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나눈 친족과 관련된 이야기들
부부관계에 털어놓지 못할 비밀은 없다고 생각했다. (비자금은 논외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전 깨졌다.
몇 년 전, 엄마는 나에게 본인의 가장 깊은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빠에게도 말하지 못했는데 나에게 털어 놓는다던 그 비밀은
외할아버지가 자살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외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몸이 아프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엄마는 그 때 그 일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었다.
당시 큰 사건이 벌어졌고 상처받으신 외할아버지가 자살하실 것 같아서
당시 어린 아이었던 엄마가 집에 있는 농약을 꽁꽁 숨기고 밭일을 도우러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꽁꽁 숨겨놓은 그 농약병을 외할아버지는 너무 쉽게 찾아내셨다.
어린 아이에게 당시 그 사건은 얼마나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입밖으로 담담하게 꺼내는 그 이야기에 엄마의 슬픔, 후회가 담겨있었다
엄마에겐 그 이야기가 왜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되었을까?
그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최근에 남편에게도 얘기하지 못할 비밀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남편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와 똑같이 아버지에 대한 비밀이다.
아버지가 등본을 떼어도, 딸인 내 주소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에겐 그러지 않았지만
무서우리만큼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그런 아버지를 못견디고 어머니는 몇년 전 이혼을 선언하며 집을 뛰쳐나오셨다.
이혼 소송도 준비해봤지만 어머니의 변호사들은 번번히 아버지의 협박에 의뢰를 포기했다. 여러 변호사를 전전하다가 지친 우리는 일단 어머니의 거주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거처를 마련해도 전입신고를 하면 아버지가 금방 주소지를 찾아낼 수 있어 내 이름으로 전세집을 마련해 근처에 집을 구해드렸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등본을 떼어도 내 주소를 확인할 수 없도록 법적인 조치를 취했다. 부부 사이엔 어렵지만 자녀사이엔 가능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런 쫓고 쫓기는 관계도 몇개월을 못갔다.
30년 넘는 결혼관계를 끊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화해하고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언제 또 그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보험 식으로 그 법적 조치를 유지하고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단 한번도 남편에겐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집을 구해드린 것은 옆에서 다 지켜봐서 알고있지만 변호사의 일화, 법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남편이 아직 모른다.
이런 밑바닥까지는 남편에게 들키기 싫은 마음이 컸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불편한 사람은 나 하나로 족했으면 했다. 아무리 엄마와 나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남편과 함께 신나게 욕하고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겐 털어놓지 않지만 나에게 털어놓았던 외할아버지의 죽음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지 않았을까 싶다.
슬프고 좋은걸 모두 나누는 인생의 둘도없는 친구가 남편이라는데 사실 가장 가슴아픈 이야기는 털어놓지 못하는 것 같다. 절대 털어놓고 싶지 않은 피를 나눈 친족과 엮인 일들. 어쩌면 피를 나눈 자식에겐 얘기할 수 있어도 남편한텐 얘기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
그게 뭔지 이제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