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엄마는 늘 말한다.
"너도 너 같은 딸 하나 낳아봐라."
그래서 아직 나는 낳지 못했다.
엄마가 돼 본 적은 없지만, 딸은 돼 본 적 있다.
그녀는 내가 씨앗이었을 때 지우려 했고, 실패했다.
몇 년 후엔 연탄가스로 함께 죽으려 했지만, 또 실패했다.
그렇다.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엄마에게 있었다.
나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없애는 것도,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버리는 것도.
그럼에도 아이가 굶거나 억울한 꼴은 차마 보지 못한다.
엄마는 여전히 말한다.
"선풍기 끄고 자라, 밥 꼭 챙겨 먹어라."
엄마라는 이름으로.
박찬욱은 복수의 살인을,
봉준호는 보호의 살인을 한다.
할리우드이었다면, 엄마는 복수를 위해 체력을 키우고 총을 들고 직접 싸우는 영웅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엄마들은 조력자를 만든다.
나를 도와줄 사람들, 내 편을 만든다.
금자 씨는 친절함을 베풀어 도와줄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복수의 끝에 다다랐을 땐 혼자만의 복수가 아니라, 피해자들을 불러 모아 "공동의 복수"로 동참시킨다.
마더는 침과 약재, 옛 인연, 정, 돈을 동원한다.
경찰이 손을 놓으면, 직접 발로 뛰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묶는다.
사진관 미선에게선 정보를, 진태의 주먹에서 힘을, 형사들에게선 동정을 얻는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지키기 위한 입막음의 살인을 저지른다.
엄마는 늘 파괴할 수도 있고, 동시에 목숨을 걸고 지킬 수도 있다.
그 모순이 아이를 살리고, 또 아이를 옭아맨다.
그래서 엄마란 위대하다.
한편으론 공포스럽게, 또 한편으론 눈물겹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