을 갖다 대면 여전히 달다




시간의 손잡고 뿔뿔이 바다로 향했으나

흡수력과 응집력과 회귀는 어쩌지 못한다

숙명적 유대에 대한 숙명적 그리움이 인생 밑바닥에 자리잡고 문득 문득 가슴을 두드린다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지라도 다시 풍요로워지는 고향의 추억은 인생 화수분이다




이제 고향은 더 이상 젊지 않다

소고삐 길게 매 놓고 하릴없는 시골내기에게 혼자라는 걸, 혼자가 아니라는 걸 향기로 깨닫게 해 준 가시덤불 옆 주홍빛 야생 나리꽃을 만날 일도 없고

혁신적이어서 감격스럽던 신작로를

이젠 걸을 일이 없다

동네엔 시끌벅적 아이들 소리가 마른지 오래다

돌돌돌 등굽은 엄마들의 보조보행기 구르는 소리만이 넘친다




그러나 고향의 추억은 언제나 푸르다

푸른 나무에 마주난 잎들처럼

얼굴 맞댄 싱그러운 냄새가

오늘도 코끝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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