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에서 살아남기

0. 프롤로그

by 김둘이


아무것도 없는 호주 시골에 떨어졌다.


가장 가까운 공항은 차로 한 시간이 걸리고, 우버 서비스도 지원되지 않는 말 그대로 깡촌 시골동네.

배달은 없다. 외식할 만한 식당은 5분 거리의 피자헛, 20분 거리의 한식당과 호텔 식당, 그리고 피시앤칩스 바뿐이다.(이 식당들은 각각 삼각편대 방향으로 떨어져 있다.)

마트는 차로 7-8분, 걸어서 30분 거리의 울월스(호주에서 가장 흔한 대형마트), 걸어서 10분 거리의 IGA라는 중형 마트, 그리고 걸어서 7분 거리의 작은 아시아마트가 전부이다.


불평을 늘어놓자면 끊임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이 시골 마을에서 기이한 평안함을 느꼈다.


IMG_4085.HEIC
IMG_2556.HEIC
집 앞 5분 거리의 바닷가와 노을

걸어서 5분 거리에 바닷가가 있고, 하루에 2-3번 오는 버스를 타고 20분쯤 가면 커피맛이 근사한 작은 카페(멜버른에서 온 바리스타 친구가 인정했다)와 예쁜 해변을 볼 수 있다. 오렌지 빛으로 온 하늘을 뒤덮는 석양도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도, 집 앞의 무료 야외 수영장도 운치를 더한다.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놀러 나가고, 차를 렌트해 인근도시로 당일치기 여행도 다녔다. 여기에 겨우내 기온은 18-23도.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PICT0107.jpg
PICT0108.jpg


나는 여성전용 호스텔에서 지내며 농장에서 일을 했다. 20대 여자들만 열댓 명이 모여있으니 흡사 여고 분위기가 난다. 생일 때마다 롤링페이퍼를 쓰고 과자 파티를 하고, 누군가가 떠날 때면 모여서 바베큐 파티도 벌인다.


환경은 낭만적이지만 낭만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나를 온전히 먹여 살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IMG_0905.HEIC
IMG_1293.HEIC
점심 도시락과 장보기

하루 세끼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아침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일을 간다.(싱크대는 작고 모든 주방기기(팬, 냄비, 접시, 그릇, 수저, 도마 등등)는 공용이므로 쓰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게 원칙이었다.) 점심시간엔 싸 온 도시락을 꺼내 30분 안에 전투적으로 먹는다. 저녁이면 하루 종일 일해 녹초가 된 몸으로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내일 점심 도시락을 싼다. 배달도 외식도 어려운 이 동네에선 정말 피곤하다면 라면이라도 직접 끓여야 한다.


함께 사는 친구들은 열댓 명, 화장실은 3개. 씻기 귀찮다고 게으름을 부릴 시간이 없다. 화장실에 자리가 나면 당장 씻어야 한다. 씻고 나면 겨우 한두 시간 정도의 여가시간이 생긴다.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우면 자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다음날 또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가야 하니까.

삐걱거리는 2층 침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게 허락된 작은 자리에 몸을 뉘인다. 이 넓은 집 유일하게 허용된 나만의 자리엔 온갖 잡동사니(충전기, 아이패드, 노트북 등)가 같이 자리해 쉽사리 다리를 뻗지 못한다.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는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삐걱이는 나무 프레임에 적응해 가며 잠에 빠져든다.


쉬는 날엔 아침 10시 폴이 픽업해 주는 차량을 타고 울리(호주 사람들은 모든 단어 끝이 '리'를 붙여 줄여 부른다. 울월스도 모두가 울리라 부른다)에 장을 보러 간다. 쉬는 날은 일주일에 2번. 보통 하루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니 한번 장을 보러 가면 일주일 치 장을 봐와야 한다.


IMG_1856.HEIC 장을 한가득 본 날

그렇다고 너무 많이 사면 곤란하다. 나에게 허락된 공간은 업소용 음료수 냉장고 한 줄의 반 칸. 혹시 부족할까 과하게 쇼핑을 하면 냉장고를 정리할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쉰다.

