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자리가 남기고 간 다정한 여운

한 번의 스침, 그리고 영원히 남을 찰나의 기록

by 하카나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인연과 스쳐 지나갑니다.



가벼운 바람처럼 옷깃만 스치고 흩어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엔가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내어주게 되는 무거운 관계를 맺기도 하지요.



하지만 삶이란 참으로 기묘해서, 때로는 아주 잠깐, 아무런 말 없이 같은 공간의 공기만을 나누어 마신 완벽한 타인에게서 가장 짙은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 일산의 낡고 후미진 골목 끝 하카나이(儚い)에는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각자의 품에 조용히 책 한 권씩을 안고 들어오신 두 분의 손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낯선 공간이 주는 묵직한 어둠 속에서도, 두 분은 전혀 서두르거나 낯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의 공기를 알고 계셨던 사람들처럼..



저는 숨을 죽이고, 세상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속도로 물을 끓였습니다. 화사한 산미가 새벽의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새벽안개(Mist)' 한 잔과, 차가운 얼음 사이로 진한 커피가 서서히 스며드는 아이스 '카페 오 레' 한 잔. 두 분의 각기 다른 마음 날씨를 담아낸 그 잔들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습니다.



이곳의 유일한 규칙인 '침묵과 사색'을 이미 온몸으로 이해하신 듯, 두 분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이내 자신만의 활자 속으로 깊이 빠져드셨습니다. 그 고요하고 무해한 풍경이 참으로 고마워, 방금 데워내어 따뜻한 온기를 품은 '고요 마들렌'을 말없이 곁들여 드렸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분이 문을 열고 다시 소란한 세상 밖으로 떠나신 후, 빈 테이블을 치우러 다가간 제 눈앞에는 이런 풍경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말끔히 비워진 하얀 커피잔과 호박색 유리컵. 그리고 솔방울 옆, 아주 작은 빵 부스러기 하나만 외롭게 남은 까만 접시.



하카나이. 사물이 금방 스러지고 사라지기에 비로소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이 작은 방에서, 저는 두 분이 남기고 간 이 '완벽한 소멸의 흔적'을 보며 잠시 서 있어야 했습니다. 무언가가 가득 채워져 있던 자리가 이토록 단정하게 비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제가 묵묵히 볶아낸 찰나의 시간에 대한, 가장 다정하고도 깊은 무언(無言)의 찬사였습니다.



오늘 이 공간에 머물렀던 두 분과 제가, 앞으로의 남은 생에서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머물다 간 그 다정한 여백과 텅 빈 접시의 희미한 온기는, 제가 앞으로 수백 번의 원두를 볶고 수천 잔의 커피를 내리는 길고 고독한 시간 동안 결코 지워지지 않는 단단한 닻이 되어줄 것입니다.



기꺼이 당신의 고독한 시간을 이곳에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다시 돌아간 그곳의 일상도, 오늘 제가 마주한 저 비워진 잔처럼 평온하고 홀가분하기를 먼발치서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여운 속에서..


하카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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