요리를 할 줄 아는 것과 살림을 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냉장고의 남은 재료를 파악해 할 수 있는 요리가 무엇인지 몇 끼를 해 먹을 수 있는지 계산해야 한다.

쉬는 날엔 3-4일 치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해놓는다. 김치찌개, 카레, 포토푀(프랑스식 야채수프인데 내 식대로 이것저것 때려 넣는다), 찜닭, 제육볶음 등 한 솥을 해놓고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마음이 뿌듯하다.


빨래도 직접해야 한다. 세탁기 두대를 공용으로 쓰니 빨래를 돌리는 동안 꼼짝없이 집에 붙어있다 빨래가 끝나는 순간 빨랫감을 꺼내줘야 다음 사람이 쓸 수 있다. 빨랫줄도 부족하니 빨래를 넌 다음날이면 빨래를 걷어와 개야 한다.


IMG_2775.HEIC 빨랫감으로 가득한 빨랫줄


그렇게 먹고 씻고 자는 단순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퇴근하면 거실 소파에 늘어져서 한 시간 동안 핸드폰을 하는 게 일상이었던 내가, 퇴근하자마자 밥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고 내일 점심 도시락을 싸고 샤워를 하고 나면 그제야 소파에 앉아 쉬었다. 그 일상이 조금 버겁긴 해도 괴롭지 않았다. 모든 걸 해내고 하루를 무사히 보냈을 때 뿌듯한 성취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고. 어차피 언젠가 했어야 될 일 아니었냐고.

맞다. 하지만 호주 시골에 떨어져 나를 온전히 먹여 살리는 경험을 처음 했기에 나는 기꺼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억지로 괴로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즐기는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Good morning! 하고 인사해 주는 친구들이 있고, 피곤해도 같이 눈 비비며 출근하고, 언제나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주방에 가면 저절로 요리 욕구가 샘솟는다. 옆에서 베트남 친구가 만드는 쌀국수와 태국 친구가 만드는 그린커리를 얻어먹을 수도 있다. 보답으로 떡볶이를 해주면 한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다며 호들갑 떨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힘들고 불편한 줄도 몰랐다.

IMG_4107.HEIC 친구들에게 해준 떡볶이와 잡채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꼭 워홀(*워킹 홀리데이)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일을 하며 휴가를 즐기기 위해 호주로 몰려든다. 누군가는 경험을 쌓으려고, 누군가는 영어 실력을 늘리려고, 누군가는 돈을 벌려고 낯선 땅에 겁도 없이 뛰어든다. 낯선 땅에 뚝 떨어져 혼자 통장을 개설하고,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집을 구하고, 일을 구하는 경험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 일은 하나도 없다. 몇 달이 넘도록 일을 못 구하기도 하고, 겨우 구한 일이 너무 힘들어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고, 순간 간단한 영어도 하지 못해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릴 때면 마음이 한없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 시기를 버텨내면 비 온 뒤 땅이 굳듯이 더 단단해진다. 모든 경험은 쌓인다. 헛된 경험은 없다. 영어를 못해 당황했을 때 어떻게 말했어야 했는지 찾아보고 속으로 몇십 번을 곱씹어 보면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경험은 소중하다.


내가 워홀 생활 중 겪었던 경험 중 단연코 가장 좋았던 경험은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나를 온전히 먹여 살리면서 살았던 4달이다. 모든 것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니 좋은 것만 기억에 남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고,

바닷가 앞 벤치에 앉아 연한 아이스 롱블랙과 레몬치즈케익을 먹으며 멍을 때리고,

거실에 다 같이 요가매트를 깔고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일요일이면 선데이마켓에 놀러 가 아이스크림이나 닭꼬치를 사 먹고,

바닷가를 따라 러닝을 하며 노을을 감상하고,

비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고,

펍에 모여 앉아 다 같이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럭비 경기를 응원하고,

밤하늘의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산책하는,


느리고 아름답게 흘러갔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풀어보려 한다.



IMG_1470.HEIC
IMG_0888.HEIC
IMG_0691.HEIC
IMG_0678.HEIC
IMG_2389.HEIC
IMG_3852.HEIC
IMG_2657.HEIC
IMG_0959.HEIC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